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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on Sep 24. 2015

딸. 엄마가 바라는 추석은 말야.

모든 육아는 훌륭하다 #23

누구를 위한 추석이냐며

친구들은 열변을 토했다.


어째 명절이 다가올 수록 친구들의 시름이 깊어지는 눈치다. 지난 주 출산한 친구에겐 명절 때 시댁 안 가도 되겠다며 부러운 시선이 쏟아진다. 외국에 사는 나는 아예 대화에 끼지 말란다. 당해보지 않았으니 낄 자격이 없단다. 


"친정엔 언제 코빼기나 비출 수 있을 지 모르겠어. 

또 시누이 오는 거 보고 가라시겠지."


"왜 며느리들만 죽어라 일해야 해? 

남자들은 TV나 보고."


"화요일 대체휴일 그거 그냥 쉬지 말지. 

명절 딱 질색이야."


"우리 시댁가면 남자 여자 상 따로 받는 거 알아? 

완전 어이 없어."



@채널A 뉴스


할머니의 며느리였던 엄마가 어떻게 명절을 보내는지 30년 동안 지켜봐왔다. 딸은 으레 엄마에게 감정이입하기 마련이다. 이 땅의 (기혼) 여성에게 명절이 얼마나 치사하고 답답한지 안다. 매일이 한가위만 같으면 홧병에 드러누울 이가 한둘이 아니다. 시대는 변했으되 생각은 변하지 않은 탓에 세대가 부딪히고 남녀가 서로 갈등하는 날들이 되어버린 거다. 


딸을 낳고 보니 그 골이 더욱 깊게 보인다. 멀리 나와 사는 까닭에 그 골에서 발을 빼고는 있지만 하루가 다르게 자라는 딸을 보고 있으니 친구들의 한숨이 남일같지 않다. 나도 모르게 딸이 지금의 내 나이가 되어 있을 30년 후의 추석을 상상하게 된다.



시댁 먹저 친정 나중 (X)

그 때 그 때 상황에 맞게 (O)


'명절 때 먼저 간다 = 더 중요하다.'

요 공식이 참 우습지만 현실이다. 아직 열에 아홉은 시댁 먼저 친정 나중의 순서를 따르고 있는 것도 같다. 하지만 우리 모두 안다. 시댁이 우선이고 친정이 뒷전은 아니다. 물론 그 반대도 아니다. 30년 후엔 부디 어디 먼저의 공식이 무의미해져있길. 

"여보. 언제 친정으로 넘어갈거야?"가 아닌

"이번엔 어떤 동선으로 움직일까?"부터 이야기하게 되길. 

더 오랜 시간 더 즐겁게 보낼 수 있는 최선의 스케쥴은 그 때 그 때 상황에 맞게 달라질테니까.



상처만 남는 질문 (X)

같이 할 수 있는 이벤트 (O)


명절엔 상처 뿐인 안부 인사가 오간다. 


"공부는?"

"취업은?"

"결혼은?"

"아이는?

"둘째는?"


사실 묻는 입장도 이해는 된다.


"그거 말곤 할 이야기가 없잖어. 평소 뭐 왕래가 있었어야지."


말없이 멀뚱멀뚱 서로 다른 허공을 응시하고 있기도 어렵다면 차라리 이벤트를 하나 만들어보는 게 어떨지. 여행이 되었든 스포츠 경기가 되었든. 하다못해 보드게임이라도. 모두 같이 어울리기 뻘쭘하지 않은 something이 영 없을 것 같지는 않다.


점점 피붙이끼리 얼굴보기 힘든 세상이다. 공유하는 시간도 이야기도 거의 없다. 그게 현실이라면 명절엔 불편한 이야기를 억지로 끌어낼 게 아니라 새로운 이야기를 같이 만드는 시간이라면 좋겠다.



여자들만 발동동 (X)

남녀노소 자기몫이 있는 (O)


내 기억 속 명절. 여자들은 부엌에서 발을 동동거렸고 남자들은 방에 누워 발을 뻗었다. 여자들은 음식을 하느라 허리를 필 틈이 없는데 남자들은 TV 앞에 너무 오래 누워 있어서 허리가 아프다. 상상만으로 답답해지는 풍경이다. 남자들도 할 말은 있을 것 같다.


"부엌은 익숙치도 않고. 

거기 좁은데 들어가봤자 방해만 되지."


하지만 할 일은 부엌에만 있지 않다. 명절 전후로 온 집안 먼지는 제거되어야 한다. 온갖 집기가 이리저리 옮겨진다. 장도 한 가득 봐야 하고 미리 만들어놔야 할 음식도 많다. TO DO LIST를 적으면 A4 한바닥은 거뜬할 거다. 거기서 남녀노소 자기 역할을 하나씩은 가진 명절이었으면 싶다. 


