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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경욱 Apr 03. 2019

울었다. 밥을 먹다 울었다.

너무 힘들다

울었다. 밥을 먹다 울었다. 12시가 넘은 밤, 늦어도 너무 늦은 저녁을 혼자 먹다가 울었다. 누군가 말했던 그 표현처럼 속에서 무언가 터져 나오듯 울음이 솟구쳐 올랐다. 밥알을 삼키려고, 터져 나오는 울음을 삼키려고 해도 한 번 터진 울음은 그리 쉽사리 삼켜지지 않았다. 살면서 울어본 적을 손에 꼽는 나였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이렇게 울어본 적이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울었다.


'너무 힘들다'


밥을 먹는 건지 눈물을 먹는 건지 몰랐다. 속에서 다시 한번 무언가 솟구쳐 올랐다. 이번엔 욕이었다. 욕과 함께 힘들다는 말이 입 밖으로 절로 튀어나왔다. 사실이었다. 나는 밥 먹다가 갑자기 울어버릴 정도로, 입에서 욕이 튀어나올 정도로 힘들었다.


밥 먹다가 우는 것만큼 부조화스러운 일이 있을까. 하지만 나는 드디어 올 게 왔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니 차라리 지금처럼 시원하게 울 수 있기를 바랐는지도 모른다. 그동안 모른 척 혹은 아닌 척 꾹꾹 눌러왔던 힘들다는 그 말이 드디어 입 밖으로 튀어나오는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자존심이 꽤 센 편이다. 또 조금은(사실은 많이) 자기 잘난 맛에 사는 자기애가 강한 사람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어떤 일을 하든 나름대로는 썩 잘해왔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내가 비록 마트 경험이 없다고 하더라도 열심히 하다 보면 시행착오는 조금 겪더라도 금방 어떻게든 익숙하게 잘할 줄 알았다. '처음엔 당연히 힘들어도' 몇 번 깨지다 보면 결국엔 일이 금방 손에 익을 거라 믿었다. 하지만 막상 시작하고 나니 이런 생각은 철부지의 착각이라는 것을 금방 깨달았다. 아무것도 몰랐던 철부지는 '처음엔 당연히 힘들어도'라는 말의 무게가 어느 정도로 무거운지 가늠하지 못했다.


출근을 하며 길을 건널 때면 그런 생각까지 들었다. 마치 사고인 것처럼 차에 살짝 치여버리면, 그럼 잠시나마 편해질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이 끝난 지 0.3초 만에 매장에서 꼭 해야 될 일들이 눈앞에 떠올랐다. 사고가 나면 온 몸에 깁스를 하고서라도 매장에 나와야 할 것 같았다. 그런 생각은 바로 접어버렸다.


함부로 아플 수도, 다쳐서도 안됐다.


모든 사람은 그럴싸한 계획을 가지고 있다. 처맞기 전까지는

모든 사람은 그럴싸한 계획을 가지고 있다. 처맞기 전까지는
(Everybody has a plan until they get punched in the face)

- 마이크 타이슨

그래 나도 나름대로는 계획이란 게 있었다. 온라인에서 얻을 수 있는 판매 데이터나 최신 유통 트렌드를 분석하며 나름의 판매전략을 고민했다. 색다른 마케팅 전략이라든지 정기구독 같은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이라든지 동네 마트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아이템들도 열심히 준비했다. 준비를 철저히 했다고 생각했고 자신만만했다. 뭘 몰랐기 때문이다.


실제로 장사를 시작하자 내가 생각지도 못한 문제들이 눈앞에 쏟아지기 시작했다. 아주 작게는 행사 제품을 어디에 어떻게 진열할 지부터 선도가 떨어진 제품은 원가보다 싸게라도 판매해야 할지 아니면 폐기 처분해야 할지. 할인행사를 한다면 어느 정도 가격이 적정할지. 할인으로  정도 손실을 입어도 괜찮은지. 빈번한 할인행사로 인해 고객들이 할인가를 정상가로 받아들이지는 않을지 등 내가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문제들이 파도처럼 연속적으로 나를 덮쳤다.


