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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남웅 Sep 07. 2016

13. 안산(鞍山) 풍경 - 눈 내린 날






서울의 겨울은 눈이 자주 오지 않는다. 강원도나 전라도에 폭설이 내리는데 서울 하늘은 조용하다. 하늘에 구멍이 뚫린 것처럼 눈이 펑펑 내리는 풍경은 15년 서울생활 중에 두세 번 정도나 보았을 것 같다. 눈이 왔다고 해도 도로를 가득 채운 차들의 행렬에 쉽게 녹아 버리고 만다. 도로에 쌓인 먼지와 오물이 눈과 함께 녹으면 지저분한 흙탕물이 되기 일쑤고, 차들은 거북이걸음에 접촉사고까지 발생해서 도로가 마비될 정도다.

어릴 적 고향에는 첫눈이 내리고 나면 따뜻한 봄이 올 때까지 녹지 않았다. 길에 내린 눈은 자동차와 사람들이 밟고 지나가서 반질반질 미끄러울 뿐이었다. 지붕이며 장독대며 밭고랑, 그리고 앞산 전나무까지 하얀 눈이 쌓여서 그야말로 하얗게 반짝거렸다. 서울도 그렇게 하얗고 밝고 환한 눈을 원하지만 현실적으로 눈 내리는 풍경을 보기가 정말 힘들다.


겨울이 되면 눈이 오기를 기다리는 사람이 많다. 시간과 돈을 들여서 강원도 첩첩산중의 눈 풍경을 찾지 않아도 되고 회색빛 도시의 눈 풍경을 보는 색다른 기쁨이 있으며 연인들이 추억을 만들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기 때문이다. 눈사람을 만들거나 눈싸움을 마음껏 해보고 싶고, 눈에 뒹굴며 영화 한 편을 찍어보고 싶은 마음이 있어 해마다 손꼽아 기다린다. 지난겨울에도 눈이 오기를 손꼽아 기다렸지만 하루 종일 눈 내리는 날은 없었고 잠시 쏟아지다가 멈추곤 해서 기회가 거의 없다가 2월 28일(일) 오후에 3시간 가까이 눈이 내렸다. 기회는 이때다.


아쉽다 조금만 더 눈이 왔더라면 좋았을 텐데... 그런 마음이 들었.


저 길 끝에 보고 싶은 사람이 오기를, 내 그리움의 끝에 조용히 머무른 그대가 오기를....


나뭇가지마다 눈을 머금고 있다. 몸은 시려도 마음은 따뜻하겠다. 나 보다 더....


돌고 돌아서 만나는 길마다 하얗다. 그 길을 걷는 나도 하얗.



등산화를 신고 카메라를 메고 큰 아들을 앞세워 눈이 흩날리는 안산에 올랐다.

완전히 눈에 덮인 풍경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훌륭하다는 생각에 안산자락길을 따라 줄곧 걷고 또 걸었다. 흰 눈에 덮여서 가려지고 생략된 세상은 저편에 머물러 있던 눈에 대한 기억을 떠오르게 했다.

아주 어릴 적 기억, 하얀 눈이 내린 길에 처음으로 발자국을 남기며 걸었고, 어머니가 손뜨개로 만들어 주신 빵모자와 털장갑을 끼고 눈싸움을 했었다. 흰 눈을 뭉쳐 눈사람을 만들었고, 장갑과 빵모자가 다 젖어서 추워질 때면 밭 한가운데 불을 해놓고 추워진 몸과 장갑을 녹였다. 눈이 내려서 쌓이면 비료포대에 짚을 넣고 언덕에 올라 신나게 달렸다. 눈썰매를 만들어 타기도 하고 참나무로 허접하게 만든 스키를 타고 뒷산에서 아랫동네로 달음박질치곤 했다. 아주 조용한 시골에 눈이 오면 교통이 막혀 답답하지 않았고 질척거리듯 녹아내리는 눈이 지저분하지도 않았다. 눈이 내리면 누구나 할 것 없이 학교 운동장에 몰려나와 눈을 가지고 참 오랜 시간을 놀았다.


콘크리트로 만든 길은 눈이 빨리 녹는다. 모든 것은 자연 그 자체가 최고.


사람들이 스쳐 지나갔다. 눈이 내려 설레는 내 마음이 잘 전달되었을까....


눈을 맞으며 걷는 모습이 쓸쓸하다. 그 옆에 누군가가 함께 걸었으면 좋겠.


눈길에 사람이 있으면 그 풍경이 달라진다. 즐겁기도 하고 쓸쓸하기도 하고. 걷는 이의 느낌이 아니라 보는 이의 느낌이다. 내 느낌 말이.



무악재역, 한양아파트를 지나 기원정사라는 절을 지나 안산자락길에 도착했다. 하늘에서 펑펑 내리던 눈발은 잦아들어 바람에 흔들리며 조금씩 눈이 내린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자락길을 따라 걸었는지 내렸던 눈에 발자국이 많다.

