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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남웅 Sep 13. 2016

17. 안산풍경 - Black&White(흑과 백)




1981년 12월쯤

앞집에서 컬러텔레비전을 샀다는 소식을 들었다

문을 여닫는 금성사 흑백텔레비전에 익숙했던 나에게

컬러텔레비전은 별천지였다

김일의 박치기에 상대편이 흘린 피가 진한 회색으로 보였고

사람들의 옷이 회색의 옅고 짙음으로 표현되던 흑백의 세상에서

사람의 눈으로 보는 것과 똑같은 컬러로 방송이 된다는 것은

참 신기한 일이었다


학교 갔다 와서 텔레비전을 방송하는 시간에는

어김없이 앞집 툇마루에 앉아 눈이 돌아가는 생생한 화면을 시청했다

그렇게 그 집에 살다시피 하던 어느 날

아버지도 컬러텔레비전을 사 오셨다

아버지께 컬러텔레비전을 사달라고 조르지 않았는데

사 오신 걸 보니 아버지가 더 보고 싶었나 보다

나는 태어나서 부터 흑과 백 그리고 컬러를 같이 보고

느끼며 자랐다

그래서 흑백이 주는 위로와

컬러가 주는 아름다움을 동시에 느끼며 살았는지 모른다

오늘의 컬러풀한 시대에 목이 마른 것은

어릴적 그 무언가가 지금은 없기 때문인것 같다


2001년부터 안산(鞍山)에 자주 오르면서

디지털카메라로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아이들의 모습을 담을 목적으로 찾았지만

아내의 모습과 이곳을 오르는 사람들의 모습도 카메라에 담게 되었고

정상 봉수대에 올라 서울 도심의 화려한 풍경도 카메라에 담았다

15년 이상을 안산에 오르며 찍은 사진들로

색깔은 풍성해지고 눈은 즐거운데

마음 한구석에 허전함이 있어 그것이 무엇일까 고민했었다

눈의 즐거움보다 마음이 즐겁고 평안이 넘치는 사진은 무엇일까?

그것은 다름이 아닌 흑백이었다

흑백이 주는 위로와 평안, 그것을 깨닫는데 15년이나 흘렀다

지금이라도 깨달을 수 있음에 감사할 밖에


안산의 흑백은 생략함이 주는 단순이다

빨갛고 노랗고 무수한 색깔들이 빠지고

짙고 옅음의 명암만 남는

세상의 복잡함이 생략되고 단색이 주는 단순함이 남는


안산의 흑백은 여백이 주는 위로와 평안이다

물질이 가진 계절마다의 고유한 색깔이 사라지고

희게 보이는 공간의 여백이 남는

짙은 삶보다 하얀 여백의 쉼과 평안이 조용히 나를 감싼


안산의 흑백은 마음에 닿는 감동이 있

나무와 꽃, 화사한 빛에서 시작한 눈으로 보는 즐거움은 없고

묽고 진한 수묵의 향기만 남는

화사함보다 수묵의 깊은 빛에 마음에 감동이 밀려온


안산을 오른

직 겨울의 때를 벗지 못한 초

사랑에 굶주린 사람마다 냉수병 하나씩 챙겨서

질펀한 산 길을 오른

마음이 시린 사람마다 배낭에 겨울 하나씩 담고서 헐벗은 산 길을

배낭에 담긴 겨울은 약수터에 버리고

냉수병에 약수를 채운

내려놓은 겨울에 산은 여전히 시린데

산을 내려오는 마음은 따뜻하


산을 오르는 길에

새봄 물 길어 올려 새싹을 틔운 화초가

아침 이슬로 배를 채우며 꽃을 피우더니

새침데기 봄바람에 꽃잎을 쏟았다

꽃이 진 자리마다 상처가 아물면 열매가 맺히겠지

그 열매 비바람 견디며 또 생명을 낳겠지

떨어진 꽃잎이 봄바람에 흩어진다

전혀 슬프지


세상 사는 동안 얼마나 많은 비를 맞았던가

그 비에 옷은 또 얼마나 젖었던가

헐벗은 몸뚱어리에 우산도 없이

딱딱한 아스팔트에 서서 비를 맞는 것

그것이 살아가는 것이다

맞아도 그 자리를 떠나지 않고

젖어도 그 자리를 외면하지 않는

그것이 살아가는 것이다

돌아보면

내 몸에 빗물이 흘러 그 자국이 선명하게 남았다

떠나지 않고 피하지 않으며 비를 온전히 맞았다

그렇게 살지 않은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


내리막 뒤에 오르막이 이어지는 길

숲이 이어지다 화사하게 펼쳐진 꽃 길

폭이 좁은 오솔길과 폭이 넓은 신작로 길

울퉁불퉁 바위길과 말랑말랑 흙길

내를 건너는 징검다리 폭설에 눈을 헤치며 가는


저 안개 너머에 어떤 길이 있는지 모른다

내가 살아온 길보다 더 험난하고 고된 길일지도 모른다

내가 살아갈 길이 외롭고 아픈 길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안개길을 걷는 것은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는 것은

