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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기자 Mar 27. 2016

한국을 닮아 있는 독일의 바다

⑳ 슈트랄준트 항구에서

베를린에서 기차로 세 시간을 달리면 북부 독일의 자그마한 항구도시 슈트랄준트가 나온다. 베를린을 출발한 기차가 북으로 방향을 잡고 한참을 달리다 보면 창 밖의 풍경이 조금씩 달라진다. 체코와 헝가리의 평원에서는 만날 수 없었던 늪지대가 나타난다. 늪지대와 들판, 그리고 작은 숲들이 반복해서 창 밖을 스쳐 지나가고 그렇게 한 시간을 더 달리면 슈트랄준트 중앙역을 알리는 안내 방송이 들린다.

슈트랄준트 중앙역.
슈트랄준트 중앙역.
슈트랄준트 중앙역에 걸려 있는 지도. 슈트랄준트와 뤼겐 섬을 자세히 묘사해놓았다.

슈트랄준트는 한 때 스웨덴과 덴마크가 점유권을 놓고 오랜 전쟁을 치렀을 정도로 전략적 거점이었다. 한자 동맹의 주요 도시이기도 했다. 지금도 슈트랄준트 곳곳에는 아름답고 고풍스러운 건물이 적지 않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지정된 최북단 도시이기도 하다.


하지만 슈트랄준트의 가장 큰 아름다움은 바다에 있다. 여행의 최종 목적지인 뤼겐 섬을 앞두고 슈트랄준트에 숙소를 잡았다. 슈트랄준트와 뤼겐 섬은 독일 해양 레저의 중심지다. 여름이면 많은 사람이 몰리기도 한다. 하지만 2월의 항구도시는 한산했다. 이따금 갈매기 울음소리가 들릴 정도로 조용한 도시였다. 숙소는 중앙역에서 10여분 거리에 있었다. 숙소에 대충 짐을 풀고 바다로 향했다.


독일과 바다는 어울리지 않는 단어처럼 느껴진다. 나에게 독일과 독일인은 바다보다 육지, 파도보다는 바위 같은 이미지로 각인돼 있었다. 슈트랄준트의 항구로 향하며 처음 만나는 독일의 바다에 대한 기대감도 커졌다. 유럽의 어느 도시나 비둘기가 떼를 지어 있었는데, 슈트랄준트에서는 비둘기 꽁무니도 볼 수 없었다. 숙소 앞의 광장은 갈매기들이 점령하고 있었다. 높아 봐야 5층이나 6층 정도인 건물의 지붕마다 갈매기들이 앉아 있었다. 갈매기 울음소리와 나지막이 들려오는 바닷바람을 따라 골목길을 걸었다.

항구 가까이 갈수록 갈매기 울음소리가 선명하게 들린다.
항구에 정박해 있는 선박.
강태공의 뒷모습은 독일이나 한국이나 별반 다를 게 없다.
슈트랄준트 항구의 모습. 독일 최대 해양박물관인 오체아노임도 있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겨울 바다에는 인적이 드물었다. 부둣가에는 강태공 한 명이 모자를 뒤집어쓴 채 낚싯대를 바다에 내리고 있었다. 항구도시라지만 배를 타는 사람도, 내리는 사람도 없었다. 사람보다 갈매기가 더 많을 정도였다. 새파란 발트해를 마음속에 품고 있었지만, 막상 마주한 바다는 잿빛에 가까웠다. 잠바 안으로 파고드는 바닷바람만이 도시의 위도를 짐작하게 할 뿐이었다.


