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와 텃밭

오늘을 살아가며

by 연은미 작가

23년 새해가 밝았다. 아빠는 올해 일흔아홉이 되셨다.

젊을 때 강원도에서 농사를 짓던 아빠는 처자식을 데리고 울산으로 내려왔다. 잠시 막노동을 하다 현대정공에 이어 현대자동차를 다니고 정년퇴직을 맞이했다. 후에는 대단지 아파트 경비원으로 일하셨는데 그 시기에 집 근처 놀리는 땅을 발견하고 땅주인 허락을 받아 텃밭을 일구더니 철마다 감자, 고구마, 양파 등을 수확하여 보내주신다. 2년 전 경비직도 15년 장기근속을 채우고 경제활동의 주체에서 물러나셨다. 가끔 공익근로를 다니는 것 말고는 소일하며 지내신다.


몇 년 전 일이다. 5월에 있는 시어머니 제사에 내려가는 김에 초등학생인 두 아이를 데리고 일주일 동안 여행 계획을 세웠다. 먼저 부산 형님네에서 제사를 지내고 경주에서 2박을 하고 무주를 거쳐 집으로 돌아오는 일정이었다. 제사를 지내고 다음날 경주로 이동해서 숙소에 도착했는데 지도를 보니 울산 집과 멀지 않았다. 숙소가 경주 한 복판인 줄 알았더니 경주 초입이라 차로 20분이면 만날 거리였다. 머리 뒤가 따끔따끔 당겼다. 그때 남편이 지도앱을 확대하며 보여주며 쇄기를 박았다.

"멀면 모르겠는데 너무 가깝잖아. 여기까지 왔는데 장인어른을 보고 가야지. 그냥 가면 후회한다"

나도 알지. 근데 아무리 싫어도 새엄마만 쏙 빼놓고 아빠만 밖에서 만나는 게 마음 편하지 않으니 문제라고요. 사실 답은 정해져 있다. 내 마음 편하자고 여기까지 와서 불효를 저지를 수는 없다. 한숨을 털어내며 친정 오빠에게 연락을 했다. 저녁에 오빠가 아빠를 모시고 숙소로 왔다. 오랜만에 아빠를 보니 반가웠다. 아빠는 부쩍 큰 손주들을 보며 좋아하셨다. 근처 바다가 있는 정자로 차를 몰아 횟집에서 저녁을 먹고 이야기를 나누다 헤어졌다. 막상 만나고 나니 짧은 만남이 아쉬웠다. 이튿날 경주 불국사, 첨성대 등 명소를 구경했다. 사흗날에는 경주에서 무주로 이동을 해야 했다. 코 근처에 아빠가 사는데 아무래도 아빠 얼굴을 한 번 더 보고 가야겠다 싶어서 전화를 했다.


"아빠, 텃밭은 잘 있어요?

"잘 있지..."

"내일 우리 출발 전에 아빠 밭 구경가도 돼요?"

"그럴래?"

아빠 목소리가 조금 밝아지셨다.

아빠와 시간 약속을 하고 다음날 아침, 냉장고에 있는 재료들을 모조리 꺼내 불고기와 쌈, 각종 반찬을 준비했다. 햇반까지 끓는 물에 다 데워 음식과 짐을 차에 싣고 전화로 종종 들었던 아빠의 텃밭을 처음 보았다. 너른 텃밭은 흙더미가 모인 밭고랑을 따라 고추, 파, 무 등이 아빠의 손길에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다. 텃밭 가장자리에 설치해 놓은 천막에 들어가 준비해 온 점심을 꺼냈다. 상도 없이 바닥에 깔아 모양새가 투박했지만 너른 초록 텃밭을 바라보며 복작하니 끼어 앉아 먹는 점심은 즐겁고 맛이 좋았다. 아빠랑 함께 먹어서 더 좋았다. 이곳에 앉아 아빠는 땀을 식히며 막걸리 한 잔을 하겠지? 고즈넉한 풍경에 맘이 적적해지고 취기가 오르면 종종 딸들에게 전화를 하겠지? 평소 아빠의 일상이 눈에 그려졌다. 밥을 먹고 아이들이 텃밭에 물을 준다고 요리조리 종종거리니 아빠가 웃으며 옆에서 거들었다. 나는 그 모습을 사진으로 담으며 콧잔등이 시큰해졌다. 곧 떠나면 한동안 못 볼 것이고 이 사진이 그리움이 될 것을 너무 잘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내 예상은 너무나 잘 맞아 이날 만남 후 4년 동안 아빠를 보지 못했다.





