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면서 미워하는 마음

오늘을 살아가며

by 연은미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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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살부터 8년간 만나지 않았던 엄마와 열아홉에 다시 왕래를 시작했다. 내가 부산으로 가끔 엄마를 만나러 가면 정성스럽게 음식을 해서 밥상을 차려줬다. 결혼을 한 후 엄마는 자주 반찬을 해서 택배로 보내주고 김장까지 해서 무거운 김장김치를 몇 박스나 택배로 부쳐주었다. 아기를 낳을 때 부산에서 부천까지 한걸음에 달려와 산후조리를 해 주었다. 아이들 어렸을 때는 1년에 한두 번씩 2주 정도 부산 엄마에게 가 있었다. 엄마가 아이들을 봐주는 동안 대여점에서 만화책과 비디오를 산더미처럼 빌려보고 엄마가 싸준 김밥과 음식을 먹으며 느긋하게 보냈다. 그런 엄마가 고마웠지만 마음 한 구석에 남은 서운함이 깨끗하게 사라지지 않았다. 그 원망의 찌꺼기를 나도 모르게 표를 내고는 했는데 그 방법이 참으로 유치했다. 엄마가 먼저 전화를 하거나 찾아오지 않으면 바쁘다는 핑계로 먼저 연락을 안 하는 것이다. 문득 엄마와 꽤 오래 연락을 안 했다는 것을 떠올렸지만 먼저 연락할 마음이 들지 않았다. 엄마의 생신도 어버이날도 마음이 우러나왔다기보다 의무감에 챙길 때가 많았다.


엄마만큼 아빠에게 느끼는 감정도 복잡했다. 1년에 겨우 한 번 보는 아빠가 나이 들어가는 모습이 애달프면서도 때때로 못된 마음이 올라왔다.

'이건 아빠 탓이야! 친정이 마음에 고향은 아니더라도 갈 수 있는 곳 정도는 돼야 하잖아? 티끌만큼도 애정이 없는 곳, 냄새 고약한 곳, 과거 그대로 박제된 공간에 다시는 들어가고 싶지 않아. 인생에서 중요한 결정을 아무렇게나 했기에 내가 아빠를 만나러 못 가는 거예요. 자식이랑 외손주를 자주 못 보는 건 아빠가 짊어져야 할 대가예요.' 보고 있으면 불쌍하면서도 마음속에서는 몇 번이나 아빠에게 대거리를 했다.

아빠의 우유부단함이 답답했다. 그런 아빠를 보고 자라서인지 나는 말을 분명하게 못 하고 입속에서 말을 어물거리는 사람이 싫었다. 선택이 잘못되었으면 또 다른 선택을 해야 한다. 그래야 방향이 바뀐다. 아무것도 결정하지 않는 것이 실은 엄청나게 큰 결정이다. 젊은 날 아빠의 결정은 시간이 해결해주지 않았고 숙제처럼 남아 자식들을 괴롭힌다.



애증, 부모를 사랑하면서 미워하는 마음이 오랫동안 엉켜 있었다. 그 엉킨 마음도 세월이 흐르니 원망은 옅어지고 애틋함이 커진다. 전국 어디든 자식들 데리고 다니고 서울까지 동행해서 이사를 챙겨줬던 아빠가 혼자서 차를 타고 가는 것을 무서워한다. 걸음걸이와 움직임이 느려진다. 작은 선물 하나에 어린아이처럼 좋아하고, 함께 찍은 사진을 보고 또 보며 행복해한다. 강하고 컸던 존재가 점점 작아지고 약해지는 모습은 서글프다. 인생의 정점을 지나 삶이 단순해지고 몸이 노쇠해지는 부모를 보면 묵직한 원망 덩어리가 허무하게 부서진다.


애틋함이 커진다고 미움이 없어진 것은 아니다. 부서진 덩어리가 옅어지고 희석되었지만 잔유물이 여전히 남아있다. 잔여물은 채로 걸러 버려도 망 틈새로 자꾸만 빠져나간다. 잔여물에 일희일비하는 내가 미련하게 느껴진다. 스무 살 이후 주체적으로 산 시간은 내 세계를 하나하나 쌓아가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그런데 왜 아직도 중요한 순간에 마음이 옹졸해지고 감정이 널뛰는 걸까. 분명 지금 내가 발 딛고 있는 곳이 현실인데 눈에 보이지도 만질 수도 없는 기억의 거미줄에 걸려 옴짝달싹 못하냔 말이다.


언제까지 잔유물을 붙잡고 있을 것인가. 이렇게 두면 되지 않을까. 그래도 이만큼 옅어졌으니 이대로 둬도 괜찮지 않을까. 완벽하게 새로운 마음으로 바뀌는 것만이 의미 있는 것일까. 그게 가능은 한 걸까.


이제는 있는 그대로 놓아주자고 진심으로 생각한다.




<엄마의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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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도시로 떠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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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어두운 터널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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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 속 내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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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살아가며>

1. 부부는 무엇으로 사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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