그 길을 가는 동안 해가 뜨고

그 길을 가는 동안 안개가 걷힌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안개 낀 길을 조금씩 걸어보자

해가 정수리에 올라 안개를 걷어내고

쨍쨍한 빛을 내리는 그때까지

참고 기다리며 걸어보자


옷깃을 여미고 산을 오르는 사람들에게서 세상의 고단함이 보이고

약수를 길어 한 배낭 지고 가는 노인에게서 자식 사랑이 보이고

꼬불꼬불 산길을 걷는 사람들에게서 걸어온 인생길을 느끼고

지팡이에 의지하여 한 발씩 걷는 이에게서 병듦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고

헐벗은 가지에서 우리가 사는 인생의 끝을 생각하고

낙엽이 쌓인 거리에서 그 옛날 유난히 살결이 희고 눈동자가 검은 그 애를 생각한다

산은 하나인데 마음은 여럿이다

뱉어낸 마음들이 산 허리에 쌓이면

어김없이 폭우가 내려 다 씻어내고

나는 또 그곳에 올라 내 마음을 뱉는다


남에게 등을 보이고 걷는다는 말은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는 말인데

남에게 등을 보이며 걷는다는 말은

쉬어가지 않는다는 말인데

어찌 보면 내가 살아온 시간 같아서

가슴이 먹먹해지는데

눈 앞의 세상을 살아감도

등 뒤의 평안을 맞이함도

잊지 말아야 할

우리의 니....


지금까지 살아온 시간에 혼자는 없었다

태어나고 자라면서 어머니가 있었고

배우고 익히면서 선생님과 친구가 있었다

일터에는 함께 하는 동료가 있

결혼 후에는 사랑하는 아내가 있었다

아무리 세상이 살기 편해도 혼자서 살기 어려운 법

내 마음에 오롯이 남는 이와

같은 곳을 바라보며

두 손을  함께 길을 걸어보자

마음이 동(同)하고 통(通)하도록

그 길을 걸어보자


세월이 빠르게 흐른다는 말

나이만큼 세월의 속도가 빠르다는 말

어린 시절에 이해하지 못했다

누구나 같은 스물네 시간을 살고

그런 시간들이 모여 한 달이고 일 년이라 생각했다

배를 타다가 자동차를 타고

그 자동차 버리고 비행기를 타 듯

세월의 흐름에 속도가 붙는다

한 일도 없는데 나이테가 쌓이고

할 일은 많은데 주름은 깊다

폭우에 삶의 도구들 떠내려가듯

세월에 나는 떠나고 텅 빈 나만 남았다

무엇을 채우며 살까

시곗바늘이 무겁다


나의 것과 남의 것

우리는 내 소유를 명확히 하고

남에게 이를 알리기 위해 담을 쌓고 철망을 두르고

나무를 심고 팻말을 세워 나와 너의 경계를 만든다

허락 없이 경계를 넘지 말아야 하고

함부로 경계를 훼손하지 않아야 한다

경계는 사람과 사람 사이 소통의 단절을 낳는다

경계는 집단과 집단 사이 이견의 충돌을 낳는다


단풍은 철망을 넘고 싶다

나와 너의 경계로부터 자유롭고 싶다

소유의 경계가 만든 마음의 경계를 넘어

대화로 소통으로 저 경계를 허물고 싶다


낙엽이 진다

그림자가 진다


'진다'라는 말은 똑같은데

둘 다 어떤 사물로 인해 지는 것인데

낙엽이 지는 것은 외롭고 쓸쓸하지만

그림자가 지는 것은 아련하고 그립다


낙엽이 지는 것은 인생의 끝에 가까운 느낌이고

그림자가 지는 것은 하루의 끝에 가까운 느낌이다

낙엽이 지면 그 낙엽들 썩어서 다시 생명을 품고

그림자가 지면 밤이 오고 다음날 다시 그림자를 품는다

낙엽이 지는 것은 나무가 살기 위해 자기를 내려놓는 것이고

그림자가 지는 것은 나무가 살아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생명의 끝이자 또 다른 생명의 시작인 낙엽과

하루의 끝에서 또 내일의 하루를 기다리는 그림자 중에

어느 쪽에 당신의 마음이 있는가?

어느 쪽이 더 당신의 마음을 먹먹하게 하는가?


