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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on Dec 28. 2015

새해의 시작, 당신이 크라이스트처치로 떠나야 하는 이유

모든 여행은 훌륭하다 #23

한 해가 저물었다. 


흘러간 한 해를 따뜻하게 추억하고 설레는 마음으로 새해를 맞이해야 할 시기. 하지만 언젠가부터 새해가 마냥 반갑지만은 않다. 기분 좋은 뉴스를 접한 게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리더도 정책도 좀처럼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내 나라를 '헬'이라 표현하고 싶진 않지만 그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 것 같긴 하다. 더 큰 문제는 나다. 연초 목표했던 것 중 제대로 이룬 것이 하나라도 있긴 할까. 열심히 벌었는데 통장 잔고는 그대로. 월급 도둑은 되고 싶지 않았으나 눈에 보이는 성과는 지지부진. '이렇게 해냈노라' 자신있게 내밀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었다. 뭔가 한 해 인생 농사에 실패했단 생각에 초조해졌다. 


그러다 우연히 떠난 여행지에서 참 고마운 순간을 만났다. 2015년의 실패가 쓰게만 느껴지는 당신에게 크라이스트처치, 실패가 희망을 낳은 도시를 추천한다. 


 




환희의 상징이던 대성당

모든 게 무너지고 폐허만 남았다.


한때 크라이스트처치는 아주 빛나고 활기차던 도시였다. 우리가 로마 스페인 광장이나 뉴욕 타임스 스퀘어에 들어서며 느끼는 그 희열을 이 곳에서도 만끽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난 2011년 커다란 지진은 이 곳의 풍경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도시는 순식간에 폐허로 변했다. 대성당도 폐허가 되었다. 유학생들로 북적이던 어학원도, 꽤 여럿이던 한국 식당도 자취를 감췄다. 대성당 인근 상가의 상인들 역시 졸지에 삶의 터전을 잃었다. 



4년이 훌쩍 지난 2015년 말. 여전히 지진의 흔적이 진하게 남아 있었다. 도시의 반쯤은 그랬다. 대성당 역시 철조망 안에 갇힌 채 우리를 맞았다. 사진 찍는 것조차 조심스러웠다. 그런데 말이다. 바로 앞 광장엔 사뭇 다른 공기가 흐르고 있었다. 폐허가 된 도시답지 않은 활기였다. "여기서 내일이 시작됩니다."라 적힌 간판을 끼고 광장으로 들어섰다.



컨테이너 박스들이 모여

새로운 희망을 보여주다.



광장은 형형색색의 컨테이너 박스로 가득했다.


리스타트몰 @http://www.christchurchnz.com/


사연은 이랬다. 상인들은 지진으로 졸지에 삶의 터전을 잃었다. 번듯한 가게 대신 컨테이너 박스에 하나 둘 물건을 들여놓기 시작했다. 누구도 찾아오지 않을 것 같았던 폐허에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이 곳은 도시의 희망이 되었다. '리스타트몰'이란 이름은 그렇게 붙었다.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희망의 상징인 셈이다. 






리스타트몰은 멋졌다. 굳이 극적인 스토리에 가산점을 주지 않아도 매력적이었다. 제대로 된 건물이 없어 임시로 들인 컨테이너 박스가 고유의 디자인 컨셉이 됐다. 사람들은 그 위에 차려진 벤치에서 일광욕을 하며 맥주를 마신다. 형형색색 어우러진 박스를 감상하며 느긋한 연말을 보내기도 한다. 한때- 모든 것이 끝난 것처럼 무너졌던 도시가 되려 폐허를 발판삼아 도약한 셈이다.


간혹 내 삶을 송두리째 무너뜨리는 우울과 맞닥뜨릴 때가 있다. 허무와 무기력에 지쳐 어디로든 도망치고 싶어진다. 4년 전, 크라이스트처치의 시민들도 그렇지 않았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된 그들의 삶에 박수를, 우리 삶에도 화이팅을. 



전도유망했던 군인 스캇

패배와 함께 얼어죽었다.


버즈 올드린은 닐 암스트롱에 이어 두번째로 달을 밟았다. '바보야. 사람들은 1등만 기억해'란 명제의 증거로 수없이 울궈먹어지는 인물이다. 비슷한 사람이 하나 더 있다. 아문센과의 남극점 도달 경쟁에서 패배한 스캇. 심지어 그는 귀환길에 추위와 굶주림에 지쳐 죽기까지 했다. 돌이킬 수 없는 영원한 '패자'로 남은 셈이다. 


