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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nlys Jan 19. 2022

<소년과 두더지와 여우와 말>

이 책 한 권! / 인경화_왕곡초 교사

다 외우고 싶은 책, 다 그려보고 싶은 책


찰리 맥커시 글, 그림 / 이진경 옮김 / 상상의힘 출판사


책이 담긴 택배가 또 배달되어 와 있다. 대부분 그림책이다. 내 나이에 그림책을 본다고 하면 이상하게 여기던 시선이 이젠 많이 사라졌다. 초등학교라서 그렇기도 하겠지만 그만큼 그림책을 보는 연령층과 그림책 분야가 다양해져서 장성한 자녀가 있음에도 그림책을 사는 나 같은 어른을 이상하게 보는 사람들은 현격히 줄어들었다. 물론 지금도 우리 교실에 와서 그림책이 꽂혀있는 걸 보며 이거 다 돈 주고 산 거냐고, 이 얇은 책에 그렇게 돈을 쓰면 아깝지 않냐고 묻는 분도 계신다. 그런 분께 꼭 보여주고 싶은 그림책이 있다. 


아직도 그림책 두께로 가성비를 먼저 따지시며 그림책 사기를 주저하신다면 이 책부터 권하겠다. 일단 이 책은 얇지 않다. 그리고 다른 일반 책들과 크기가 크게 차이가 나지 않아 책꽂이에 꽂아두었을 때 다른 그림책들과는 달리 크기가 도드라지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이 책을 읽고 있으면 아마도 필사가 하고 싶어져 펜과 공책을 찾게 될 것이다. 그리고 책을 덮을 때는 마음 한구석에 뭔가 따뜻한 불이 하나 켜지는 느낌을 받게 될 거다.  그런 경험을 하고 나면 그분들은 다시 나에게 묻겠지. 

  “그림책이 이런 거였어요? 다른 그림책 좀 소개해 줄 수 있어요?” 

  이쯤 되면 이분은 이제 그림책으로 가산을 탕진할 수도 있는 입구에 서 계신 셈이 된다. 


무슨 책이길래 이렇게 서두가 길었냐면 찰리 맥커시가 그리고 쓴 그의 첫 번째 그림책인 <소년과 두더지와 여우와 말>이다. 붓펜으로 크로키 하듯 대충 그린 듯한 그림과 아이가 쓴 듯한 글씨체가 우선 눈에 들어온다. 아름다운 채색도 거의 없고 대부분 검은색 펜으로만 그려져 있고 페이지마다 길지 않은 문장이 있어 대충 휙휙 쉽게 볼 수 있을 거 같은 책이다.  

그런데 글쓴이의 서문부터 묘한 대목이 나온다. 

“안녕, 당신은 책을 첫 장부터 읽는군요. 인상적입니다. 저는 보통 중간쯤부터 읽기 시작해요.” 


책을 손에 잡으면 앞표지부터 마지막 표지에 쓰인 글씨까지 다 읽어야 책을 읽었다고 생각하는 나에게 이 책 서문은 정말 생경했다. 그러면서 이 책은 여덟 살이든 여든 살이든 누구라도 읽을 수 있다고 한다. 다양한 연령층을 모두 만족시킬 수 있다는 이 자신감의 근거는 뭘까 궁금해지는 대목이다. 그래서 일단 책을 펼쳐본다. 


“안녕.” 소년이 땅에서 나오는 두더지를 보며 처음 하는 말이다. 

“난 아주 작아.” “그러네.” “그렇지만 네가 이 세상에 있고 없고는 엄청난 차이야.” 

짧게 주고받는 소년과 두더지의 대화가 예사롭지 않다. 

휘어진 나뭇가지에 소년과 두더지가 앉아 있는 장면이 나오며 

“이다음에 크면 어떤 사람이 되고 싶어?”라는 질문이 훅 던져져 있다. 나라면 뭐라 대답할까? 이미 컸지만 앞으로 나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 성공한 사람? 돈이 많은 사람? 건강한 사람? 뭐 이런 말들이 머리를 빙빙 도는데 그림 아래에 쓰인 말을 보며 열패감 같은 걸 느끼게 된다. 

“친절한 사람.” 내가 되고 싶었던 사람들은 다 내 안위에만 머물러 있었는데 이런 답을 보니 내가 더 크기는 틀렸구나 싶기도 하다. 

“넌 성공이 뭐라고 생각하니?”라는 질문이 이어진다. 이번에는 나도 근사한 대답을 하고 싶다. “건강하게 살다가 편안히 죽는 것.”이라고 진심으로 생각하지만 좀 격이 떨어진다는 생각은 든다. 책을 살짝 보니 “사랑하는 것.”이라고 쓰여 있다. ‘사랑받는’ 것도 아니고 ‘사랑하는’ 것이란다. 또 한 번 묘한 열패감이 밀려온다. 


이 책은 이렇게 소년과 두더지의 만남에서 시작해서 그들이 정처 없이 다니다 만난 여우와 말까지 넷이 서로 주고받는 질문과 답들이 계속 이어지는데, 그들의 질문은 어렵지 않으나 우리가 잊고 지냈던 것들을 다시 떠올려주고, 대답은 자주 예상을 빗나간다. 아마 이 책의 백미는 그 빗나가는 대답들이라고 할 수 있을 거다. 


외로운 소년은 궁금한 게 많고 사랑스러운 두더지는 케이크에 집착한다. 여우는 살아오면서 받은 상처로 인해 경계심이 많아 대체로 침묵을 지키고, 말은 이들을 순하고 든든하게 지켜준다. 넷이 거친 황무지를 통과해 집을 찾아가며 나누는 대화를 읽고 있으면 잊고 있던 소중한 것들이 다시 떠오르고 내가 무얼 놓치며 살고 있는지 돌아보게 된다. 