할아버지는 자식맞이 대청소를 하신다. 아들은 재래시장에서 싸게 장을 봐오고 7살 손녀는 3살 사촌동생을 돌본다. 3살 아이는 어린이집에서 배워 온 춤을 추며 온 집안 순회공연을 한다. 당연하고 즐겁게 자기 몫을 하고 맛나게 밥을 먹는 그런 그림- 꽤 멋지다.



남자 따로 여자 따로 밥상 (X)

안쪽부터 차곡차곡 (O)


어려서 가장 싫었던 명절 풍경은 '앉는 자리가 따로 있었던 상'이었다. 하나는 할머니와 큰아빠, 작은 아빠, 사촌오빠들이 앉는 큰 상. 다른 하나는 며느리, 손녀들이 앉는 작은 상. 부엌 쪽에 붙은 작은 상은 늘 자리가 들락날락했다. 큰 상에 음식을 나르고 물병을 채우느라. 이제와 생각하니 이게 21세기 맞나 싶다. 30년 후엔 딸과 나의 자리가 정해져 있지 않길. 안쪽부터 차곡차곡 선착순 착석이 으레 당연한 게 되어 있길. 그래서 소갈비가 유독 높게 쌓인 그릇 앞에 앉으려 쟁탈전이 벌어지길.



눈치보고 시계보며 Bye (X)

가족 사진 한방 찍고 Bye (O)


오후 간식을 먹고 나면 작은 엄마는 헛기침을 하셨다. 가방을 주섬주섬 채우며 TV앞에 누운 작은 아빠를 자꾸만 곁눈질했다. 그게 '얼른 친정가자'는 신호란 건 나중에 엄마가 알려주셨다. 그렇게 한 집이 자리에서 일어나기 시작하면 모두가 서둘러 짐을 챙겼다. 순식간에 모두가 빠져나간 후, 할머니는 몹시도 쓸쓸해보였다.


할머니의 그 마음을 이젠 알 것 같다. 이렇게 하루종일 붙어 있어도 또 보고 싶은 딸이 그땐 얼마나 그리울까. 그 마음에 허탈함만이 남지 않게, 꽤 멋진 굿바이 세레모니를 해보는 건 어떨까. 흩어지기 전에 이 시간을 기억할 수 있는 가족 사진을 찍는 거다. 설에 한 장 추석에 한장. 1년에 2장 씩 가족의 역사가 사진으로 쌓이는 걸 보며 할머니가 되어 있을 나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쓰고 보니 유치하다. 현실과 좀 멀다. 하지만 수십 년 전 공상과학 소설이 오늘의 현실이 되지 않았나. 30년 후 이 글을 다시 보며 '이렇게 당연한 걸 뭘 이렇게 상상하듯 써놨디야' 싶다면 좋겠다.


이렇게만 된다면 

진정 한가위만 같아라, 싶지 않을까.





<모든 육아는 훌륭하다> 지난 글


#1. “미안해 그리고 미안해” feat. 엉망 엄마

#2. 그래, 엄마에겐 ‘곤조’가 있어야 한다.

#3. 엄마는 희생해야만 하는걸까?

#4. 육아에도 기획이 필요하다.

#5. '요즘 계집애들은 애를 안 낳으려 한다'는 당신에게

#6. 아이도 엄마도 행복한 육아 <둘다 리스트 10가지>

#7. 육아에 훈수를 금합니다.

#8. 육아우울증 극복을 위한 Tip 5가지

#9. 워킹맘의 육아휴직 손익계산서

#10. 딸. '잘' 살 필요없어.

#11. 딸. 엄마를 필요로 해줘서 고마워.

#12. 딸. 엄마랑 사진찍자, 100장 찍자.

#13. 딸. 엄마랑 커플룩입어볼까?

#14. 딸. 엄마가 우리 딸 맘을 몰랐네.

#15. 딸. 아빠는 도와주는 게 아냐.

#16. 딸. 맘충이라고 들어봤니.

#17. 딸. 오늘이 세상 마지막 날이라면 말야.

#18. 딸. 문제는 전업맘일까?

#19. 엄마도 아이도 좋아하는 <아지트> 만들기

#20. 딸. 넌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건 아냐.

#21. 엄마도 아이도 좋아하는 <친구> 사귀기

#22. 엄마도 아이도 좋아하는 <커플룩> 입기

#23. 딸. 엄마가 바라는 추석은 말야.

#24. 딸. 외동이면 외로울까? 

#25. 엄마도 아이도 좋아하는 <춤>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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