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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진 May 17. 2024

책속에서_부지런한 사랑

184

우리는 글쓰기의 속성 중 하나를 알 것 같았다.

글쓰기는 게으르고 이기적인 우리를 결코 가만히

두지 않았다. 다른 이의 눈으로도 세상을 보자고,

스스로에게 갇히지 말자고 글쓰기는 설득했다.

내 속에 나만 너무도 많지는 않도록, 내 속에

당신 쉴 곳도 있도록, 여러 편의 글을 쓰는 사이

우리에게는 체력이 붙었다. 부지런히 쓸 체력과

부지런히 사랑할 체력. 이 부드러운 체력이 우리들

자신뿐 아니라 세계를 수호한다고 나는 믿는다.  

[이슬아, 부지런한 사랑, 7]     



 185    

스물아홉 살인 지금은 더이상 재능에 관해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게 된 지 오래다.

꾸준함 없는 재능이 어떻게 힘을 잃는지,

재능 없는 꾸준함이 의외로 얼마나 막강한지

알게 되어서다. 재능과 꾸준함을 동시에 갖춘

사람은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창작을 할 테지만

나는 타고나지 않은 것에 관해, 후천적인 노력에

관해 더 열심히 말하고 싶다. 재능은 선택할 수

없지만 꾸준함은 선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10년 전의 글쓰기 수업에서도 그랬다.

잘 쓰는 애도 매번 잘 쓰지는 않았다. 잘 못 쓰는

애도 매번 잘 못 쓰지는 않았다. 다들 잘 썼다

잘 못 썼다를 반복하면서 수업에 나왔다. 꾸준히

출석하는 애는 어김없이 실력이 늘었다. 계속 쓰는데

나아지지 않는 애는 없었다.  

[이슬아, 부지런한 사랑, 24]      



186   

나의 학생들이 소년의 마음으로 쓴 소년의

글에서 벗어나려는 순간을 종종 본다.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면 알아챌 수 있다.

어떤 얘기를 하려다 말 때, 말 못 할 이유로

당장의 솔직함을 포기할 때, 남 탓만 할 수

없을 때, 가장 원망스러운 건 자기 자신일 때,

아이들은 복잡한 마음으로 문장을 썼다가

지우고 고친다. 그렇게 쓴 것들은 아주 조금

노인의 문장처럼 보인다.  

[이슬아, 부지런한 사랑, 46]     



187

아마도 너는 이제부터 더 깊고 좋은 글을

쓸 거야. 하지만 마음 아플 일이 더 많아질 거야.

더 많은 게 보이니까. 보이면 헤아리게 되니까

속으로만 생각한다.

[이슬아, 부지런한 사랑, 50]          



188

조이한은 내 수업이 끝나기만을 기다리는

학생이었지만 나는 글쓰기 교사여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의 거짓말을 수호하는 과목은

글쓰기가 유일하기 때문이다.

“모두가 그저 각자 몫의 삶만 산다면 신화 같은

것은 필요하지 않을 것”이라고 조지 캠벨은 말했다.

우리는 자신과 세상을 죄다 이해하기가 벅차서

허구를 이야기하기도 한다. 좋은 거짓말에는

빛도 어둠도 풍부하게 담겨 있다. 그와 함께

지어낸 거짓말로 진실 쪽을 가리키고 싶었다.  

[이슬아, 부지런한 사랑, 54]          



189     

무심코 지나친 남의 혼잣말조차도

다시 기억하는 것. 나 아닌 사람의

고민도 새삼 곱씹는 것. 아이들이

주어를 타인으로 늘려나가며 잠깐씩

확장되고 연결되는 모습을 수업에서

목격하곤 한다.

[이슬아, 부지런한 사랑, 72]    



190           

자기 모습이 어떻게 보이든 별 관심 없던

시절은 그렇게 막을 내린다. 아이는 이제

자의식의 축복과 저주 속에서 한층 더 복잡한

삶을 살아갈 것이다. 내 눈에 비친 내 모습과

남의 눈에 비친 내 모습을 신경쓰며,

내가 바라는 나와 실제 나 사이의 괴리를 수없이

느끼며 자라날 것이다. 누구도 그 변화를 늦추거나

멈출 수 없다.

[이슬아, 부지런한 사랑, 79]     



191

글쓰기는 대부분 그런 순간에 시작되는 것 같아.

하고 싶었는데 못한 말들로부터 혹은 안 했으면

좋았을 텐데 괜히 내뱉은 말들로부터.

[이슬아, 부지런한 사랑, 91]         



192

영화 <매니페스토>에는 한 글쓰기 교사가

등장한다. 그는 칠판에 “독창적인 것은 없어

Nothing is original”라고 적은 뒤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독창적인 것은 없다. 어디서든

훔쳐 올 수 있어. 영감을 주거나 상상력을

자극하는 거라면 뭐든지 얼마든지 집어삼켜.

옛날 영화, 요즘 영화, 음악, 책, 그림, 사진,

시, 꿈, 마구잡이 대화, 건물, 구름의 모양,

고인 물, 빛과 그림자도 좋아. 너희 영혼에

바로 와 닿는 게 있다면 거기서 훔쳐오는 거야.

독창성은 존재하지 않으니까 훔쳤다는 걸

숨길 필요 없어. 원한다면 얼마든지 기념해도 좋아.”

[이슬아, 부지런한 사랑, 136]          



193

건전한 섹스 얘기란 무엇인가……

친밀하고 편안하면서도 무례하지 않은

분위기에서의 섹스 얘기일까. 떳떳해야만

좋은 섹스인가. 수치심을 즐길 유일한

장르이기도 하지 않나. 아무튼 섹스 앞에 붙는

‘건전한’이라는 형용사는 어딘가 우스웠다.

[이슬아, 부지런한 사랑, 152]          



194

그러나 사랑하는 친구의 대타로 뛰는

첫 알바 날에 가장 아끼는 티셔츠를

골라 입는 도혜의 마음을 우리는

그려볼 수 있다. 윤이 덕분에 도혜는

처음으로 자신의 있음이 부끄러워졌다.

결여된 것들을 통해 윤이가 얼마나

많은 것을 일찌감치 배웠는지 보았기

때문이다. 신형철 평론가의 책

『정확한 사랑의 실험,(마음산책, 2014)에

따르면 욕망의 세계에서는 우리가 무엇을

갖고 있는지가 중요하지만, 사랑의 세계에서는

우리가 무엇을 갖고 있지 않은지가 중요해진다.

도혜가 윤이를 좋아하다가 자신이 무엇에

서툰지 알아가게 되는 과정처럼 말이다.

어떤 사랑은 나를 더 사랑하게 만들기보다

내 안의 결여를 인지하도록 이끈다.

[이슬아, 부지런한 사랑, 169]



2024. 5.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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