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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냐 정혜승 Jun 26.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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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이곳에 오려고 이 여행에 나선걸까. 이탈리아 여행에 그리스를 붙인 주제에 바보같은 생각이 들었다. 민주주의 성지 아테네 아고라의 흔적은 그만큼 웅장했다. 오래된 돌만 남겨진 황량한 터인데 심장은 뜨거워지고 머리는 차가워진다.
한낮의 태양을 피해 일찍 움직였더니 관광객도 별로 없었다. 함께 간 딸기는 어디론가 사라졌고 혼자 헤매기 시작했다. 아고라 표지판이라도 멀쩡하거나 파르테논 마냥 뭐라도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아무 것도 남지 않았다. 당대 그리스의 모든 정치적 경제적 의사결정이 직접 이뤄진 시민의 광장. 그리스 사회를 움직이는 힘이 대중에게서 나왔다는 증거이지만 아고라를 이룬 부분 부분 잔해만 남았다. 아고라를 이상적 민주주의의 원형으로 생각하지만, 아테네 시민들인들 늘 잘했겠나. 전쟁과 역병에 아테네가 무너지는 걸 시민들이 막을 수 있었을까? ..아고라 입구에 들어서서 처음 만난 돌들이다.

저너머 아크로폴리스, 파르테논 신전이 보인다.

의회의 입구를 알리는 표지석, 시민들이 집회를 열던 회랑(stoa), 신전의 흔적들이 여기저기 흩어져있다.


옛 민주시민들의 아고라 주인은 이제 이 녀석일지도 모르겠다. 한국 등 각국 사람들은 온라인에서 고양이를 고대 이집트 마냥 숭배하는데 넌 알고 있니?


그나마 보존된 건물은 헤파이스토스 신전. 기원전 5세기에 사람들은 대장장이, 불의 신 헤파이스토스를 위해 마음을 모았다. 분명 인근에 대장장이들의 터전도 있었겠지. 그 시절 가장 중요한 엔지니어.


헤파이스토스 신전에서는 아고라 터와 아크로폴리스가 한눈에 보인다.


돌 무더기에 이렇게 마음이 흔들리다니. 아테네 시민들은 신의 뜻이 아니라 인간의 의지에 따라 좀 더 나은 내일을 만들 수 있다고 믿었던 사람들이다. 인간이 서로 토론하고, 합의를 만들어 문제를 해결한다는 정신은 얼마나 근사한가. 아테네의 민주주의는 지속가능하지 않았지만 여전히 가장 아름다운 체제가 민주주의다. 21세기에도 위협받고 흔들리지만 민주주의를 포기하지 않는 우리는 또 얼마나 용감한가. 성당 순례 같은 여행에서 기독교 서사 없으면 어쩔뻔 했나 싶다가.. 개별 존재로서 뭔가를 해보려고 했던 인간들의 아고라에서 어쩐지 벅차다.
인간은 완벽하지 않으며 다투고 탐하며 싸운다. 스스로 불완전하다는 걸 인정하지 않으려 남탓을 하고 으르렁거린다. 그래도 이렇게 역사를 만들어왔다. 늘 옳았을 리 없지만 발전해왔다. 더 많이 죽이고, 망가트리고, 더 빨리 종말을 향해 달려갈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우리 몫이다. 정리되지 않는 생각이 끝없이 이어지다니, 아고라 최고잖아... 서울의 술집에서도 할 수 있는 생각을 아고라에서 하니 사뭇 다르다. 어이없는데 그렇다. 우리가 여행을 하는 이유지.


티켓은 통합이더니 아고라와 아크로폴리스는 입구가 다르다. 구글 맵에서는 안에서 연결된 듯 보이지만 철문이 닫혀있다. 어쩔 수 없이 아고라 밖으로 나와 한바퀴 돌아간다.


아크로폴리스 가는 길. 헤로데스 아티쿠스 극장이다. 서기 2세기 극장에서 요즘도 공연하다니 놀랍다. 뒤적거리니 나나 무스쿠리가 1984년에 여기서 공연한 영상이..