회사에 다닐 때는 내 업무만 잘하면 됐다. 하지만 장사는 청소부터 손실 예측까지 아주 사소하고 작은 일부터 비즈니스 연속성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일까지도 모두 내 업무였다. 게다가 내가 직접 움직이지 않으면 주병 하나도 누가 대신 채워주지 않는다. 회사에서는 어떻게든 나를 도와줄 동료, 선배, 팀장님이 있었지만 여기서 내 뒤에는 아무도 없었다. 고민도 결정도 실행도 온전히 나의 몫이라는 것을 이제야 알았다. 


모든 게 처음 하는 일이었다. 마치 이등병 때로 돌아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잘하고 싶은 욕심만 하늘 높이 찌르고 어떻게 하는 것이 잘하는 것인지를 전혀 알지 못했다. 누구도 내게 답을 알려줄 수 없었다. 내가 알아서 답을 찾아야만 했다. 하지만 아무것도 모르니까 아무 단서도 찾을 수 없었다. 계속해서 깜깜한 어둠 속을 엉금엉금 기어가며 손과 발을 허우적거리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나는 전혀 준비되지 않은 채로 급류에 휩쓸리고 말았다. 매 순간순간마다 어떻게든 결정을 내려야 할 일들이 너무도 많았다. 어떤 문제에 대해 깊이 생각할 시간이나 여유를 갖기도 전에 또 다른 문제가 닥쳤다. 문제를 입체적으로 파악하고 효과적인 대안들을 다각도로 비교한다는 것은 사치였다. 그러다 보니 어리바리한 결정을 연속 할 수밖에 없었다. 더 암담한 것은 그런 결정에 대해 '넌 20점짜리 결정을 했어'라고 누군가 알려주기라도 한다면 조금씩 고쳐가기라도 하겠건만, 순간순간 이뤄지는 나의 결정이 결과적으로 맞는지 틀리는지는 아무도 대답해줄 수 없었다는 것이다. 


어렸을 적 게임 룰도 이해 못하고 운에 모든 것을 맡긴 채 지뢰 찾기 게임을 하던 그 모습이 겹쳐 보였다. 결정의 순간마다 이번엔 지뢰가 터지진 않을까 불안에 떨며 선택을 연속할 뿐이었다. 그때와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지뢰 찾기는 언제든 재시작을 누르면 다시 시작할 수 있지만 현실세계는 그리 호락호락하게 다시 시작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부담감이 어깨를 더 강하게 짓눌렀다


본격적으로 장사를 시작하기 전, 온갖 데이터로 무장했다며 자신만만했던 나는 온데간데없고 한밤중에 밥 먹다 말고 소리 내서 엉엉 울고 있는 찌질한 나만 남아있었다. 자신만만했던 계획은 현실이라는 놈에게 쎄게 한 방 맞고 크게 틀어져 버렸다. 내게 허락된 그릇은 여기까지인가. 난 겨우 이거밖에 안 되는 인간이었나. 그런데 여태까지 그렇게 잘난 줄 알고 허세 부리고 다닌 건가. 나는 정말 이것조차 감당할 깜냥이 안 되는 건가. 그런 생각들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스스로에 대한 자책과 앞날에 대한 불안함, 그리고 동시에 당장 해결해야 되는 일들에 대한 부담감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나 혼자 견디기에는 그 무게가 너무 무거웠다. 그래서 나는 울었다. 아니 울 수밖에 없었다.


온 힘을 다해서 열심히 울다 보니 예전에도 혼자 잘난 줄 알고 멋모르고 날뛰다 벽에 가로막혀 좌절했을 때가 생각났다. 그 때 들었던 생각은 내가 겨우 말 안장에 몇 번 앉아봤다고해서 내가 진짜로 말을 탈 줄 아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래 이번에도 지금까지 잘 해왔다고 생각한 건 겨우 말안장에 앉는 법 밖에 안됐구나. 그런데도 나는 또 멍청하게 내가 말을 잘 탄다고 생각했고 심지어 어떤 야생마의 등에라도 오를 수 있다고 자만했구나. 말 등에서 처참하게 떨어지고서야 나는 내가 조랑말 타는 법도 제대로 깨우치지 못한 애송이라는 것을 자각할 수 있었다. 내가 아마추어임을 인정하자 자존심은 많이 상했지만 마음은 조금 편해졌다. 그제야 눈물이 멈추고 머리가 맑아졌다.



