묻따풀 2024: 함께 말 차리기
'아장스망'이라는 개념을 쫓다가 만난 <질 들뢰즈 : 차이와 반복의 철학자(기초 이해편)>이란 영상에서 배운 점을 기록으로 남기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지난 글 <아장스망: 쪽인 나로 대상을 새로 차리기>에 이어서 질 들뢰즈가 발견한 개념을 조금 더 배우고 기록해 봅니다.
먼저 영상에서 소개한 중요한 개념이 표상입니다. 영상에서는 표상을 우리의 사고를 지배하는 틀이라고 말합니다. 표상은 안도감을 주어 믿음을 형성하는 것이겠구나 짐작하게 하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익숙한 '오랑캐' 프레임을 예로 듭니다.
오랑캐라는 개념은 비단 옛날 중국뿐만이 아니라 현대의 우리나라에서도 유효한 듯합니다. 중국에 가 보지도 않은 사람들이 혐중 프레임을 믿고 자신 있게 내뱉는 근거 없는 이야기들 속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동남아 사람들을 차별하는 시선 속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앞으로 더 나가기 전에 표상이라는 낱말의 뜻을 따져 봅니다. 표상의 풀이를 보니 바로 이 시리즈의 기원이 된 2021년 3월 <본과 보기 문화이론>을 읽고 쓴 <나 혼자 하는 묻따풀 출사표>를 떠올리게 됩니다. 글 번호가 31번인 것을 보니 거의 브런치 사용과 비슷한 시기에 함께 했네요. 아무튼 표상은 본과 보기의 관계와 매우 밀접한 개념입니다.
영상은 플라톤 이후 중세까지 이어온 서구의 관점에 대해 설명합니다. 여기서 제 안에 저런 것이 없음을 확인합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천국'을 말할 때 냉소적일 수밖에 없던 이유를 깨닫습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헤겔에 이르기까지도 그런 절대적인 무언가를 전제로 생각하는 틀에 갇혀 있었다고 합니다. 철학사에서는 헤겔이라고 하지만, 제 개인적으로는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에서 소개한 벤자민 프랭클린이 떠올랐습니다. 개인적으로는 합리적 이기는 하나 숨이 막히는 답답한 방식이라고 느꼈었죠.
하지만, 당시에는 말로 표현할 능력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야 만난 영상이 당시 느낌을 설명하는 듯합니다. 자기 부정성 즉, 자신을 대상화한 후에 어떤 면을 부정적으로 평가한 결과를 가지고 개선을 하려는 행위는 프랭클린이 자기 계발을 했던 사고 체계의 핵심입니다.
한편, 영상에 따르면 들뢰즈는 기존의 질서를 유지할 수 있는 힘이 바로 사람들이 표상에 갇혀 세상을 이해하는 데에 있다고 설명합니다. 달리 말하면 개인의 사고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이죠. 흥미롭고 탁월한 지적입니다. 프랑스혁명과 그의 표상주의 거부가 관련이 있을 듯하다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한편, 개발자 경력 때문에 표상주의는 클래스 기반의 객체 생성과 그대로 닮아 있는 점도 눈치챌 수 있습니다.
이에 반해 들뢰즈는 시시각각 변화하는 시간 속 현상으로 '차이 그 자체'에 초점을 두었다고 합니다. 여기선 또 개발자 경력 때문에 Git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기서 관점을 조금 더해 보겠습니다. 최봉영 선생님에 따르면 질 들뢰즈가 인식한 내용은 이미 한국말에 담겨 있는 자연스러운 인식이라고 했습니다. 오히려 한국말을 쓰는 우리가 너무나 한국말의 바탕을 몰라서 질 들뢰즈를 추종하는 경향이 안타깝다고 하셨죠.
지난해 썼던 <사람들이 한국말로써 세상을 담아내는 방식>을 살펴보면 한국말로 세상을 담아낼 때 그 시작은 '됨이'입니다. 온갖 것들이 쪽으로서 함께 하는 가운데 무엇이 어떻게 되는 일이 끊임없이 벌어짐을 전제로 세상을 인식하고 표현하는 것이죠.
들뢰즈 식으로 '차이'를 인식하는 한국말의 논리식을 최봉영 선생님의 도식을 이용해서 설명해 보겠습니다. 먼저 앞서 설명한 대로 온갖 것들이 쪽으로서 함께 하는 가운데 무엇이 어떻게 되는 일이 끊임없이 벌어지는 중에서 우리가 임자로서 관심을 두는 것을 마주합니다.
한국말에서 마주한 것은 '이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 것의 다양한 양상을 관찰하여 어떤 것인지 판단하거나 규정합니다. 다양한 양상을 들뢰즈 식으로 표현하면 유영만 교수님이 강조했던 '기호'에 해당하겠네요. 하지만, 철학 맥락을 벗어나 다양하게 활용하려면 기호란 표현은 별로인 듯합니다. 오해를 낳기 쉽고 포용력이 떨어집니다. 도리어 인공지능 용어인 파라미터가 더 낫다 싶을 정도네요. :)
이렇게 마주한 것이 어떤 것인지 파악하고 나면 이름을 규정합니다. 개념화 단계라고 여겨집니다.
그렇게 개념화되고 나면, 클래스나 사유의 이미지 혹은 기억 속에 보관된 앎과 연결하거나 꺼내어 현상을 만들어 낼 수 있죠.
여기에 도달하면 제일 먼저 결론 내릴 수 있는 일은 질 들뢰즈 이전의 철학은 한국 사람들에게 전혀 알 필요가 없는 지식이란 생각입니다. 서구를 맹종하는 것이 아니라면 말이죠. 물론, 영어를 모국어로 쓰는 한국 사람은 예외입니다. 한국말 안에 이미 우리가 필요한 논리 체계가 다 있으니 그걸 공부하는 편이 더 효과적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영상에서 인상 깊었던 내용을 어그로 끄는 제목에 담아 결론을 내립니다. 헤겔이 말한 동일성은 지배 계급에게 유리한 통치 수단으로 좋은 사유의 틀이란 생각이 듭니다. <Why>에서 질타하는 모두가 칠판을 바라보는 상황을 연출하는 힘이 동일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들뢰즈에 따르면 동일성은 그저 착각일 뿐입니다.
중학교 때부터 칠판을 보는 척만 했던[1] 저는 이를 쉽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저는 들뢰즈의 생각을 철학 책이 아니라 '지속가능함이 무엇인가?'에 대한 추종 그리고 그 과정에서 만난 <당신이 옳다>에서 파생한 생각과 시행착오 속에서 이미 일정 부분을 알고 있었던 듯합니다. 특히, <우리는 처음부터 개성을 가진 존재다>를 쓸 때는 아주 강렬하게 정형화된 사고의 감옥에서 벗어난 느낌을 받기도 했으니까요.
하지만, 어그로에 그칠 제목을 더 강력하게 주장하려면 한국말로 어떻게 차릴 수 있은지 본과 보기를 보여주어야 할 일이 남아 있습니다. 아직 그럴 능력이 부족하니까요.
[1] 중1 때 만난 전교조 선생님 덕분일 수도 있지만, 제가 왜 그렇게 행동했는지는 정확히 알지 못합니다.
(86회 이후 링크만 표시합니다.)
86. 열린 우리주의(홍익인간)와 닫힌 우리주의(집단이기주의)
87. 나도 알 수 없는 내 마음: 밑바탕 마음에 대해서
89. 글 내용에서 내 경험과 공통점을 찾는 일은 대칭적인가?
94. 줏대가 없다면 모든 것이 완벽한들 무슨 소용이 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