그래도 이 정도만 해도 어딘가.... 사람들이 지나간 발자국을 따라 또 하나의 발자국을 남기며 걸었다. 오고 가는 사람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미소를 짓고 눈빛도 초롱초롱 빛났다. 일 년에 몇 번 되지 않는 소중한 기회를 찾아 안산자락길에 오르고 그토록 보고 싶은 눈을 보았으니 정말 행복할 것이 분명했다. 자락길 벤치에는 누가 만들었는지 조그만 눈사람이 놓여있었고 안산자락길 안내판에 쌓인 눈에는 '사랑하며 살자'는 문구가 쓰여 있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뽀드득 소리가 났고 그 소리는 아주 어릴 적 내가 걸었던 고향길의 소리와도 같았다.


아들과 함께 안산자락길을 걸었다. 눈 내리는 날 3시간여 함께 걸으며 대화를 나눈 것이 처음이.


혼자 걷는 길보다 둘이, 둘 보다는 셋이 걷는 길이 아름답.


쓰레기를 되가져 가기. 마음의 쓰레기를 이곳에 버리려고 하다가 도로 주섬주섬 내 마음에 담았다. 사랑하며 살면 마음에 쓰레기가 없어지겠.

 

무엇인가 내 몸에 덧입혀서 환해질 수 있다면 깨끗해질 수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다. 하얗고 화사하게....



안산자락길의 눈이 내리면 데코 길을 안내해 주는 목책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검고 짙고 칙칙하던 세상이 하얗게 물들면서 눈과 길을 구분 짓 듯 확연하게 드러나는 것이다. 가끔 우리가 무심코 지나치는 것,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소한 것이 어떤 때는 사물을 구분 짓거나 확연하게 자기를 나타내기도 한다.

하얀 세상에서 목책들은 눈길을 더 빛나게 만들어준다.

온통 하얗게 덮인 눈길은 그 자체로 운치가 있고 데코 길은 데코 길 대로 운치가 있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눈이 조금 더 내렸으면 좋았을 것이란 생각을 했다.

내년 겨울을 기다릴 밖에.


아들은 눈길이 즐거운가보다. 춤춘다. 언제부턴가 나는 기쁨을 표현하는 방법을 잊은 것 같


저 길 너머에서 우리를 기다리는 따뜻한 봄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살자. 살아보.


나의 뒷모습은 어떨까? 즐거워 보일까? 슬퍼 보일까?



눈이 소복하게 쌓인 길을 오랜만에 걸었다.

서울에서 꼭 걸어보고 싶은 길이었는데 이제야 걸어본다.

이 길을 지나는 사람 모두에게 눈은 같이 내리지만 그 눈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마음은 다 다르다.

이별에 대한 기억으로 마음이 아픈 사람은 눈길을 걸어도 마음이 아프다.

서로에 대한 사랑으로 설레는 사람은 눈길을 걸어도 마음이 설렌다.

눈 때문에 마음이 맑고 밝아지는 사람.

눈 내리는 아름다운 풍경을 사진으로 마음으로 담고 싶은 사람.

각 사람이 느끼는 감정은 달라고 같은 것은 하나가 있다.

마음이 메말라서 감정조차 가지지 않던 사람들이 눈 내리는 산책로에서 그런 감정을 느끼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그 길을 걷고 있다는 것이다.

눈을 만나지 못했으면 이런 감정조차 느끼지 못하고 일상의 늪에 빠져있었을 텐데 이렇게 내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이 감사할 따름이다.


안산의 겨울.

그 겨울의 끝자락에서 눈을 만날 수 있어서 행복했다.

아주 오래도록 눈보다 환하게 남을 그런 꿈같은 시간이었다.


나무들의 피부도 하얗게 변했다. 가끔 하얗게 살고 싶었을 나무들. 올 겨울나무들도 행복하리.


하얀색 보다 검은색이 많다. 내 마음도 그러한 것 같아서 찜찜하다.


눈을 마주한 나는 고개를 숙이고, 눈을 마주한 아들은 밝은 표정을 짓는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마음의 차이일 거다. 더 많이 사랑해야겠.





(2016년 9월)



# 이 글의 모든 저작권은 필자에게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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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프롤로그 : https://brunch.co.kr/@skgreat/160

2.     안산(鞍山)에 오르는 이유 : https://brunch.co.kr/@skgreat/161

3.     안산(鞍山) 가는 길 : https://brunch.co.kr/@skgreat/162

4.     안산(鞍山)의 봄 : https://brunch.co.kr/@skgreat/163

5.     안산(鞍山)의 여름 : https://brunch.co.kr/@skgreat/164

6.     안산(鞍山) 풍경 – 벚꽃 피던 날 : https://brunch.co.kr/@skgreat/175

7.     안산(鞍山)의 가을 : https://brunch.co.kr/@skgreat/165

8.     안산(鞍山)의 겨울 : https://brunch.co.kr/@skgreat/166

9.     안산(鞍山)에서 바라본 서울 풍경 : https://brunch.co.kr/@skgreat/167

10.   안산(鞍山) 야경 : https://brunch.co.kr/@skgreat/183

11.   안산(鞍山) 자락길 (Ⅰ) : https://brunch.co.kr/@skgreat/221

12.   안산(鞍山) 자락길 (Ⅱ) : https://brunch.co.kr/@skgreat/222

13.   안산(鞍山) 풍경 – 눈 내리던 날 : https://brunch.co.kr/@skgreat/224

14.   안산(鞍山) 풍경 – 안개 끼던 날 : https://brunch.co.kr/@skgreat/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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