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_헬싱키, 여행의 처음과 끝에서
인천공항을 출발한 비행기는 10시간을 날아 헬싱키에 도착했다. 공항 근처 호텔에 짐을 풀고 헬싱키 시내로 향했다. 2월 중순의 헬싱키는 아직 한 겨울이었다. 비가 내리는가 싶더니 작은 눈송이로 변했고, 저녁이 가까워질수록 바람은 매서워졌다. 옷깃을 단단히 여미고 바다까지 갔다. 발트해로 이어지는 작은 항구에는 유람선 몇 척이 정박해 있었다. 바다는 얼어 있었다. 먼 바다로 이어지는 곳은 낮은 파도가 잔잔하게 일렁이고 있었지만, 땅과 가까운 곳의 바다는 숫제 얼어 있었다. 바다를 얼릴 만큼 강한 추위는 어둠이 깊어질수록 위세를 더했다. 헬싱키는 지금껏 내가 방문했던 도시 중에 가장 밤이 긴 곳이었다. 부둣가 옆의 작은 카페에서 샌드위치와 커피로 차가워진 속을 달래면서 이번 여행이 만만치 않으리라는 것을 짐작했다.
그리고 보름이 지나 다시 헬싱키로 돌아왔다. 이번에는 인천공항으로 향하는 비행기를 기다리며 3시간의 체류시간이 주어졌다. 공항 카페에 앉아 맥주를 마시며 지난 보름 간의 여행을 되짚어봤다. 부다페스트, 빈, 프라하, 베를린, 슈트랄준트, 뤼겐, 그리고 다시 베를린으로 이어지는 15일의 여행기간 동안 여러 곳의 미술관과 박물관을 방문했고, 오페라 극장과 영화제를 찾았고, 방문한 도시들을 배경으로 한 책을 읽었다. 빈에서는 <비포 선라이즈>의 촬영지를 둘러보기도 했다. 한국에 있었다면, 회사에 얽매여 출근을 해야 했다면, 불가능한 경험이었다.
아쉬움은 어쩔 수 없었다. 열심히 돌아다녔지만 봐야 할 것이 너무 많았고, 볼 수 있는 시간은 한정적이었다. 체력 관리에 실패해 프라하 이후에는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지친 상태일 때가 더 많았다. 기껏해야 4박 5일 출장이 해외 체류의 전부였던 나에게 보름의 배낭여행은 여러 가지로 쉽지 않은 경험이었다. 무엇보다도 이번 여행에서 내가 얻고자 했던 것, 유럽에서만 가능한 예술적 경험을 충분히 했는지 의문이다. 알폰스 무하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프라하에 아예 방을 얻어야 할 것 같았다. 프라하의 모든 곳에 그의 손길이 묻어 있었으니 그것들을 하나씩 신중하게 관찰하고 느끼지 않고서는 무하를 알았다고 할 수 없는 노릇이다.
이번 여행을 떠나기 전 회사 동료가 내게 줬던 책 한 권이 생각났다. MBC 기자 출신인 손관승 씨가 쓴 <괴테와 함께한 이탈리아 여행>은 읽으면서 여러 곳에 밑줄을 그어 놓았다. 괴테가 이탈리아를 여행하면서 느꼈던 감정이 어느 정도 내 아쉬움과 맞닿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예술이란 삶과 같은 것이다. 즉 깊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점점 더 넓어지는 것이다. 예술이라는 하늘에서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새로운 별들이 계속 나타나서 나를 곤혹스럽게 만들고 있다."(괴테와 함께한 이탈리아 여행, 184p)
내 여행기에 괴테의 이름을 언급하는 것만으로도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로 부끄러운 일이지만, 이번 여행을 준비하고 실행하면서 괴테의 <이탈리아 기행>, 그리고 손관승의 <괴테와 함께한 이탈리아 여행>이 큰 영감을 줬다.
"노력하는 한 인간은 방황하기 마련이다." - 괴테
"어떤 사람들은 비를 느끼지만, 어떤 사람들은 그냥 젖기만 할 뿐이다." - 밥 말리
"당신의 사진이 만족스럽지 않다면, 그것은 당신이 충분히 다가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 로버트 카파
"어느 길로 가야 할지 더 이상 알 수 없을 때, 그때가 비로소 진정한 여행의 시작이다." - 나짐 히크메트
손관승의 책에 나온 이런 문장들은 내 여행에 나침반 같은 역할을 해줬다. 더 방황하고, 더 느끼고, 더 다가가자. 그제야 진정한 여행이 시작될 것이다. 비록 15일은 유럽을 여행하기에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었지만, 더 긴 여행을 결심하는 계기가 되기에는 충분했다.
