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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남웅 Mar 01. 2017

20. 안산(鞍山) 풍경 – 눈이 내리던 날(Ⅱ)



1.

2017년 1월 21일(토)

서울 서대문구에 있는 작은 산(山) 안산(鞍山)에 눈이 왔다

하얀 꽃송이가 조용히 내린다

올 겨울 우리 동네에서도 이런 눈을 볼 수 있구나

산에 올라 반 바퀴를 돌아서니 눈이 그친다

올 겨울에도 이런 눈 밖에 못 보는구나

그래도 눈이 내렸으니 내 마음도 여기 내리고

눈이 쌓였으니 내 마음도 여기 쌓이겠지

눈길마다 마음이 지난 발자국이 소복하다




2.

하얗게 내리던 눈이 잦아든다

'그러면 그렇지. 서울에 눈이 많이 내릴 리가 없지!'

속으로 되뇌는 말속에 아쉬움이 가득하다

세상 일이란 게 그렇다

정말 내가 원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거나, 일어나더라도

좋아할 시간도 없이 짧게 지나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쌓인 눈이 녹아서 작은 시내가 되기 전에

하얗게 맑은 세상이 조금씩 변해가기 전에

세상에서 묻은 때를 한 짐 지고서

안산(鞍山)에 오른다




3.

눈이 내리는 날은 날씨가 흐리다

날이 흐린 날에 눈이 내린다

하얗게 내리는 눈이 바람에 날리면

칙칙하던 세상이 조금씩 감춰진다

도시의 검은 그림자가 눈발에 무뎌지고

탁한 세상의 외침이 서서히 잦아든다

가끔

아주 가끔

지금 눈에 보이는 세상이

덮고 또 덮이고

잊고 또 잊히면서

이 세상 첫발을 딛듯 신비한 꿈이었으면

하얀 도화지에 그리는 인생의 시작이었으면 좋겠다





4.

가지를 일렁이는 바람의 노래가

머플러를 펄럭이는 그녀의 몸짓이

나지막이 던지는 나무들의 기도가

잎들이 지고 시린 가지의 바람이

하얀 눈꽃이 되어 소리 없이 내렸다


아무도 없는 길에서 만난 나무들은 외롭지 않다

나무의 눈은 초롱하고 귀는 열려있다

가지를 뻗어 서로를 안으며

뿌리가 엉켜 서로를 보듬고

같은 곳에 서서 서로를 바라보고 살아가니

시린 바람에도 따뜻하다

 




5.

눈이 내린 처마에 고드름이 열린다

흐린 날에도 여전히 태양은 떠올라

눈을 녹이고

시린 길에도 사람들의 사랑이 이어져

마음을 녹인다

한 방울 한 방울 모여서 흐르는 눈이

지붕을 지나 아득한 낭떠러지에 닿으면

뉘엿뉘엿 저물어가는 인생길에

서서히 얼어간다


봄은 아직 멀기만 한데

갈길이 아직은 멀기만 한데

그대를 향해

헤쳐가야 할 겨울빛은 짙기만 한데

땅으로 몸집을 부풀려

키를 한자나 더하고는

그 키가 땅에 닿기 전 봄의 노래에

자기를 녹여 새싹을 틔운다


고드름이 생명을 낳듯

이 세상에 있는 아주 작은 것 하나도

그냥 있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이유가 있는 법이다





6.

스산한 바람에 날리는 머리카락

눈 내린 언덕길 너머 남쪽으로 간다

몸둥어리 덩그러니 놓인 아카시아 나무

가지를 흔들며 남쪽으로 간다

쌩쌩한 바람 속에서도 이른 봄 꿈을 꾸며

소복하게 눈 쌓인 겨울을 지나 남쪽으로 간다


세상을 향하여 몸을 늘리는 고드름

너와 지붕을 넘어 너에게로 간다

옹벽을 지나 아련히 울리는 기원정사 풍경소리

기와를 쓰다듬고 달빛을 따라 너에게로 간다

하얀 눈에 줄줄이 찍힌 구두 발자국

지워지지 않는 기억을 더듬으며 너에게로 간다


남쪽으로 떠나고

너에게 떠나고

세상의 시름들도 떠나고

내 마음도 너를 향해 떠나서

산자락마다 정수리가 텅 비었다

너의 기억조차 사라지
희미한 그림자만 남은 산중턱에

모든 기억을 씻어 줄 눈이 내렸다

계속 꿈틀대며 올라오는

죽어라 눌러도 절대로 죽지 않는

내 욕심들이 하얀 눈에 묻혔으면

그렇게 묻어놓고 하얀 눈으로 살았으면....


눈이 좋다

  




7.

안산(鞍山) 봉화대에 올라

세상을 바라다본다

어디서 울고 있을 세상과

어디서 웃고 있을 세상과

어디서 슬퍼하고 있을 나와

어디서 기뻐하고 있을 나를 본다


침울한 세상은 아직 회색인데

그 빛이 사라지지 않고 더욱 짙어서

웃음이 마르고 기쁨이 사라지는데

도시의 회색빛 빌딩 숲에서 웃음을 찾고

도시의 스산한 뒷골목에서 기쁨을 찾는라

고장 나서 깜빡이는 가로등 불빛을 지나

코를 찌르는 하수구의 쾌쾌한 냄새를 지나

슬픔을 주어 담아 꽉 찬 쓰레기통에 지나

도시의 심장을 헤집고 다닌다


이 겨울나무가 혼자 서 있듯

찬바람 맞으며 그렇게 서 있듯

이 도시에 회색빛 빌딩이 서 있듯

시린 눈 몸에 감고 오롯이 서 있듯

세상이란 외롭고 쓸쓸하다

세상이란 시리고 아프다

기껏 살아 100살인 사람들이
봉원사를 지나다가

470년 된 느티나무 앞에 선다

얼마나 많이 아프고 시렸을까

얼마나 힘들고 고된 삶이었을까

말 한마디 없이 바람소리 들으며

긴 세월을 묵묵히 이겨온

늙은 나무 위대하다


느티나무보다 잘 살아온 이 있을까.....





