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 철학에 의하면, 사람은 육체와 영혼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육체는 파괴되어 없어지나 영혼은 영원히 살아서 이승과 저승을 윤회한다는 영혼 불멸설을 주장합니다.
선과 악은 이렇게 구별합니다.
부패와 파괴를 초래하는 것은 악한 것이며,
보존과 이득을 낳는 것은 선한 것입니다.
모든 사물엔 선과 악이 있습니다.
눈병은 눈의 악이고 질병은 몸의 악입니다.
곰팡이는 곡식의 악이고, 썩는 것은 목재의 악이며,
녹은 쇠붙이의 악입니다.
악에 물들면 모든 사물은 파괴되며,
각자에 깃들어 있는 악은 각자의 파멸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각자가 스스로를 파괴하지 않으면
그 어떤 것도 파괴할 수 없습니다.
선한 것은 당연히 스스로를 파괴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부패의 요소를 지니고 있음에도 파괴되지 않는 어떤 것이 있다면, 그러한 것에는 파괴될 무엇이 없다고
봐도 됩니다.
영혼을 부패시키는 것은 부정, 방종, 비겁, 무지 등
그 밖에도 많은 것들이 있습니다. 이런 것들 가운데
영혼을 파괴시킬 수 있는 것들이 있을까요?
육체가 파괴됐을 경우, 그것은 부패한 음식의 악
때문이 아니라 그 악이 유발한 육체의 질병 때문입니다.
같은 논리로 어떤 육체의 악이 영혼의 악을 만들어내지
않는 한 그 영혼은 소멸되지 않습니다.
질병으로든 어떤 다른 원인으로든 육체는 소멸할지언정 영혼은 소멸하지 않습니다. 육체의 손상이 영혼 자체를 부정하게 하거나 불결하게 하지는 않습니다.
영혼이든 다른 무엇이든 그것 자체에 악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면 그로 인한 소멸은 발생하지 않습니다.
육체는 멸하되 영혼은 돌고 돌아, 생은 땅과 하늘을 오가는 생성
죽음으로 인해 우리의 영혼이 부정해진다는 것을
증명할 수 없습니다.
부정은 타인을 죽였으면 죽였지 그 스스로는 아주
씩씩하게 살아 있습니다. 부정이 활개 치는 땅은 죽음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육체에 내재돼 있는 악이 영혼을 죽일 수 없다면,
그 영혼은 한결같이 있어야 하고, 불멸합니다.
불멸인 영혼은 순수합니다.
거기에는 잡다한 불순물이 끼어들 수 없습니다.
이러한 영혼의 모습을 보기 위해서는 이성의 눈으로
영혼 자체를 명상해야 합니다. 그러면 영혼의 아름다움은 물론 정의나 불의, 그 밖의 모든 사물들까지 훤히 볼 수 있습니다.
영원히 죽지 않는 영혼이 무엇을 따르고 무엇과
사귀고 싶어 할까요?
영혼이 그 자신의 질서에 따라 지상에 살면서
들러붙게 된 찌꺼기들을 떼어낼 때, 그때 비로소
우리는 영혼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플라톤은 국가론에서, 사람의 육체는 사라져도
그 안에 존재하는 영혼은 육체가 파괴되는 순간
분리되어 저승으로 향한다 하였습니다. 이때 그 영혼은 이승의 삶에 대해서 저승의 문턱에서 심판을 받습니다
정의로운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생전에 받는
보상은, 사후에 받을 보상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하며 소크라테스는 핌필리아 종족의 에르에 관한
전설을 글라우콘에게 이야기하기 시작합니다.
에르는 전투를 하다 죽었는데, 열흘 뒤 사람들이 시신을
수습할 때까지도 썩지를 않아, 장례를 치러주기 위해
사람들이 그의 시신을 고향으로 모셔 왔고, 이틀 뒤
화장을 하기 위해 불을 붙이려는 순간 그가 눈을 뜨고
다시 살아났다네. 그가 열이틀 동안 저승에서 본 사후
세계에 대해 얘기했는데, 그 내용은 이렇다네.
육체를 떠난 그의 영혼이 다른 혼들과 함께 어떤 신비한
곳에 도착했을 때였다. 지상과 하늘 쪽으로 각기 두 개의
커다란 구멍이 나 있었고, 이 구멍들 사이에 심판관들이
앉아 영혼들을 판결하는 게 보였다. 심판관들은 정의로운
삶을 산 자에겐 하늘로 난 오른쪽 구멍으로 올라가도록
지시하고, 부정한 자에겐 지상으로 난 왼쪽 구멍으로
내려가도록 지시했다. 이렇게 해서 에르는 판결에 따라
영혼들이 떠나는 것을 보았다. 아울러 하늘의 왼쪽 구멍
에서는 순수한 영혼들이 내려오고, 지상의 오른쪽
구멍에서는 추한 영혼들이 올라오는 것도 보았지.
