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생인 우리는 2주에 한 번 울산 시내에 있는 ING 커피숍에서 모임을 가졌다. 넓은 커피숍 구석에는 칸막이가 있는 큰 테이블이 몇 개 있어서 오랜 시간 동안 눈치 보지 않고 모임을 하기 좋았다. 우리의 아지트였다. 회칙도 정하고 회지 발간 계획도 세웠다. 커피숍에서 회의를 마치면 근처 음악감상실에 음악을 들으러 몰려갔다. 커피숍과 음악감상실을 드나드니 부쩍 어른이 된 기분이었다. 매달 회비를 모았지만 회지 인쇄비가 비싸서 걱정을 했는데 친구 둘째 오빠가 인쇄소에서 일을 해서 싸게 인쇄를 할 수 있었다. 인쇄물로 나온 첫 회지를 받았다. 내 그림이 만화책처럼 앞 뒤로 찍혀 나오다니 너무나 신기했다. 우리는 할당된 회지를 각 지인들에게 팔기로 했다. 그래야 회비가 쌓이고 다음 회지를 만들 수 있으니까. 나는 부끄러움도 모르고 학교에 가져가서 홍보를 했다. 미술 선생님, 국어 선생님 두 분이 회지를 사 주셨다. 예술과 문학을 전공한 분들 눈에 우리의 글과 그림이 얼마나 조악해 보였을까마는 잘했다며 응원해 주셨다. 뭔가를 꼬물거리는 모습을 기특하게 보셨던 것 같다.
오티움, 내 영혼이 기뻐하는 경험
오티움은 '영혼을 기쁘게 하는 능동적인 여가'를 뜻한다. 좋은 여가란 내 영혼이 기뻐하는 경험의 시간이다. 오티움은 내일이 아닌 오늘이 행복이며, 물거품 같은 쾌락이 아니라 기쁨과 의미를 동시에 만족시켜 주는 진정한 행복이다.
사춘기가 되면서 내가 결정할 수 없는 가정환경에 때론 분노했는데 그럼에도 방향을 잃지 않도록, 삶을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준 것이 내게는 만화였다. 만화가 바로 내 '오티움'이었던 것이다.
어디서도 튀지 않았던 무난한 아이. 내성적이고 자신감 없던 소심한 아이에게 만화동호회 활동은 무채색이었던 내 세계를 알록달록한 색으로 바꿔주었다.
스무 살이 되어 그림을 잘 그리고 싶은 마음이 커졌다. 멤버 J 언니가 디자인 학원을 다닐 거라며 내게도 권했다. 큰 마음먹고 학원 등록을 했다. 회사와 디자인 학원은 왕복 2시간 거리여서 회사를 마치고 학원에 갔다 자취방에 오면 11시가 넘었다. 연필 묘사를 주로 했는데 생각했던 것처럼 밀착코칭이 아니었다.J 언니도 종종 수업을 빠지고 나도 두 달 정도 다니다 재미없고 힘들어서 그만뒀다.
어느 날은 팝송으로 배우는 영어회화 특강이 울산대에서 열린다고 친구가 같이 듣자고 해서 회사에서 1시간 30분이나 버스를 타고 한 달을 다니고 그만뒀다. 이것저것 잘하고 싶은 마음은 컸지만 전략도 없고 끈기도 부족했던 스무 살이었다.
세기말이 가까워져 오니 마음은 더욱 요동을 쳤다. 2천 년이 정말 오는 건가? 노스트라다무스의 종말설은 어떻게 될까? 컴퓨터가 먹통이 된다는 소문은 진짜일까? 스무 살 나는 평범한 직장인인데 미래의 나는 무엇을 하며 살고 있을까? 동호회, 친구, 회사 등 '우리'라는 테두리 안에 있을 때는 마음이 안정되었지만 주말에 친구가 집에 가고 혼자 조용한 자취방에 남아 있을 때, 영원히 함께 할 것 같았는데 진로를 고민하던 언니들이 서울로 떠날 때결국 인생은 혼자 걸어가는 건가 싶어 쓸쓸하고 허허로웠다. 마치 처음부터 가슴에 구멍이 하나 뚫려 있는데 평소에는 시끄럽게 움직이느라 소리를 못 듣다 때때로 혼자가 되어 고요한 공간에 구멍을 통과하는 바람소리를 듣는 것 같이외로웠다.
어설프게 거만하고 모이면 왁자지껄 떠들며 생각 없이 즐거워 보이는 우리였지만 각자의 집안 사정과 안개처럼 뿌연 앞날을 개척해 나가야하는 날것의 향연, 스무 살은 그런 나이였다.
미야작가 / 연은미
만화가 & 일러스트레이터
그림을 그릴 때나 그리지 않을 때나 삶은 계속됩니다. 먹고 자고 싸고 청소하고 지지고 볶고 일하고 사랑하며 하루가 지나갑니다. 특별할 것 없는 하루지만 내 눈으로, 내 몸으로 보내는 날들입니다. 까먹기 대장이라 시작한 미야일상툰, 가볍게 즐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