저기 바라다보이는 세상에도 흑과 백이 있다

흑이 자기의 주장을 펼치면

백은 10%의 단점을 들어 공격했고

백이 자기의 공로를 말하면

흑은 10%의 과실을 들어 깎아내렸다

90%를 인정하고 10%를 이해하는 것과

10%를 제기하여 90%를 무시하는 것 중

어느 것이 더 옳은 일인가?


요즘 사람들은 10%에 관심이 많다

들추고 찾아서 세상에 꺼내놓으면 SNS라는 찌라시를 통해 90%를 먹어치우고 달려간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흑백으로 만든 사진이라면

사진의 구성으로서 흑과 백이 서로를 인정하고 보완하면서 살았으면 좋겠다

90%에 10%를 더하도록.....


 어릴 적 나도 고무신을 신었다

비 내리는 여름날 고무신을 신고 학교에 갔고

지는 가을날 고무신을 신고 뒷산에 갔다

여름날 피라미를 잡아서 담아 놓았고

가을날 소갈비를 끍으러 발품을 팔았다

처음 산 고무신에 이빨이 있는지 뒤꿈치를 깨물었도 내 발에 송곳이 있는지 며칠을 못가 찢어지기 일쑤였다


그런 고무신에도 흑백이 있었다

흑색 고무신은 동네를 누비고 산길을 누볐다

닥치는 대로 밟고 검은 밤이 되도록 일을 했다

돌멩이에 부딪히고 가시에 긁혀서 험상궂었다

반대로 하얀 고무신은 방안을 누비고 내 품을 누볐다

내 품에 고이 모셔놓고 영희를 만날 때만 신었다

하얀 빛깔이 반짝이도록 씻고 또 닦았다


흰색만 있으면 희다는 말이 없어진다

흰색도 검은색이 있을 때 더 빛난다

흰색은 밝고 맑고 깨끗하다고 생각하고

검은색은 어둡고 칙칙하고 더럽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가장 힘들게 일할 때 내 몸 어딘가에서

발가락 냄새 맡아가며 구르고 닳아서

금세 너덜너덜해진 검은색 고무신


그래서 난 검은색 고무신이 좋다


하얀 눈이 세상을 덮은 양떼목장과

바람에 눈이 흩날리며 선자령

이 두 곳의 사진에는 두 가지 색만 존재한다

눈처럼 희거나 그 외 다른 사물처럼 검거나


흰색과 검은색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눈이다

정확히 말하면 눈에 덮인 세상이다

흑백도 명암의 농도에 따라 여러 가지 색인데

눈이 내린 세상은 말 그래도 흑과 백 그 자체이다


하얀 도화지에 먹으로 하나하나 그리는

카메라의 설정을 모노로 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흑백으로 표현된다

우리 마음도 하얀 도화지다

우리가 살며 그린 그림들로 도화지가 채워진다

정직으로 채운 그림은 밝고 빛이 난다

욕심으로 채운 그림은 어둡고 칙칙하다

사랑으로 그린 그림은 맑은 향기가 나고

미움으로 그린 그림은 고약한 악취가 난다


가끔 자신의 도화지를 꺼내보자

무엇을 그려놓고 살았는지

무엇을 그리려고 살고 있는지

꼼꼼히 살펴보자



인생의 바둑판에 던지는 돌도 흑과 백이다

당신이 백을 선택하면 난 흑을 선택하고

당신이 흑을 선택하면 난 백을 선택한다

흑으로 시작한 사람은 흑으로

백으로 시작한 사람은 백으로 산다

택을 누가했든 선택후의 몫은 내 것이다

어릴 적이야 부모의 도움이 있었지만

나이가 들면 모두 자기의 선택으로 사는 것이다

흑으로 살다 보면 백이 좋아 보이고

백으로 살다 보면 흑이 좋아 보이지만

내가 선택한 그 길을 오롯이 가고 싶다

불계승으로 이길 때까지 그 길을 가고 싶다


안산(鞍山)의 흑백은 다른 산의 흑백과 다르지 않다

흰색으로 표현되는 하늘과 눈과 조용히 내리는 햇빛이 있고

검은색으로 표현되는 나무와 바위와 풀과 꽃이 있다

검은색과 흰색으로 표현되는 사물은 같다


그렇지만 다른 것이 있다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이 다르다

사람마다 동일한 사물을 보고 느끼는 감정이 다르다

슬퍼 보이고 외로워 보이다가도

즐거워 보이고 유쾌해 보인다

결국 사물이 드러내는 흑백보다

내 감정의 흑백이 더 영향을 미친다


사물의 다양한 색을 없애고 나니까

내가 보는 것

내가 느끼는 것

그 중심에는 나 자신이 있다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나 자신만의 고유한 색

그것이 있다





(2016년 9월)



# 이 글의 모든 저작권은 필자에게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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