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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진 May 11. 2024

책속에서_날씨와 얼굴

177

그가 주목하는 건 시스템주의자와 의인 사이의

시민들이다. ‘시스템이 바뀌어야 한다’는

말만으로는 해결될 수 없는 공백의 영역에

시민들이 자리한다. 의인처럼 해낼 여유가 없는

시민들도 문제적인 시스템을 바꾸는 일에

동참할 수는 있다. 선의를 모으고 책임을 나누고

서로의 부담을 덜어줄 수도 있다. 서로에게

좋은 변화의 계기가 되는 시민의 존재와 그들

사이의 연쇄 작용을 희망한다.

[이슬아, 날씨와 얼굴, 18]               



178

세상 대부분의 일이 ‘어차피’와 ‘최소한’의

싸움이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어차피 세상은

변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이들과 그래도 최소한

이것만은 하지 않겠다고 말하는 이들 사이의

간극을 메우는 말들이 흘러나왔다. 그것은

절멸하지 않고 싶다는 의지였다.

너도 살고 나도 살자는 소망이었다.

[이슬아, 날씨와 얼굴, 59]               



179

‘로켓배송’이라고 커다랗게 적힌 상자에서

세계의 진실을 마주한다. 여름과 겨울은 매번

돌아올 것이다. 다음 여름도 이래서는 안 된다.

다음 겨울도 이래서는 안 된다. 공평하지 않은

날씨의 고통 아래 쿠팡이 노동자를 어떻게

대우하는지 지켜봐야 한다. 지켜보는 사람 없이

힘의 기울기는 바뀌지 않는다. 우정도 시작되지

않는다. 쿠팡 노동자만큼 많은 수의 친구를

상상하고 있다. 우리가 소비자일 뿐 아니라

노동자의 동지라는 걸 노동자가 알기를,

쿠팡이 알기를, 그리고 우리 자신도 알기를 희망한다.

[이슬아, 날씨와 얼굴, 74]               



180

“인간은 죽을힘을 다해 사는 것이 아니라

죽인 힘으로 산다.” 『절멸』에 적힌 문장이다.

코로나 바이러스의 원인으로 지목된 박쥐의

입장에서 쓰인 글의 일부를 옮겨 왔다. 여기까지

말해놓고 나는 ‘박쥐의 입장에서’라는 표현을

몇 번이나 썼다 지운다. 감히 어떻게 대변할 수

있겠는가. 박쥐의 입장을 말이다. 동물을

의인화하려는 시도는 대부분 유치한 실패로 돌아간다.

[이슬아, 날씨와 얼굴, 74]          



181

당신에 대해 알게 된 사실을 나열해보겠다.

당신은 무례한 질문을 자주 받는다. 당신의

가족과 나라가 얼마나 가난한지. 당신이 번

돈 중 얼마를 원가족에게 송금하는지. 어떤

사람은 초면임에도 불구하고 당신에게 반말로

말을 건다. 당신은 새 가족에 편입되면서 원래

가지고 있던 이름을 잃는다. 당신은 낯선 기후와

낯선 음식에 적응해야 한다. 낯선 한국어에

적응하는 일에 비하면 그것은 비교적 쉬운 일이다.

짐을 푼 곳에서 당신의 모국어는 배제된다.

[이슬아, 날씨와 얼굴, 85]          



182

여름이 더욱 더워진다. 덥다는 말을

예전엔 별생각 없이 할 수 있었다.

이제는 너무 많은 얼굴이 떠오르고 만다.

뙤약볕에서 농사지어 작물을 보내주는  

외할머니. 트럭 몰고 다니며 사시사철

야외에서 일했던 아빠. 여름에 더 많이

소비되는 축산 현장의 닭들, 폭염 때문에

삶의 터전을 잃어가는 기후난민들….

내 더위의 무게와 그들 더위의 무게는 다르다.

더위는 모두에게 공평하게 오지 않는다.  

[이슬아, 날씨와 얼굴, 98]          



183

가족들 사이에서 장덕준 씨는 다정한 아들이자

오빠였다. 그런데 가끔은 아버지와 부딪히기도 했다.

아버지는 뉴스에 세월호 이야기가 나오면 욕을 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저 사람들은 아직까지도

저러느냐, 이제 그만할 때도 되지 않았느냐.

그런 아버지에게 장덕준 씨가 물었다.

아버지, 제가 죽어도 그렇게 말씀하실 거예요?

[이슬아, 날씨와 얼굴, 108]     



2024. 5.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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