그러면서 서로 아는 영혼들끼리는 인사를 나누고
안부를 묻기도 했는데, 지상에서 올라온 영혼들은
천년 동안의 여정에서 겪은 일들을 회상하며 슬픔에
겨워 울었고, 하늘에서 내려온 영혼들은 그곳의
아름다운 광경에 대해 이야기하며 웃었는데
이야기를 대충 정리하면 이렇네
사람들은 이승에서 자신들이 지은 죄만큼 저승에서
벌을 받게 되는데 그 지은 죄의 열 배를 감당해야 한다.
100년 동안 죄를 지었으면 천 년 동안 벌을 받고,
반면 착한 일을 했거나 훌륭한 삶을 살았다면 천 년을
보상받는다. 그런데 가장 혹독한 벌을 가장 오랫동안
받는 사람들은 참주나 폭군들이라네. 그들의 죄는
너무나 무거워 사실상 정해진 형량이 없어 절대로
구멍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네.
영혼들은 초원에 묵은 지 여드레째 되던 날 다시
길을 떠나기 위해 운명의 여신인 아난케 여신의 세
딸들 앞에 선다.
아난케 여신인 세 딸들은 저마다 흰 옷을 걸치고
머리에는 화관을 쓰고 있었는데, 라케시스는 과거의
일들슬, 클로토는 현재의 일들을, 아트로포스는
미래의 일들을 별들의 음악에 맞추어 노래했다.
그곳에 도착한 영혼들은 곧바로 라케시스의 명령을
전하는 신관 앞에 정렬해 섰다. 신관은 라케시스의
무릎에서 제비와 여러 가지 생애의 견본을 집어
들고는 높은 단위에 올라 이렇게 말했다네.
"덧없는 영혼들이여, 이것은 필연적으로 죽을 수밖에
없는 자들이 감수해야만 하는 또 다른 주기의 시작이다.
운명의 신이 그대들을 추첨하지는 않을 지니, 각자
자신의 운명을 선택하도록 하라. 선택은 1번부터 한다.
덕엔 주인이 없으므로 그대들이 귀히 여기는가 천하게
여기는가에 따라 많이 갖거나 적게 갖게 될 것이다.
선택은 그대들이 하는 것이므로 책임 또한 그대들에게
있다."
이렇게 말하고는 제비를 던져주었고 영혼들은 각자
하나씩 집어 들고 자신들이 몇 번을 선택했는지 알게
되었다네. 뒤이어 생애의 견본들이 앞에 놓였는데
견본들은 세상의 온갖 생애가 다 적혀 있었다네.
인간은 물론 동물의 생애까지, 군주나 참주의 생애도,
오래 사는 생애도 적게 사는 생애도 있었고, 명예로운
생애도 그렇지 못한 생애도 있었다네. 그러나 그 생애
에 영혼의 성향은 적혀 있지 않았네. 영혼은 생애에
따라 가변적이기 때문이지.
바로 이때가 인간의 모든 모험이 담겨있는 가장 중요한
순간이라네. 선악을 식별해 최선의 선택을 하도록
안내해주는 학문의 탐구자가 돼야 하는 것도 이
때문이지. 즉 어떤 것이 어떤 것과 어울려 선하게
되고 악하게 되는지, 영혼의 본성상 선천적인 것이
무엇이고 후천적인 것이 무엇인지, 그것들이 어떤
결과를 낳는지 유의하면서 공부하고 선택해야 하네.
그런 다음 신념을 굳게 지니고 저승으로 가야지 저승
에서도 현혹됨이 없이 악을 피해 갈 수 있다네.
계속해서 라케시스 신관이 이렇게 말했다네.
"냉철하게 선택해 진지하게만 살면 누구든 만족한
삶을 누릴 수 있다. 그러니 늦게 선택한다고 억울해
하지 말고 먼저 선택하는 사람은 그 선택을 경솔히
하지 말 것이로되, 나중에 선택한다고 낙담할 일
또한 없다."
신관의 말이 끝나고 나서 순서에 따라 생애를 선택
하기 시작했다네. 제일 먼저 뽑은 사람은 참주의 생애를
선택했는데, 그 자는 분별없고 욕심이 많아 신중하지
못했지. 그 안에 들어있는 운명이 얼마나 가혹한지
뒤늦게 알고서야 자신의 선택에 통분을 금치 못했네.
그리고는 불행의 책임을 운명의 신에게 돌렸다네.
이렇게 하여 영혼들은 각자의 생애를 선택했고,
경험과 운수에 의해 좋은 생애와 나쁜 생애가 배당
되었다네.
