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육아는 훌륭하다 #17
아이가 막 잠이 들려던 늦은 저녁, 카톡이 왔다. 동네 언니였다.
"들었어? 쓰나미 온대."
내가 사는 이 나라에 쓰나미 경보가 내려졌다고 했다. 뭔가 싸-한 것이 식도를 타고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두 눈으로 보면서도 믿을 수 없었던 일본 쓰나미가 뇌리를 스쳤다. 그 때 목숨을 잃은 이들도 분명 나처럼 평범한 저녁을 보내고 있었을 거란 생각에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동네 도로 곳곳에 그려져 있던 쓰나미 안전지대 표시가 그제야 떠올랐다. 우린 안전하지 않았다.
쌔근쌔근- 잠든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늦은 밤다운) 감상에 젖어들었다. 재난 영화 주인공이라도 된 것 마냥 상상의 나래를 펼치기 시작한거다. 우리 세 식구에게 남은 게 단 몇 시간이라면, 우리에게 내일 아침은 오지 않는다면 우린 지금을 어떻게 보내야 할까.
참 뜨겁게 살았던 시절이 있었다. 하고 싶은 것은 죄다 하며 살았던 때였다. 그 때 떠들고 다녔던 말이 있었다.
"난 오늘 밤에 야식 먹으러 편의점 가다
개한테 물려 죽어도 여한이 없어."
지금 떠올리니 무척 유치하고 부끄럽지만 그 땐 정말 그랬다. 매 순간 실컷 행복했으니 지난 삶에 후회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절대 죽고 싶지 않다. 하고 싶은 게 많다. 배우고 싶은 것도, 알고 싶은 것도 훨씬 많아졌다. 어렸을 땐 그저 '지금'이 즐거웠다면 32살의 나는 '앞으로'를 기대한다. 아이가 커가는 모습, 내가 중년이 되어가는 그 모든 순간에 지금의 내가 알지 못할 행복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그래서 지금 죽으면 여한이 있을 것 같다. 아주 많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시간이 찾아온다면- 허투로 쓸 수가 없다. 다신 오지 않을 생의 순간을 무엇으로 채울 지 생각했다. 그 답을 찾는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마지막 순간에 하고 싶은 일들은 참 평범했다.
| 아이와 남편에게 사랑한다고 수없이 이야기하기
| 부모님께 전화해서 당신의 아들, 딸로 살며 행복했다고 이야기하기
| 아이와 남편을 꼭 끌어안기
| 아이가 좋아하는 치즈와 키위 잔뜩 주기
| 아이가 좋아하는 숨바꼭질 실컷 하기
그냥 하나였다.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그 사랑을 표현하는 것.
거실로 나가 남편에게 쓰나미 소식을 전했다. 눈가가 촉촉하게 젖은 채 어두운 방에서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펼친 상상의 나래를 늘어놓았다. 그리고 물었다. 당신은 우리에게 마지막 몇시간이 남았다면 무엇을 하겠냐고. 내 말을 듣는 내내 열심히 검색을 하던 남편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답했다. 아주 심드렁한 표정으로.
"도망가야지 뭔소리야.
저 언덕으로 올라가면 안 죽어."
다음날 아침은 여느날과 같이 평범하게 찾아왔다. 쓰나미는 이 동네 근처에도 오지 않았다. 그렇게 간밤의 소동은 해프닝으로 끝이 났다. 다만 아주 작은 깨달음은 남았다.
"우린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오래오래 살며 이 행복을 만끽할거야.
대신 삶의 마지막 순간에 하고 싶어했던 그 모든 평범한 것을 늘- 하며 살자.
눈이 마주칠 때마다 사랑한다고 말하고,
이산가족 상봉 마냥 매일매일 꼭- 안아주고,
입술이 닳도록 뽀뽀하고
아이의 치즈, 나의 초콜렛, 그의 아이폰처럼
가족의 행복에 덩달아 행복하며 사는 걸로."
<모든 육아는 훌륭하다> 지난 글
#5. '요즘 계집애들은 애를 안 낳으려 한다'는 당신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