길은 걸어가면서 만들어진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마추어였으니 주변의 선배들에게 최대한 조언을 얻기 위해 돌아다녔다. 하지만, 100명의 사람에게 물으면 돌아오는 대답은 100개였다. 결국 남의 이야기는 참고할 수밖에 없었다. 그 누구에게도 정답이나 힌트를 구할 수 없다면 나 스스로를 다시 한번 믿어보는 수밖에 없었다. 망할 때 망하더라도 나는 내 방식으로 망해야 했다. 그래야 후회가 다는 확신이 들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어떻게든 내 방식대로 뚜벅뚜벅 걸어가는 일뿐이었다.


장자는 도행지이성(道行之而成)이라고 했다. 길은 걸어가면서 만들어진다. 일단 조금씩 한 발 한 발 나아가자. 누가 뭐라고해도 내 길은 내가 직접 걸어가면서 만들어 보겠다. 지금은 구체적이고 논리적인 근거가 없다 할지라도 내가 가진 선택지는 많지 않았다. 이대로 불안감과 중압감이 주는 무게에 눌려 여기서 쓰러지든가 아니면 어떻게든 앞으로 나아가든가. 망할 때 망하더라도, 아무리 지금 허덕거리고 있다 하더라도 여기서 주저앉아서 망하고 싶지는 않았다.


조금 숨을 돌려 책을 읽을 수 있게 됐을 때, 내게 위로가 돼준 구절이 있었다.

CEO가 겪는 첫 번째 문제는 CEO가 되어서야 CEO가 되는 법을 배운다는 점이다. 관리자나 임원 또는 다른 역할을 수행하면서 쌓은 훈련이 실제 회사를 경영할 수 있도록 당신을 준비시켜 주지는 못한다. 회사를 경영할 수 있도록 준비하는 유일한 방법은 실제로 회사를 경영하는 것이다.

하드 씽, 벤 호로위츠

그래 태어나면서부터 CEO인 사람은 없다. 정주영 회장님도, 이병철 회장님도 태어나면서부터 회장님은 아니었다. 지금은 전국구 빵집이 된 이성당도 분명히 시작부터 지금의 이성당은 아니었다. 큰 회사를 다니면, 경영학을 열심히 공부하면 경영을 배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지만 아니었다. 회사를 경영하는 법을 배우는 유일한 방법은 직접 회사를 경영해보는 것이다. 해보기 전에는 절대 알 수가 없었다. 경영으로 보면 나는 이제 갓 태어난 신생아 수준이다. 걸음마를 떼며 무릎도 깨 먹고 이마도 깨 먹으면서 겨우겨우 걷는 법을 배워야 했다. 그러니 내가 아마추어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해도 전혀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오스트리아의 철학자 마르틴 부버는 '방황한다고 길을 잃은 것은 아니다. 모든 여행에는 자신도 모르는 비밀스러운 목적지가 있다'라고 말했다. 이 길을 가며 내가 얼마나 더 깨질지, 얼마나 길을 더 잃어버릴지는 아직 전혀 알 수 없지만, 나는 그 과정 과정에 비밀스러운 목적지가 있을 것이라고 믿기로 했다. 그리고 언젠가는 오늘을 돌아보며 '그때는 그랬지'라며 웃을 수 있는 날을 기다리며 다시 돌아오지 않을 이 여행을 억지로라도 더 즐겨보기로 마음먹었다. 물론 마음을 새로 먹었다고 지금까지 나를 누르던 중압감과 압박감이 기적처럼 씻은 듯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하지만 결심을 하면 할수록 마음은 조금씩 더 편안해졌다. 힘껏 울고 나니 그래도 머리는 맑아지고 한 발 한 발 새로 내딛을 용기도 생겼다.


