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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아 Sep 19. 2023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19 고종실록

쇄국과 개화의 갈림길

 조선 후기 사회는 세도정치가문이 득세를 하는 시대였는데 특히 안동 김 씨 가문은 조선 왕실보다 더 힘이 강력했기 때문에 쿠데타가 일어나지 않은 역성혁명으로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


 조선의 절대자 왕조차도 안동 김 씨 가문을 어떻게 하지 못했던 이유도 권력을 준 대신들이 자신의 외척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안동 김 씨의 위세는 말 그대로 하늘을 나는 새도 떨어뜨리는 막강한 권력을 쥐고 왕을 허수아비로 만들던 시절이었다.


 강화도령으로 적장자 근처에도 못 가는 정통성으로 대신들을 물론 왕실도 후사가 없던 선대왕에 대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기에 그들에게 기대하는 것은 왕실을 이끌어가는 것이 아닌 왕실이 존재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뿐이었다.


 망조의 기운을 넘어 이미 망해버린 조선 왕실에는 더 이상 기품도 정통성도 남아 있지 않았고, 제국주의 열강의 야욕을 막기는커녕 조선의 기본적인 입장조차도 말하지 못하는 그런 나라였다.


 철종이 후사 없이 세상을 떠나자 효명세자 빈이었던 효유대비 조 씨가 왕실의 가장 큰 어른으로 섭정을 하게 되었고, 마지막으로 남은 정통성을 이어나가고자 했고 흥선군의 둘째 아들을 익종의 아들로 삼아 왕위를 이어나갔다.


 수많은 역모사건으로 종친이 연루되어 유배당하거나 사사되는 경우가 많았기에 종친이 귀해진 이 시기에 남연군 이구의 자손은 왕위 계승 1순위였다. 남연군의 넷째 아들인 흥선군은 효유대비와 긴밀한 교감이 있었기에 자신의 아들을 보위에 올릴 수 있었다.


 당시 다른 대안도 있었지만 효유대비는 가장 현실적으로 수령청정이 가능한 흥선군의 둘째 아들 고종이 즉위하며 끊어질 뻔한 왕실을 계승하며 동시에 안동 김 씨의 횡포로 인해 나락으로 떨어진 자신의 가문, 풍양 조 씨의 한을 갚고자 했다.


 앞서 이루어진 수렴청정과는 달리 정치적 식견도 자신을 보호해 줄 세력도 없었던 효유대비의 섭정은 흥선대원군을 정치적 파트너로 맞이하며 안동 김 씨를 타도하는 개혁의 기치를 올렸고, 그 시작은 서원의 철폐였다.


 당시 서원은 선현에 대한 제사에 교육을 목적을 하는 곳이 아닌 붕당정치의 근거지로 변질되었고, 향리의 말이 통하지 않는 지방의 권력기관이자, 부패의 중심이었다. 한때 1,000곳이 넘었던 서원의 횡포는 사대부의 근거지이자 상징이었다.


 대신들과 유생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명나라 황제인 신종과 의종의 제사를 지냈던 만동묘의 폐지하면서 본격적인 서원 철폐를 이어나갔고 사액서원 47개소만 남기고 서원을 없앴다.


 아직 어린 고종을 대신에 정국을 이끌어가던 흥선대원군은 무너져 버린 왕실의 기운을 되살리고자 경복궁 재건에 힘썼으며 이렇게 재건된 경복궁은 외형적으로는 왕실의 권위를 세울 수 있었다.


 하지만 공사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당백전을 발행하기도 했지만 훗날 경제적 혼란을 가중시키는 원인으로 작용한다. 당백전은 당시 주로 통용되었던 상평통보 100전과 같은 가치를 가지는 주화였지만 사람들은 당백전을 꺼렸다.


 개혁의 기치를 올리며 부강한 조선을 꿈꿨던 흥선대원군은 세계정세를 알기는 했으나 그 흐름을 완강히 거부했다. ‘위정척사’를 통해 외세와 손을 잡는 것조차 탄압했고 병인양요, 신미양요를 경험하면서 더욱더 강경한 자세를 유지했다.


 흥선대원군의 개혁은 권력을 아들에게 양위하지 않았던 욕심으로 평가 절하되기도 하지만 조선 후기 그 어떤 왕도 하지 못했던 세도정치의 만행을 바로잡으려고 했고 실제로 많은 부분의 개혁을 이끌었다.


 정치적 후원 세력을 만들기 위해 외척세력을 끌어들였던 실수는 훗날 며느리인 명성왕후와의 갈등으로 궁궐에서 쫓겨나는 치욕을 맛보게 했지만 흥선대원군의 입장에서는 민 씨 가문의 도움 없이는 안동 김 씨를 상대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임오군란으로 잠시 권력을 다시 잡았지만 준비되지 않은 성급한 개혁이었던 갑신정변으로 인해 다시 조선은 청나라와 일본이 대치하는 정국이 되었고, 여기에 ‘아리사’라고 불렸던 러시아까지 남하하면서 조선의 제국주의 열강의 먹잇감이 되어가고 있었다.


 소중화라는 자부심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던 조선은 국제 정세를 전혀 알지 못했고, 상대가 되지 않았던 제국주의 열강에 저항했지만 이내 자신들의 수준을 알게 되었다. 가만히 있었다면 조금이라도 평등한 조건을 누릴 수 있었는데 개화의 흐름을 역행했던 처사를 그대로 돌려받게 되었을 뿐이다.


 조일수호조약과 같은 수많은 불평등조약 앞에서도 조선의 입장을 표현하지 못했던 그야말로 약소국 중의 약소국이었던 조선의 운명은 참으로 기구했을 뿐이다. 앞으로 전개될 약탈에 비하면 그나마 형식적으로 조선의 채면을 세워줬다.


 어떤 역사학자들은 조선왕조실록을 철종실록까지만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유는 고종실록과 순종실록은 일제 치하에서 작성되었기 때문에 조선의 기록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철종실록보다 앞서 기록된 실록의 내용도 집권 당파에 의해 더하고 빼는 일이 빈번했기에 객관적인 기록이란 평가를 하기에는 어려움이 따르는 것처럼 고종, 순종실록도  큰 차이가 없다고 생각한다. 무능하고 힘이 없어 지배당했던 역사도 우리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고종의 시대는 우리 민족의 운명을 좌우하는 쇄국과 개화라는 갈림길에서 우리 선조는 분명 시대 정세에 역행하는 선택을 했고, 메이지유신을 통해 먼저 개화하여 동양의 강자가 된 일본에게 좋은 먹잇감이 되는 암흑의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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