8.

눈 내린 산길을 돌아서면

비탈길을 따라 아카시아 나무가 섰고

내리막을 따라 접어들면

오솔길을 따라 잣나무가 섰다

바위 사이 오르막을 오르면

인적 드문 산 중턱에 개나리 나무들이 즐비하고

낙엽이 쌓여 평평한 길을 걸으면

하늘을 찌르는 메타쉐콰이어 무리가 섰다


내가 가는 곳 어디든 나무가 있고

내가 걷는 곳 어디든 나무가 있다

 진 곳에서도 나무가 살고

한 겨울바람이 잦은 곳에도 나무가 산다

새들이 노래하는 곳에 나무가 노래하고

다람쥐 노는 곳에 나무도 논다


나무 없는 산을 생각한다

그것은 꿈이 없는 사막이다

나무 없는 거리를 생각한다

그것은 기쁨 없는 사막이다

나무 없는 공원을 생각한다

그것은 생각 없는 사막이다


인간보다 그 수가 훨씬 많은 나무는

그렇게 인간을 점령하지 않고

오만한 인간에게

욕심이 가득한 인간에게

묵묵히 자기 품을 내어준다


그렇게 살아간다





9.

살결을 파고든다

틈새마다 패인 곳마다

하얀 눈들이 자리를 잡는다

두껍고 딱딱한 옷을 입었지만

들을 떨구고 많은 것을 포기했지만

그래도 겨울은 시리다

지난 겨울에도 이렇게 시리고 아픈 줄

그렇게 힘들고 슬픈 줄 알았는데

난 또다시 같은 겨울을 지난


엉클어진 머릿결

갈라진 피부

앙상한 가지

움츠린 몸

겨울을 지나는 나무는 초라하다

내려놓고 비우고

치우고 버리고

이제는 더 이상 버릴 것도 없고

이제는 더 이상 비울 것도 없는데

바람은 더 버리라고 한다

눈은 더 내려놓으라 한다


이 겨울에게서 배운다

이 나무에게서 배운다

춥고 시리고 아픈 세상을 사는 방법은

다 버리고 다 내려는 것이라고

다 비우고 다 씻는 것이라고

그렇게 사는 것이라고





10.

나무는 하늘을 이고 섰다

나무는 땅을 딛고 섰다


나무는 겨울을 이고 섰다

나무는 눈을 딛고 섰다


나무는 길을 잇고 섰다

나무는 숲을 엮고 섰다


나무는 이슬을 먹고 섰다

나무는 안개를 마시고 섰다


나무는 하늘을 바라고 섰다

나무는 꿈을 바라고 섰다


나는 무엇을 딛고 섰는가

나는 무엇을 잇고 섰는가

나는 무엇을 바라고 섰는가


나무를 보며 나를 생각한다







(2017년 2월)



# 이 글의 모든 저작권은 필자에게 있습니다 #



안산산책[鞍山散策]의 전체 글모음

1.     프롤로그 : https://brunch.co.kr/@skgreat/160

2.     안산(鞍山)에 오르는 이유 : https://brunch.co.kr/@skgreat/161

3.     안산(鞍山) 가는 길 : https://brunch.co.kr/@skgreat/162

4.     안산(鞍山)의 봄 : https://brunch.co.kr/@skgreat/163

5.     안산(鞍山)의 여름 : https://brunch.co.kr/@skgreat/164

6.     안산(鞍山) 풍경 – 벚꽃 피던 날 : https://brunch.co.kr/@skgreat/175

7.     안산(鞍山)의 가을 : https://brunch.co.kr/@skgreat/165

8.     안산(鞍山)의 겨울 : https://brunch.co.kr/@skgreat/166

9.     안산(鞍山)에서 바라본 서울 풍경 : https://brunch.co.kr/@skgreat/167

10.   안산(鞍山) 야경 : https://brunch.co.kr/@skgreat/183

11.   안산(鞍山) 자락길 (Ⅰ) : https://brunch.co.kr/@skgreat/221

12.   안산(鞍山) 자락길 (Ⅱ) : https://brunch.co.kr/@skgreat/222

13.   안산(鞍山) 풍경 – 눈 내리던 날 : https://brunch.co.kr/@skgreat/224

14.   안산(鞍山) 풍경 – 안개 끼던 날 : https://brunch.co.kr/@skgreat/223

15.   안산(鞍山) 풍경 – 단풍 들던 날 : https://brunch.co.kr/@skgreat/225

16.   안산(鞍山) 풍경 – 낙엽 지던 날 : https://brunch.co.kr/@skgreat/230

17.   안산(鞍山) 풍경 – Black & White : https://brunch.co.kr/@skgreat/228

18.   안산(鞍山) 중턱자락길 : https://brunch.co.kr/@skgreat/227

19.   안산(鞍山)의 산사 – 봉원사 & 기원정사 : https://brunch.co.kr/@skgreat/229

20.   안산(鞍山) 풍경 – 눈 내리던 날(Ⅱ) : https://brunch.co.kr/@skgreat/278

21.   안산(鞍山) 풍경 – 홀로 가는 길 : https://brunch.co.kr/@skgreat/282

22.   안산(鞍山) 풍경 – 밤에 피는 벚꽃 : https://brunch.co.kr/@skgreat/331  

23.   안산(鞍山)에서 바라본 서울 풍경(Ⅱ) : https://brunch.co.kr/@skgreat/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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