앞서 제목에도 썼듯이 이 책은 다 외우고 싶고 능력만 된다면 다 그려보고 싶다. 나는 그림은 도저히 안 되니 마음에 와닿는 문장들을 적어보는 데 만족한다. 읽다가 마음이 머무르는 문장이 정말 많지만 몇 개만 여기에 옮겨본다. 


“잘못 배운 것을 잊게 해 주는 학교는 없는지 궁금해.”라는 말을 읽으면서는 마음이 뜨끔했다. 그동안 내가 잘못 가르친 게 얼마나 많을까, 가르쳐야 하는데 자기 검열과 주변의 눈을 의식하느라 제대로 못 가르친 건 얼마나 많을까 싶어 겨우 두 줄 뿐인 이 페이지를 넘기기가 쉽지 않았다. 부디 잘못 배운 것을 잊게 해주는 학교는 없어도 아이들이 저절로 잊어주기를 바랄 뿐이다. 


“이상하지 않아? 우리는 겉모습밖에 볼 수가 없어. 거의 모든 일은 우리 내면에서 일어나는데 말이야.” 

모르는 말이 아닌데도 큰 무게감으로 다가오는 말이다. 우린 겉모습으로 많은 걸 판단한다. 내면에서 일어나고 있는 성장, 열정, 외침, 바람 같은 건 볼 능력도, 볼 시간도 없으니 그저 겉만 보는 거다. ‘충조평판’ 이 네 가지를 빼고 상대방을 바라보면 대상이 좀 더 객관적으로 보일 텐데 그게 정말 어렵다. 


“우린 늘 남들이 친절하게 대해 주기만을 기다려……. 그런데 자기 자신에겐 지금 바로 친절할 수가 있어.” 

남이 나에게 친절하게 대해 주지 않는다고 서운해하고 분노했던 날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그냥 내가 나를 친절하게 대하면 되는 건데 우린 그 방법을 잘 모른다. 자기에게 친절해지는 방법도 배워야 할 만큼 남의 인정에만 매달려 살았던 건 아닌가 생각해보게 하는 문장이다. 


“네가 했던 말 중 가장 용감했던 말은 뭐니?” “‘도와줘’라는 말.” 소년의 질문에 대한 말의 대답에 정말 놀랐다. 그러면서 아무리 힘들어도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이 말을 못 꺼냈던 순간들이 떠올랐다. 그냥 이 말을 했으면 주변 사람들도 덜 힘들게 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어 미안해지기도 했다. 이 문장을 보며 떠오르는 이야기가 있다. 신영복 선생님이 감옥에 계실 때 러닝셔츠 한 장, 치약 하나 없이 감옥에 들어온 사람이 있었는데 아무리 도움을 주려고 해도 화를 내며 받지 않았다고 한다. 칫솔에 빨랫비누를 묻혀 양치질을 한동안 하더니 어느 날 신영복 선생님께 자기에게 주려던 치약을 아직도 갖고 있냐고 물었다고 한다. 선생님이 치약을 얼른 내주며 왜 다른 사람 건 절대 안 받더니 내건 받겠다고 생각했느냐 물으셨다고 한다. 다른 사람들은 자기랑 수준이 비슷한 사람들 같아 그들에게 도움받는 건 너무 자존심이 상하는데 신 선생님한테는 받아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도움을 요청했다는 감방 일화다. ‘도와줘’라는 말이 그토록 어려운 말이라는 걸 정말 잘 보여주는 얘기다. 팝송 제목 중에 미안하다는 말이 가장 하기 어렵다는 노래가 있는데 어쩌면 도와달라는 말이 가장 하기 어려운 말이라고 제목을 바꿔야 할지도 모르겠다. 


“가장 심각한 착각은.” “삶이 완벽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거야.” 두더지의 질문에 소년이 대답하는 장면이다. 교사들은 이런 착각에 자주 힘들어하며 산다. 우리 반은 완벽해야 하고, 내 수업도, 내 업무 처리도, 그러면서 우리 집도. 민폐가 될 만큼 나 몰라라 해서는 안 되겠지만 혹시 어디선가 틈이 생길까 봐서 전전긍긍하며 사는 나날인 게 사실이다. 그럴 때 이런 문장은 잠시 내 삶에 틈을 내준다. 


“때때로 네게 들려오는 모든 말들이 미움에 가득 찬 말들이겠지만, 세상에는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랑이 있어.” 

그러고 보니 또다시 찾아온 인사철이다. 내년 1년의 삶을 놓고 각자의 이해관계로 수많은 말들이 오가는 시기이기도 하다. 날것 그대로의 말들이 오가다 보면 상처를 입기도 하겠지만 이해관계보다 더 큰마음으로 서로 다독이며 ‘함께’를 바라봐야 할 때이기도 하다. 


<소년과 두더지와 여우와 말> 이 책을 두고 어떤 이들은 “21세기의 어린 왕자”라고도 한다. 굳이 이미 유명한 다른 책에 기대지 않더라도 이 책은 늘 곁에 두고 아무 데나 펼쳐서 만난 문장을 화두로 삼아 하루를 살아갈 힘을 주는 책이다. 1년 동안 수업과 업무와 다양한 관계 속에서 지치고 상처받은 나에게 친절해지기 위해 이 책을 스스로에게 선물해보는 건 어떨까? 자기 자신한텐 지금 바로 친절할 수 있으니까. 




+2021 겨울호 목차+


들어가는 글_2021 새넷 겨울호


1. 시론


2. 포럼 & 이슈


3. 특집


4. 전국 NET


5. 수업 나누기 & 정보 더하기


6. 티처뷰_teacherview


7.이 책 한 권!


+과월호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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