매일 처음 방문하는 숙소에서 밤을 보내며 창 밖의 어둠을 지켜봤다. 빈에서는 아주 오래되고 낡은 호텔에 묵었다. 광장이 내려다보이는 2층 방에 묵었는데 라디에이터 소리에 새벽이면 잠이 깨곤 했다. 냉장고가 없어서 창문 사이에 과일과 물을 보관해야 했다. 물을 마시려 커튼을 젖히고 창문을 열면 얼음장처럼 차가운 새벽 공기가 방 안에 쏟아져 들어왔다. 추위에 잠깐 몸을 떨다가도 이내 익숙해지면 창문을 열어 놓은 채 조금씩 밝아오는 광장을 바라봤다. 100년 전에도 누군가 같은 호텔방에서 광장의 새벽 풍경을 바라보고 있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이 들면 여행이 얼마나 신비롭고 아름다운 체험인지 새삼 다시 깨닫게 된다.
겨울은 동유럽을 여행하기 좋은 계절이다. 부다페스트와 프라하 같은 도시들은 낮보다 밤, 여름보다 겨울에 더 빛나는 풍경을 간직하고 있다. 초록빛으로 물든 나무보다 앙상하게 메마른 나무가 더 어울리는 도시들이다. 무엇보다 동유럽의 도시들은 유럽 안에서도 관광지로 유명하기에 바캉스 시즌에 갔다가는 사람들에 치일 수 있다. 프라하나 빈, 부다페스트의 미술관과 박물관을 조용히 둘러 보기에는 겨울만한 계절이 없다.
베를린은 다른 도시들과는 조금 다른 기억으로 남았다. 생동하는 도시, 베를린에서는 몇 가지 이미지들을 안고 왔다. 슈트랄준트로 가기 위해 베를린 중앙역에 갔을 때, 한 난민 여자아이가 사람들에게 도움을 호소하고 있었다. 허름한 옷차림의 여자아이는 기차역 플랫폼의 에스컬레이터 바로 앞에 서 있었다. 아이는 도와달라고 영어로 쓴 작은 종이를 두 손으로 들고 있었고, 그 앞에는 작은 모자가 뒤집어진 채 바닥에 있었다. 사람들은 이따금 동전을 모자 안에 놓을 뿐 아이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아이는 부끄러운 듯 내려오는 사람들을 똑바로 보지 못했다. 기껏 초등학생 정도로 보이던 그 아이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그 아이가 부끄러워해야 할 이유는 무엇일까. 분홍색 티셔츠를 입은 여자아이의 모습은 카메라로 찍은 듯 내 머리 속에 강렬한 이미지로 남았다.
그런가 하면 베를린의 지하철 역에서는 집시 아이들에게 둘러싸였다가 지갑을 소매치기당하기도 했다. 바로 알아차린 덕분에 범인을 잡고 지갑을 돌려받았지만, 지금 생각해도 아찔한 순간이었다. 지갑을 소매치기한 집시 아이들은 베를린 중앙역에서 만난 난민 아이와 비슷한 나이였는데, 이 아이들은 오래도록 내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살기 위해 고향을 등지고 낯선 땅으로 떠나온 사람들, 그리고 처음부터 고향이라는 개념이 없이 떠돌아다니는 사람들. 우리가 '난민'과 '집시'라고 부르는 그들은 유럽 안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삶을 지켜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을 응원하는 사람과 경원시하는 사람이 한데 섞여 유럽이라는 거대한 문화권의 오늘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지금도 유럽에서 반복되는 테러 소식을 들을 때마다 마음이 아프다. 그들의 삶이 바로 거기에 있다는 것을 알기에 더욱 그렇다. 폭탄이 그들의 삶에 대한 의지만은 앗아 가지 않기를 바란다. 폭탄으로 인해 난민들의 살아남고자 하는 의지가 꺾이지 않기를 바란다.
삶보다 위대한 예술이 어디 있을까 싶다. 이번 여행에서 하나 건진 것이 있다면 하나하나의 삶이 곧 하나하나의 위대한 예술작품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모두의 삶이 존중받고 지지받을 자격이 있다는 것을 마음속에 되새길 수 있었다.
프롤로그
① 부다페스트 밤의 풍경
② 부다페스트 키슈피파 레스토랑
③ 부다페스트 테러하우스
④ 부다페스트 리스트 박물관
⑤ 빈 제체시온 클림트 <베토벤 프리즈>
⑥ 빈 벨베데레 미술관
⑦ 빈 벨베데레 미술관
⑧ 빈 프라터, CAFE SPERL
⑨ 빈 미술사 박물관
⑩ 프라하에서 읽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⑪ 플젠 필스너 우르켈 공장
⑫ 프라하 오페라 하우스 <카르멘>
⑬ 프라하 <슬라브 서사시>
⑭ 프라하 <무하 미술관>
⑮ 프라하 성 비투스 대성당 스테인드글라스
⑯ 베를린 홀로코스트 추모공원
⑰ 베를린 영화제 '죽여주는 여자' 관람기
⑱ 베를린 함부르거 반호프 현대미술관
⑲ 베를린을 떠나며
⑳ 슈트랄준트 항구에서
㉑ 독일 뤼겐 섬 백악암 절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