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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on Sep 18. 2015

딸. 오늘이 세상 마지막 날이라면 말야.

모든 육아는 훌륭하다 #17

내가 사는 나라에 쓰나미가 온다고 했다. 


아이가 막 잠이 들려던 늦은 저녁, 카톡이 왔다. 동네 언니였다. 


"들었어? 쓰나미 온대."


내가 사는 이 나라에 쓰나미 경보가 내려졌다고 했다. 뭔가 싸-한 것이 식도를 타고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두 눈으로 보면서도 믿을 수 없었던 일본 쓰나미가 뇌리를 스쳤다. 그 때 목숨을 잃은 이들도 분명 나처럼 평범한 저녁을 보내고 있었을 거란 생각에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쓰나미 경보 메시지


동네 도로 곳곳에 그려져 있던 쓰나미 안전지대 표시가 그제야 떠올랐다. 우린 안전하지 않았다. 




우리에게 단 몇 시간이 남았다면

우린 무엇으로 그 시간을 채워야 할까.


쌔근쌔근- 잠든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늦은 밤다운) 감상에 젖어들었다. 재난 영화 주인공이라도 된 것 마냥 상상의 나래를 펼치기 시작한거다. 우리 세 식구에게 남은 게 단 몇 시간이라면, 우리에게 내일 아침은 오지 않는다면 우린 지금을 어떻게 보내야 할까. 



한 때 죽어도 여한이 없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절대 죽고 싶지 않다.


참 뜨겁게 살았던 시절이 있었다. 하고 싶은 것은 죄다 하며 살았던 때였다. 그 때 떠들고 다녔던 말이 있었다. 


"난 오늘 밤에 야식 먹으러 편의점 가다

개한테 물려 죽어도 여한이 없어."


지금 떠올리니 무척 유치하고 부끄럽지만 그 땐 정말 그랬다. 매 순간 실컷 행복했으니 지난 삶에 후회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절대 죽고 싶지 않다. 하고 싶은 게 많다. 배우고 싶은 것도, 알고 싶은 것도 훨씬 많아졌다. 어렸을 땐 그저 '지금'이 즐거웠다면 32살의 나는 '앞으로'를 기대한다. 아이가 커가는 모습, 내가 중년이 되어가는 그 모든 순간에 지금의 내가 알지 못할 행복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그래서 지금 죽으면 여한이 있을 것 같다. 아주 많이.



삶의 마지막 시간에 하고 싶은 것은

아주 평범한 것들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시간이 찾아온다면- 허투로 쓸 수가 없다. 다신 오지 않을 생의 순간을 무엇으로 채울 지 생각했다. 그 답을 찾는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마지막 순간에 하고 싶은 일들은 참 평범했다. 


|   아이와 남편에게 사랑한다고 수없이 이야기하기

|   부모님께 전화해서 당신의 아들, 딸로 살며 행복했다고 이야기하기

|   아이와 남편을 꼭 끌어안기

|   아이가 좋아하는 치즈와 키위 잔뜩 주기

|   아이가 좋아하는 숨바꼭질 실컷 하기


그냥 하나였다.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그 사랑을 표현하는 것. 



잔뜩 센치해진 채 남편에게 물었다. 

마지막 순간, 뭐하고 싶어?


거실로 나가 남편에게 쓰나미 소식을 전했다. 눈가가 촉촉하게 젖은 채 어두운 방에서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펼친 상상의 나래를 늘어놓았다. 그리고 물었다. 당신은 우리에게 마지막 몇시간이 남았다면 무엇을 하겠냐고. 내 말을 듣는 내내 열심히 검색을 하던 남편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답했다. 아주 심드렁한 표정으로.


"도망가야지 뭔소리야.

저 언덕으로 올라가면 안 죽어."


다음날 아침은 여느날과 같이 평범하게 찾아왔다. 쓰나미는 이 동네 근처에도 오지 않았다. 그렇게 간밤의 소동은 해프닝으로 끝이 났다. 다만 아주 작은 깨달음은 남았다.


"우린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오래오래 살며 이 행복을 만끽할거야. 

대신 삶의 마지막 순간에 하고 싶어했던 그 모든 평범한 것을 늘- 하며 살자.


눈이 마주칠 때마다 사랑한다고 말하고,

이산가족 상봉 마냥 매일매일 꼭- 안아주고, 

입술이 닳도록 뽀뽀하고

아이의 치즈, 나의 초콜렛, 그의 아이폰처럼

가족의 행복에 덩달아 행복하며 사는 걸로."





<모든 육아는 훌륭하다> 지난 글


#1. “미안해 그리고 미안해” feat. 엉망 엄마

#2. 그래, 엄마에겐 ‘곤조’가 있어야 한다.

#3. 엄마는 희생해야만 하는걸까?

#4. 육아에도 기획이 필요하다.

#5. '요즘 계집애들은 애를 안 낳으려 한다'는 당신에게

#6. 아이도 엄마도 행복한 육아 <둘다 리스트 10가지>

#7. 육아에 훈수를 금합니다.

#8. 육아우울증 극복을 위한 Tip 5가지

#9. 워킹맘의 육아휴직 손익계산서

#10. 딸. '잘' 살 필요없어.

#11. 딸. 엄마를 필요로 해줘서 고마워.

#12. 딸. 엄마랑 사진찍자, 100장 찍자.

#13. 딸. 엄마랑 커플룩입어볼까?

#14. 딸. 엄마가 우리 딸 맘을 몰랐네.

#15. 딸. 아빠는 도와주는 게 아냐.

#16. 딸. 맘충이라고 들어봤니.

#17. 딸. 오늘이 세상 마지막 날이라면 말야.

#18. 딸. 문제는 전업맘일까?

#19. 엄마도 아이도 좋아하는 <아지트> 만들기

#20. 딸. 넌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건 아냐.

#21. 엄마도 아이도 좋아하는 <친구> 사귀기

#22. 엄마도 아이도 좋아하는 <커플룩> 입기

#23. 딸. 엄마가 바라는 추석은 말야.

#24. 딸. 외동이면 외로울까? 

#25. 엄마도 아이도 좋아하는 <춤>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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