만일 우리가 이 세상에 올 때마다 지혜를 좋아해
철학하는 마음을 가진다면, 그리고 선택의 제비를
마지막으로 뽑는 일만 없다면, 우리는 이승에서의
행복은 물론 저승에서 다시 이리로 올 때도 천상의
길을 따라 행복하게 올 것 같네.
에르의 말에 따르면 각자의 영혼이 자신의 생애를
선택하는 과정은 참으로 가관이었다네. 대개는
전생의 습관에 따라 선택을 했는데, 그 모습이
다양해 딱하기도 하고 우습기도 하고 놀랍기도
했다.
이렇게 선택을 마친 영혼들은 라케시스에게 가서
그들이 선택한 운명을 실현시키고, 클로토에게 가서
그들이 선택한 영혼을 확인받고, 그다음 운명의
실을 잣고 있는 아트로포스에게 데리고 가 선택한
운명을 되돌리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그 뒤 영혼들은 운명의 여신 아난케의 밑을 지나
망각의 강으로 나가 잠자리를 마련했다네.
이 강물은 어떤 그릇으로도 담을 수 없었지만
그 자리에서 마실 수는 있었는데 마시기만 하면
어떤 기억도 다 잊어버리게 되는 이 강물을 마시고
영혼들은 잠이 들었다네. 밤이 되었을 때, 천둥소리와
함께 지진이 일어났고 영혼들은 모두 하늘로 올라가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 위해서 말이네. 그런데 에르만
그 강물을 마시지 못하게 하고 본래의 육신으로
돌아가 이승에 사람들에게 이 모든 내용을 알려야
하는 임무를 쥐어주고 이승으로 돌려보냈다는 것이
에르의 전설입니다.
소크라테스는 에르의 전설을 통하여
우리는 신의 뜻을 좋아 정의롭게 살면서 덕을 길러야
하고, 그것이 우리의 본분이며 신성을 느끼는 일이라고
말합니다. 그것만이 이 세사에서나 천상의 순례에서나
우리가 행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글라우콘에게
말하며 기나 긴 철학 여정을 마칩니다.
정의롭고 지혜롭게 산 사람은 천국의 문으로 들어가서 1000년 동안 행복하게 살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지옥의 구멍으로 떨어져 1000년 동안 고통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1000년이 지난 후 다시 그 영혼들은 운명의 신 아낭케 앞에 서서, 자신들이 다시 이승으로 돌아와 살아갈 운명을 스스로 선택합니다.
이것이 플라톤의 운명 선택설이며 지혜로운 사람은 이승에 돌아올 때도 정의로운 삶을 택하여 영원히 올바르고 행복하게 살 수 있으므로, 반드시 우리의 영혼을 맑게 하여 지혜를 사랑하고 배고파하는 영혼으로 가꿀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플라톤은 죽음이 모든 것의 종결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삶의 시작을 의미한다 하였습니다.
영혼이 파괴되지 않는 한, 우리의 삶은 영원히 이승과
저승을 끝없이 반복 운행합니다.
태양 주위를 지구가 끊임없이 돌 듯,
은하계가 다른 은하계를 끊임없이 반복하여 돌 듯,
우리네 인생도 끊임없이 이승과 저승을 들락날락
거립니다.
우리가 왜 우리의 영혼을 타락시키지 않고 맑게 해야
하는지, 왜 정의롭고 올바름을 추구해야 하는지는
영혼 불멸설과 운명 선택설을 통해서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영혼이 불멸한다는 것에 동의하시나요?
운명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한다는
주장에대해서는 어떤 의견이신가요?
죽음에 대한 생각은 어떠신가요?
왜 이 시점에서 철학은 우리를 유혹할까요?
니체는 망치를 들고 의문을 던져라고 하였습니다.
진리의 문턱을 넘기 위해서 가장 위험한 삶을
살라고도 하였습니다.
진리의 문턱을 넘는 것,
편견과 모순의 벽을 넘는 것은 망치로 모순의 세상과
싸워야 하는 격한 활동입니다.
플라톤의 영혼 불멸설과 운명 선택설을 믿는다면
우리는 반드시 지혜의 바다로 나아가야 합니다.
니체의 망치를 들고 의문을 던져야 합니다.
그래서 인식의 모험의 바다로 나아가 인식의 지평선을 넓혀야 합니다. 그것이 지식인의 삶이며
우리의 삶입니다.
플라톤의 대표 저서 <국가론>은 우리가 평생을
곁에 두고 읽고 사유하고 질문하기를 습관화해야
하는 인생 지침서입니다.
ᆢ Plato Won
“교육의 목적은 단순히 지식을 주입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영혼이 지혜에 배고파하도록 만드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