나이가 들수록 세월이 빨리 가는 것 같다. 실제로 10대는 시속 10킬로로 가고 30대는 30킬로, 50대는 50킬로 간다는 말이 있다. 하루는 뚝딱, 한 달은 금세, 1년은 벌써? 나만 시간이 빨리 가는 줄 알았더니 연구 결과 실제로 인간은 경험이 많아지고 연륜이 쌓이면서 시간이 빨리 간다고 느낀다고 한다. 초등학생이었던 시댁, 친정 조카들이 성인이 되어 20대 30대가 넘어가는 것을 보면 세월의 흐름을 절감한다. 어느새 그들이 각 영역의 경제주체가 되고 4, 50대 내 세대는 퇴직과 노후를 걱정한다. 내가 오십이 코 앞이라니, 20대 성인이 된 후 30년이 다 되어 간다고? 믿기지가 않는다. 언제나 어릴 줄 알았는데 부모의 자리에 서고 내 자식의 성년이 가까워진다.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부모님에게 이른다. 나보다 서른한 살이 많은 아빠는 여든을 앞에 두고 어떤 마음일까. 매일이 80킬로로 순식간에 지나갈까? 하루하루가 아까울까? 아빠는 어떤 낙으로 살까? 경제 주체로 돈을 벌며 평생 성실히 일하셨던 아빠에게 일이 빠진 하루는 어떤 의미일까?





아빠는 지금도 새벽 6시면 집에서 나와 1시간을 걸어가 텃밭을 가꾸신다.

종종 전화를 하면 점심 나절까지는 대부분 텃밭에 계신다. 전화를 받으시는데 전화기 너머로 잡음 섞인 트로트 노래가 크게 들린다. 전화하는데 방해될 정도로 큰 노랫소리에 귀가 아프다. 아빠 귀가 안 좋은 걸 커다랗게 들려오는 노래로 깨닫는다. 옛 노래. 혼자만의 공간. 손수 키우고 거두는 곳. 잠시 흘린 땀을 식히며 막걸리 한 잔 드신다는 곳. 사람 소리라고는 없이 자연의 소리와 적막한 그곳에서, 시간의 흐름이 한없이 느려지는 그곳에서 아빠는 흙을 만지며 무슨 생각을 할까.

엄마에게 조금 더 다정했다면, 사랑한다, 고맙다 표현을 할 줄 아는 아빠였다면

아빠도 좋아하는 사람과 인연을 맺었다면, 이혼이 행복의 시작이었다면...

내가 바랐던 그런 상념을 흘러가는 구름을 보며 흙을 만지며 하고 있을까.


어릴 때 친할머니는 아빠 위로 8명의 자식을 병으로 먼저 보내고 아빠를 마지막에 낳아 외동으로 키웠다고 하셨다. 할머니, 할아버지는 아빠가 스무 살쯤 다 돌아가시고 혈혈단신 혼자서 살아오신 거다.

혼자서 하루종일 땅을 고르고 씨를 뿌리면서 마음의 평안을 찾는 장소. 팍팍한 인생에 큰 위로가 되는 아빠의 텃밭. 텃밭은 온전히 아빠에게 숨을 크게 쉴 수 있는, 몸과 마음을 쉴 수 있는 곳으로 보인다. 아빠한테 밭이 없었으면 안 그래도 외로운 삶, 더 외로웠을 것이다. 인생의 후반기에 있는 아빠의 마음이 덜 고독하고 덜 외로우면 좋겠다. 아빠에게 텃밭이 있어서 정말 감사하다.


작년 제주도에서 4년 만에 상봉해 4박 5일 짧은 여행을 함께 하고 언니네와 가족 캠핑을 다녀온 후 표현 없는 아빠에게 부쩍 안부 전화가 자주 온다. 함께 했던 시간이 아빠의 마음에 따뜻한 온기가 되었나 보다. 아빠에게 전화가 오면 평소보다 높은 목소리로 전화를 받는다.

"아빠, 어디세요?"

"밭에 왔다."

"겨울이라, 할 일도 없을 텐데... 아빠 심심하시겠다."

"허허, 그렇지 머.

평생 성실하게 몸을 움직여온 아빠는 이 추운 겨울에 마땅히 할 일이 없어도 이른 오전에 걸어서 밭에 가신다. 잔정리를 하고 돌이라도 걸러낸다. 곧 봄이 오면 땅을 일구고 씨를 뿌리며 아빠의 밭도, 아빠도 생기가 오르겠지? 앞으로도 작은 텃밭을 가꿀 정도로 건강하셨으면 바랄 게 없겠다.


어느새 올해는 어머니 기일 10주년이다. 코로나로, 사는 게 바빠서 어머니 제사도 몇 년 못 갔는데 올해는 5월에 어머니 제사에 참석하고 울산 아빠도 보고 올 계획이다. 얼른 봄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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