너무 열심히 울었는지 다시 배가 고파졌다.

시원하게 세수 한 번 하고 와서 퉁퉁 부은 눈으로 남은 밥을 맛있게 먹었다.

죽어라 죽어라 해도 역시 사람 살 길은 항상 열려있나 보다 라고 생각하며 혼자 피식 웃었다.


울다가 웃으면 안 된다 그랬는데.

오늘은 어떤 의미로든 크게 기억에 남을 날이 될 것 같다.



* 4월 3일 오마이뉴스 메인 기사 중 하나로 선택된 인터뷰입니다. 글쓰는 소상공인에 대해 더 알고싶은 분은 아래 링크를 참고해주세요 :)


"대기업 사표 내고 왜 마트를?" 이 질문에 답하다

https://m.news.naver.com/read.nhn?mode=LSD&sid1=001&oid=047&aid=0002222454



Executive Summary :
오빠랑 지게차 타러 갈래? (안정적 기름집 김 씨는 왜 불안정적인 마트삼촌 김씨가 되었을까) 


1부 - 대퇴사시대

0화 : 대퇴사시대, 도대체 왜 퇴사하세요?

1화 : Professionalism, 멋있잖아요

2화 : 노인의 얼굴에 나이테 대신 동심이 내린 이유

3화 : 내가 만난 '난놈'들의 공통점

4화 : 진짜 히치하이커는 엄지를 들지 않는다

5화 : 틀린 인생은 없어 다르게 살아도 괜찮아

6화 : 꿈을 강요하는 사회

7화 : 일출 보러 가다가 퇴사결심

8화 : 새장 속의 새는 새가 아니다(Brunch Editor's pick)

9화 : 함께 걷는 것만으로도 위안이 된다

10화 : 사직서를 준비하는 네가 알면 좋을 세 가지


2부 - 소상공인 라이프 소상히 알려드립니다.

11화 : 가라앉을 것인가 헤엄칠 것인가

12화 : 고객관리의 핵심은 메아리다

13화 : 그대, 존경받아 마땅한

14화 : 네비 있으세요?

15화 : 이 길로 가는 게 제대로 가는 걸까

16화 : 행복하자. 아프지말고.

17화 : 영민할 것인가 따뜻할 것인가

18화 : 우리 동네에서 가장 소중한 가게

19화 : 모범생 남 대리가 사업을 말아먹은 이유는

20화 : 칼퇴할 수 있고 주말근무 없으면 워라밸일까?(Brunch Editor's pick)

21화 : 왜 장사하는가?

22화 : 이 가게, 한 달에 얼마 벌까?

23화 : 사장님, 이렇게 팔아서 남아요? - 박리다매 경제학

24화 : 진상의 평범성(Brunch Editor's Pick)

25화 : 가장 오래된 빵집, 이성당이 잘 나가는 이유

26화 : 유해진에게 배우는 싸가지경영

27화 : 무른 귤과 아버지

28화 : 백종원이 말하는 장사 마인드

29화 :  이 식당은 50분만 일하면 한끼가 무료입니다

감사인사 : 꿈 하나를 이루게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이성당 사장님을 만났어요)

30화 : 성심당은 파리바게뜨가 부러울까?

31화 : 그 자켓을 사지 말라던 파타고니아의 오랜 진심

감사인사 : 또 하나의 꿈이 이뤄졌습니다 온 마음을 다해 감사합니다

32화 : 어쩌다 대기업 그만두고 마트를 하게 됐어요?(Brunch Editor's Pick)

33화 : 울었다. 밥을 먹다 울었다.

34화 : 쿠팡의 시대, 동네마트 생존전략

35화 : 그렇게 마트가 된다

36화 : 가족같이 일하기 vs 가족이랑 일하기

37화 : 우리 동네 가장 소중한 가게가 되는 장사법

38화 : 현직 마트 삼촌입니다. 질문 답변드립니다

39화 : 군산에서 장사한다는 것

40화 : 사업... 나도 할 수 있을까

이전 06화 어쩌다 대기업 그만두고 마트를 하게 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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