문제의 아크로폴리스 입구, 프로필라이아. 신과 인간이 만나는 경계라는데 과연, 인간들이 줄을 지어 신을 향해 가는구나. 여기도 공사판인데 이번 여행에서 사람 이렇게 많은 곳은 처음이다. 베네치아 명소가 시장통 느낌이었는데 비교할 수 없는 수준. 아직 동아시아 관광객 거의 없는데 영어, 러시아어가 많이 들린다. 30분 줄 서서 간신히 들어갔다. 관광객이 너무 많다보니 새치기 다툼도 있어서 오랜만에 외국어 고성 싸움도 들어보고... 여기까지 와서..

우리라고 투덜댈 일이 없겠냐만.. 여행은 관용을 배우는 시간인듯. 나이들수록 여행에 진심인 이유다.


기원전 5세기, 아테네 중심으로 델로스 동맹이 가장 강했던 시절의 작품 파르테논 신전. 아테네의 탁월한 지도자 페리클레스가 주변 반발을 누르고 은 5톤을 들였다나. 아테네를 지키는 아테나 여신에게 봉헌된 신전이지만 한때는 도시의 운명에 따라 교회가 됐다가, 모스크가 됐다가 포격 폭발 사고도 겪었다. 어젯밤 숙소 옥상에서 볼 때에는 환상적으로 아름다웠는데... 정면이 복원 공사중이다...

딸기 사진 멋짐


너무 아름다웠을 신전 안쪽으로 크레인이 보인다. 한바퀴 뒤로 돌아가면 괜찮을까 했지만 손 볼데가 많은 모양이다. 복원 공사 오래 공들이는게 당연한데, 그래도 아쉽다. 정말 아름답고 장엄한 파르테논..


하기야 여기저기 돌 무더기. 저게 다 유적이라는 건데...


인구 400만으로 들은거 같은데 아테네는 빽빽한 도시다. 높은 건물이 별로 없어 아크로폴리스에서 멀리까지 한 눈에 들어온다.


옆에 비교적 온전한 작은 신전이 있다. 가까이 보면 결코 작지 않다. 아테나와 포세이돈을 모시는 에레크레이온 신전. 저기 왼쪽사진 기둥에 여신들 조각이 지붕을 떠받치고 있는게 유명한데..


아크로폴리스는 떠나는 데에도 줄을 섰다. 아아... 사람들이 마스크 벗고 여행 한을 풀기 시작했구나.

아크로폴리스 아랫쪽에 하드리아누스 도서관과 로만 아고라가 있다. 통합 티켓이라 들어가봐야 하지만..울타리에서 보는 걸로 만족. 낮 12시가 지나면서 슬슬 해가 뜨겁다. 그리고 도서관이 있는게 아니라 도서관의 흔적, 돌이다. 저게 로마 시대의 아고라라고?


통합 티켓이니까! 제우스 신전도 갔다. 숙소에서 아고라가 10분 거리였듯, 어디든 10~20분 거리라 걷는다. 하드리아누스 개선문부터 보는데, 도로의 자동차 행렬 너머 괜히 아쉬운 자태. 그리고 두둥...

제우스 신전도 보수중이다... 아니 기둥 달랑 저만큼 남기고 다 복원중이라니.. 기둥 옆에 돌 썰어진 거..라고 딸기 표현대로 돌 무더기들. 복원 공사 중이라고 티켓 팔 때 좀 알려줘야 하는거 아닐까 싶지만.. 그리스 경제에 기여하는 관광객이 되련다. 청년실업이 40%에 육박하는 나라. 아테네 벽의 온갖 그래피티가 젊은 이들의 분노를 드러낸다고. 


그리스에 두번째 온 연은 아고라와 아크로폴리스 대신 20년 전 어느 시인 할아버지가 만들어줬던 수제 샌들을 다시 사러 갔다. 그리스에서 올림픽 성화 주자들이 신는 바로 그 샌들. 연이 잘 신던걸 조카가 가져가서 10년 아껴 신던 샌들이라니! 아들이 대를 이어서 하고 있는데 가게가 커졌다. 하기야 소피아 로렌, 재클린 오나시스, 비틀즈가 여기 샌들을 샀다나. 나는 엄지발가락을 끼는 샌들은 불편해서 사양.. 연은 발에 꼭 맞춰 바로 만들어주는 자신의 샌들과 조카 것까지 또 샀다. 다시 20년 후에 또 사게 되려나.