크라이스트처치는 그런 스캇의 흔적이 남아 있는 도시이기도 하다. 그가 남극점을 향해 출항한 리들턴 항구 (이 곳은 크라이스트처치 지진의 진앙지이기도 하다.), 남극탐험센터, 대성당 인근의 동상이 대표적이다. 



남극체험센터는 말 그대로 남극을 간접적으로 느껴볼 수 있는 곳이다. 스캇에 초점을 맞추자면 그가 탐험 내내 씨름했을 추위를 체험할 수 있는 인공눈보라방을 추천한다. 영하 18도에 눈보라가 몰아친다. 이게 남극에선 '봄' 날씨란다. 


스캇베이스의 이정표도 발견할 수 있다. 



비교적 가까운 위치 덕분에 오늘날에도 크라이스트처치는 남극기지의 베이스 역할을 하고 있다고. 이를 표현해놓은 벽화를 감상하는 것도 쏠쏠한 재미.



무튼. 남극센터에서 스캇의 흔적을 발견하는 건 무척 쉬웠다. 그의 탐험을 설명하는 판넬, 기념품 가게의 책까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왜 이토록 그를 기억하려 드는걸까. 영원히 져버린 패자일 뿐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왜 그를 기억하는걸까.


그에 대한 자료를 찾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그를 기억하는 방식은 2가지였다. 첫번째는 '그가 왜 실패했는가'에 대한 이야기였다. 썰매끌이 동물을 잘못 선택한 것에서부터 실패한 사례를 복기하지 않았던 것까지- 그의 실패에는 참 많은 이유가 있었다. 두번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이 그를 왜 기억하는가'에 대한 단초였다. 단지 패배, 죽음에 대한 연민과 동정은 아니었다. 


그는 얼어죽는 순간까지 16kg 짜리 남극의 돌덩이를 버리지 못했다. 미지의 세계인 남극을 연구할 수 있는 자료였다. 그의 동료인 오츠 대령은 자신이 동상에 걸린 것을 알고 대원들의 짐이 되고 싶지 않아 "잠시 나갔다 오겠다"는 말을 남긴 채 눈보라 속으로 사라졌다. 


이들이 죽는 순간까지 지켜낸 그들만의 '뭔가'가 오늘날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전해주고 있는 건 아닐까. 자부심, 동료에 대한 신의,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도전정신. 굳이 1등이란 타이틀이 붙지 않아도 충분히 뜨거운 단어다. 


문득 요즘 상영 중인 영화 <히말라야>가 떠올랐다. 영화를 보진 못했지만 오래 눈길을 사로잡았던 한 줄이 있었다. 


"기록도 명예도 보상도 없는 가슴 뜨거운 도전이 시작된다."




우리는 저울질하고 평가하는 데에 익숙하다. 얘는 실패했네 쟤는 성공했네. 학창 시절엔 성적으로 줄을 섰고 사회에 나와선 통장 잔고로 또다른 줄을 섰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세상은 1등 만을 기억한다'며 암스트롱과 아문센의 이야기를 증거로 내세우는 것도 자연스럽다. 하지만 남보다 앞서야, 먼저 해야만 성공일까. 그런 왈가왈부 자체가 어불성설이 아닐런지. 성적, 취직, 승진, 통장 잔고에 가려져있지만 우리 모두의 마음 속엔 분명 지켜내고 싶은 나만의 뭔가가 있을진데. 


대성당 근처- 스캇의 동상을 찾았다. 스캇의 부인이 그를 기리기 위해 세운 7개의 동상 중 하나라고 하는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주춧돌만 덩그라니 남아 있었다. 




돌엔 그의 시신과 함께 발견된 일기의 한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I do not regret this journey, which shows that Englishmen can endure hardships, help one another, and meet death with a great fortitude as ever in the past"


"난 이 탐험을 후회하지 않는다. 이 탐험은 영국인이 역경을 견디고 서로를 도우며 불굴의 의지로 죽음과 맞닥뜨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2016년 새해 목표에서 

숫자를 뺐다.


근 10년 가까이 새해 목표는 비슷했다. 5kg 감량, 토익 몇 점, 독서 몇 권- 이런 것. 올해는 이런 숫자는 빼고 적어볼 생각이다. 


"나만의 '뭔가'를 찾자. 죽는 순간까지 버리지 않았던 스캇의 돌덩이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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