모든 바다는 하나다. 성산일출봉에 올라 바라본 바다와 슈트랄준트의 항구에 서서 바라보는 바다는 모두 하나로 이어져 있다. 베를린에서 만났던 보이지 않는 선들이 끝없이 이어져 있었던 것처럼 바다도 마찬가지다. 저 멀리 수평선 너머를 가늠해보면서 그렇게 한참 동안 바다를 바라봤다. 여행의 첫날 헬싱키에서 바라봤던 그 바다를 여행의 막바지에 다시 만났다. 모든 것은 이렇게 돌고 도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항구도시답게 슈트랄준트의 식당에는 해산물을 이용한 음식이 많았다. 동유럽 여행을 하면서 생선이나 해산물을 먹을 일이 많지 않았다. 반가운 마음에 대구 요리를 주문했다. 부드럽게 익힌 대구 요리에 슈트랄준트에서 생산되는 맥주를 곁들였다. 맥주잔에는 바다를 항해하는 범선이 그려져 있었다. 제법 쌀쌀한 겨울 바다 때문에 얼어붙었던 몸이 맥주 한 잔에 시원하게 녹아내렸다. 바다가 보이는 식당에서 천천히 맥주를 마시며 지난 여행을 돌아보고 남은 여행을 가늠했다. 

슈트랄준트 항구 식당에서 먹은 대구 요리. 독일에서 맛본 유일한 생선 요리였다.

머리 속이 복잡해질 때면 동해바다로 무작정 떠났던 대학생 시절로 돌아간 것 같았다. 바다를 보고 있으니 복잡했던 것들이 조금은 정리됐다. 그러고 보니 슈트랄준트의 바다가 이국적이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동해의 작은 항구마을을 닮아 있기도 했고, 강화의 인적 없는 포구를 닮아 있기도 했다. 에메랄드 빛이었다면 그 이국적인 정취에 취해 이렇게 편안한 시간을 보내지도 못했을 것이다. 내가 떠나온 한국의 바다를 닮아 있어 다행이었다.


해가 질 무렵 식당을 나와 숙소로 돌아왔다. 문을 연 가게가 많지 않아 기차역 근처 마트에서 먹을거리를 적당히 사 왔다. 뤼겐 섬으로 들어가는 기차 시간을 확인하고, 호텔방에서 맥주를 홀짝이다, CNN에서 미국 대선 속보를 보다, 일기를 쓰다 잠이 들었다.


프롤로그

여행의 가장 큰 걸림돌은 용기가 아닌 동기

① 부다페스트 밤의 풍경

야경을 아름답게 해주는 것은 빛이 아닌 어둠이다

② 부다페스트 키슈피파 레스토랑

글루미 선데이의 선율을 따라

③ 부다페스트 테러하우스

헝가리에게 히틀러와 스탈린은 현재진행형이다

④ 부다페스트 리스트 박물관

삶은 죽음을 향한 전주곡

⑤ 빈 제체시온 클림트 <베토벤 프리즈>

시는 음악이 되고, 음악은 미술이 된다

⑥ 빈 벨베데레 미술관

코코슈카와 에곤 실레, 세기말을 그린 화가들

⑦ 빈 벨베데레 미술관

색들의 각축장, 클림트의 풍경화

⑧ 빈 프라터, CAFE SPERL

비포 선라이즈 사랑의 속삭임을 따라

⑨ 빈 미술사 박물관

그림으로 쌓아 올린 박물관

⑩ 프라하에서 읽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슬픔은 형식이었고 행복은 내용이었다

⑪ 플젠 필스너 우르켈 공장

"맥주, 맥주!"

⑫ 프라하 오페라 하우스 <카르멘>

카르멘의 사랑은 제멋대로인 한 마리 새

⑬ 프라하 <슬라브 서사시>

슬라브 민족을 위한 알폰스 무하의 장엄미사

⑭ 프라하 <무하 미술관>

무하가 창조한 여신들을 만나다

⑮ 프라하 성 비투스 대성당 스테인드글라스

신은 빛을 통해 말을 건다

⑯ 베를린 홀로코스트 추모공원

검은 비석으로 쓰인 독일의 홀로코스트 반성문

⑰ 베를린 영화제 '죽여주는 여자' 관람기

천사와 매춘부, 배우 윤여정

⑱ 베를린 함부르거 반호프 현대미술관

잠에서 깨어난 젊은 곰, 베를린의 현대미술

⑲ 베를린을 떠나며

베를린의 통일정자와 보이지 않는 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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