인근 가게에서 그리스 점심. 꼬치구이 수블라키 완전 좋고. 드디어 문어 구이. 그리스에서 샐러드는 실패가 없다.


남유럽의 여름은 오후엔 쉬어야 한다. 친구들은 숙소로 돌아가고, 나는 시원한 아크로폴리스 박물관을 택했다. 1층에는 아크로폴리스에서 발굴된 온갖 기원전 생활 소품들... 그 시절 결혼식을 그린 화병도 재미있다. 사랑이 아니라 다른 필요로 결혼하던 시절이다. 사랑은 남자들끼리 하고, 여자는 시민이 아니었지.

향신료와 기름을 넣어두는 작은 병. 또 팽이 같은건 실 잣는 도구인가? 우르르 나오는구나.


박물관 2층엔 파르테논 신전의 진품들이 등장한다. 그런데 이게.. 뭐랄까.... 음...


그리스 로마 신화에 열광하던 10대 시절엔 아테나 여신을 좋아했다. 지혜의 여신인 동시에 전쟁의 신. 같은 전쟁의 신인 아레스와 달리 총명하고 이성적인 멋진 언니. 아테네를 수호하는 여전사. 실제 남은 조각은 왼쪽 모습이고, 남아있는 그림 등으로 상상한 원래 조각은 오른쪽 같다고 한다. 아테네가 워낙 풍파를 많이 겪어 황금 장식이 온전할 리가.. 아테나 신께서는 왜 그꼴을 보시고ㅠㅠ 


아크로폴리스 에레크레이온 신전의 그녀들 카리아티드. 이게 진품이다. 머리결 모양새도 다 다른, 각자 개성있는 여자들.. 이 저 무거운 신전을 지고 있다니. 영광일까. 6개 기둥 중 5개가 여기있고 하나는 영국박물관..

이게 파르테논 신전 머릿부분에 원래 있었을 걸로 추정되는 조각들이다. 현재 파르테논에서, 혹은 박물관에서 보는 모습과 사뭇 다르다.

박물관 3층은 파르테논을 원래 크기로 구현했다. 기둥 외엔 거의 남지 않은 유적 대신 원래 이런게 있었다고 보여준다. 남아있는 옛 화가의 그림 덕에 가능했다.

그런데.. 3층의 조각들은 기괴하고 슬프다. 그 내용을 삼성전자 디스플레이로 곳곳에 틀어주고 있다. 예컨대 포세이돈의 가슴.. 앞부분 복근은 찾았는데 뒤의 몸체는 영국박물관에 있다. 터키로 파견된 영국의 엘긴 백작이 터키 점령지 그리스 유적들을 엄청 빼돌렸고, 지금은 영국박물관의 자랑스러운 소장품이다. 이 엘긴 마블스를 되돌려달라는게 그리스의 오래된 요구. 영국은 들은 척도 않는다... 파르테논의 또다른 어떤 조각은 프랑스 루브르에 있고, 어떤 화병은 캐나다 온타리오 박물관에서 대여해준 모양이다. 제국의 박물관은 역사적 보물을 갖춘걸 부끄러워하지 않고, 유적의 주인 박물관에는 구멍이 숭숭이다.


유적 위에 세우고 유리 바닥으로 지나가는 박물관... 오후 더위가 힘들 때 구경을 권한다. 이건 통합티켓 아니고 10유로 별도. 통합 티켓에 포함된 아고라 박물관까지 가려고 했는데.. 폰 배터리가 간당간당. 보조배터리도 갖고 왔는데 끝났다. 폰이 안되면 지도를 켤 수 없고, 숙소의 친구들에게 문열어달라고 톡도 못한다.. 그래서 귀가. 근데 여행은 역시 쉬는게 맛이구나. 누워서 이거 정리하는게 좋구나.


오늘은 아예 숙소 옥상에 저녁상을 차렸다. 7시반이면 아테네의 저녁 바람은 상쾌하다. 해는 늦게 져서 9시 넘어 간신히 야경 불빛을 본다. 어젠 환상적 숙소뷰에 난리쳤는데 오늘은 두번째 본답시고 쿨하다. 여행에 익숙해진걸 보니 끝나가는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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