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육아는 훌륭하다 #16
내 눈을 의심했다.
"맘충? 엄마할 때 그 맘 mom?
그럼 엄마가 벌레야?"
그렇단다. 신이 모든 곳에 있을 수 없어 있게 했다는 그 엄마에게 요즘은 '벌레 충 蟲'자가 붙어 다닌다고 했다. 주위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는 일부 무개념 엄마들을 일컫는 씁쓸한 신조어다.
생각해보면 나도 아이를 동반한 여성들의 행동에 눈살 찌푸렸던 적이 없지 않았다. 사람 많은 식당에서 아이들을 뛰어다니게 내버려둔다거나 시끄럽게 뽀로로 영상을 틀어준다거나 하는 행동. 신발을 신은 채 지하철 의자에 올라가는 건 그나마 귀여운 축에 속했지만 이 역시 여러 승객의 눈총을 샀다. (비오는 날이었다.)
그래도 벌레라니. 우리가 흔히 '벌레만도 못한'이란 표현을 쓰며 눈살을 찌푸리는 그 시선이 엄마들에게 꽂히고 있다. 등골이 스산했다.
그러고 보니 벌레는 맘충만이 아니었다. 그 옛날 무뇌충에서 시작해 일베충, 개독충, 설명충, 페북충, 토익충까지. 설명충이 '다 아는 내용을 지루하게 설명하는 사람'을 일컫는다는 것은 또 처음 알았다. 페북충은 페이스북에 시시콜콜 자신의 일상을 쏟아내는 이를, 토익충은 말 그대로 토익에만 몰두하는 이들을 비하해서 일컫고 있었다. 문제는 그냥 우스갯소리로 부르는 단어가 아니라는 점. 감정의 강도가 생각보다 셌다. 그 벌레 충 蟲에 늘상 따라붙는 단어가 있으니, '극혐'이다. 이를테면 이런 거다.
"아.... 저 아줌마봐.
저러니 맘충이란 소리를 듣지. 완전 극혐이야."
사실 굳이 벌레 충 蟲 자를 붙이지 않더라도 그런 극혐의 대상은 숱하다. 개독, 김치년, 기레기. 우리 사회에 혐오와 비하가 넘실대고 있다. 왜 이렇게 된 걸까.
문득 벌레라 불리는 이들도,
벌레라 욕하는 이들도
결국 우리 사회가 낳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30살 즈음의 우리는 나라와 사회에 많은 것을 기대하지 않는다. 너무 많은 부조리와 불합리를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안다. 내가 불행에 직면해도 이 사회는 발벗고 나서 도와주지 않을 거다. 그래서 우린 유난히 '내 밥그릇'에 집착하는지도 모른다. 아주 일부겠지만 타인에게 불편을 주어 '맘충'이라 불리게 된 이들의 행동 역시 이런 맥락에서 읽을 수 있지 않을까. 남을 배려하고 존중하는 것보단 내 욕망과 내 자식의 안녕에 집중한 거다.
그리하여
친구와의 수다가 재밌으니
뽀로로 소리가 주위 사람 대화를 방해하는 것 쯤은 개의치 않는다.
아이가 즐거워하니
지하철 의자 위에서 뛰어다녀도 괜찮다.
내 새끼가 제일 중하니
맞느니 때리고 오라 가르친다.
그렇게 내 삶을 사느라 주위엔 눈길을 주지 않는다. 마치 앞으로만 달리게끔 눈 양 옆을 가린 경주마가 떠올랐다.
그런 이들을 벌레라 칭하고 혐오하는 이들 역시 이 사회가 낳았다. 우리는 불행할 때 유독 타인을 향해 날을 세우기 때문이다. 곳간에서 인심난다지만 우리 사회의 곳간은 메마른지 오래가 아닌가. 그 곳간에서 이런 생각은 나지 않는다.
아이 엄마가 오랜만에 동창을 만났겠거니
이동네 아이가 놀만한 곳이 없었겠거니
아이가 너무 예뻐서 객관적으로 판단하기 어렵겠거니
대신 나를 불편하게 하는 특정 행동을 엄마들의 특성으로 규정하고 이름짓는다. 그리고 혐오와 비하의 대상으로 삼는다. '맘충'은 그렇게 나왔다.
자, 그래서 이 사태를 어찌 할까. 난 맘충 아니니 그냥 웃어 넘기면 될까. 되바라진 사람들이 만들어낸 말이라 같이 바아냥대면 그 뿐일까. 하지만 난 내 딸이 사람이 벌레인 세상에서 사는 것을 원치 않는다. 그건 세상 모든 엄마들이 의식적으로 노력해야 할 충분한 이유가 된다. 엄마로서 나에게 2가지 숙제를 냈다.
때론 한 명의 엄마가 한 나라보다 더 큰 일을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믿고 싶은 요즘이다.
<모든 육아는 훌륭하다> 지난 글
#5. '요즘 계집애들은 애를 안 낳으려 한다'는 당신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