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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욱 Jun 16. 2016

밤을 위해 존재하는 낮

(2016.02.07 in Czech Republic, Prague)

'성'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들이 있다. 회백색의 커다란 벽돌로 쌓아 올린 성벽과, 절로 고개를 치켜들게 만드는 뾰족한 성탑과, 촤르륵 소리를 내며 내려오는 육중한 철문 같은 것들. 그리고 그런 장소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공주님과 기사들의 이야기까지.


그러나 프라하 성은 내가 생각했던 이런 이미지들과는 달랐다. 성은 하나의 건축물이 아니라 복합단지의 개념이었다. 옛날 조선시대에 한양의 4대문 안처럼, 프라하 성은 성벽 안 쪽에 만들어진 일종의 작은 마을을 가리키는 단어였다.


프라하 성 안에 있는 황궁은 평범한 건물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오히려 멀리서 프라하 성이라 생각했던 뾰족하고 높은 첨탑의 주인이 사실은 성이 아니라 성 비투스 성당이었다는 걸, 프라하 성에 도착해서야 비로소 알 수 있었다. 성당의 높고 웅장한 첨탑은 신비로운 분위기를 뿜어내며 사람을 끌어당기고 있었다. 나는 자연스럽게 그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성 비투스 성당은 들어서기 전부터 나를 압도했다. 성당은 목을 아무리 젖혀도 쉽게 볼 수 없을 정도로 높았다. 입구에서부터 성당 주변을 따라 길게 늘어선 줄 속에서 한참을 기다리다 들어선 내부는 성당 외부의 모습이 괜한 허세가 아니었음을 여지없이 보여줬다. 바티칸의 성 베드로 성당만큼이나 인상적인 압도감이었다.

성 비투스 대성당의 내부로 들어서자, 성당의 압도적인 규모와 함께, 햇살을 받아 형형색색 빛나는 스테인드 글라스들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이 수많은 스테인드 글라스 중에서, 유달리 그림체가 독특한 창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이 성당의 스테인드 글라스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알폰스 무하의 작품이었다.


알폰스 무하는 체코의 대표적인 화가임과 동시에, 아르누보라는 예술 사조의 대표적인 화가다. 그의 그림들을 보면 한눈에 세련된 장식미와 화려한 색감이 특징임을 알아볼 수 있는데, 성 비투스 대성당의 스테인드 글라스에서도 그런 그의 스타일이 유감없이 드러나고 있었다. 무하가 그린 대성당의 창문은 화려했고, 햇살은 세상의 모든 색을 표현 해낸듯한 유리를 찬란하게 비추고 있었다.

성 비투스 대성당은 그야말로 화려함의 극치였다. 도시에 어둠이 내리고 불빛이 켜졌을 때, 그 화려한 야경에 넋을 잃곤 했던 프라하에서, 성당은 유일하게 한낮에도 화려함을 느낄 수 있었던 곳이었다. 스테인드 글라스 외에도 은으로 조각된 조각상이나, 거대한 파이프 오르간, 각종 성인들의 조각상들은 과거 보헤미아 왕국의 위상을 여지없이 보여주고 있었다.

한참을 구경하고 성당의 뒤편으로 나오자, 다시 성당의 웅장한 외관이 내 눈앞에 나타났다. 그 모습은 성당이라기보다는 차라리 하나의 요새에 가까웠다. 날렵해 보이면서도 어쩐지 둔하게 느껴지는 외관은, 성당에서 아주 멀리 떨어졌을 때라야 카메라에 비로소 담을 수 있을 만큼 거대했다. 왜 저 멀리 블타바 강 건너편에서도 이 성당이 보였는지, 그리고 왜 내가 이 성당을 보며 성이라고 생각했는지를 다시금 알 수 있었다.

프라하 성 안쪽에는 성 비투스 대성당 외에도 황금소로, 구황궁, 왕실 정원, 그리고 크고 작은 성당 등이 자리하고 있었다.


황금소로는 일종의 빈민촌과 같은 곳인데, 연금술사들과 금속 세공인들이 모여 살기 시작하면서 황금소로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황금소로 안에 다닥다닥 붙어있는 집들은 마치 소인국에 온 듯한 느낌이 들 정도로 작았다. 대문은 허리를 숙여야 지나갈 수 있었고, 집 안은 관광객 두 세명이 다니기도 불편할 정도였다. 황금소로에 오기 전 들렀던 성 비투스 성당의 압도적인 크기와는 너무나도 대조적이었다.


문득, 생뚱맞게도 도곡동의 타워팰리스와 구룡마을이 떠올랐다. 하늘을 향해 끝없는 줄 모르고 솟구쳐있는 건물과, 땅과 가장 가까운 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어쩌면, 100년 전 8200km 떨어진 곳에서 살아가던 보헤미안의 삶과, 2016년을 살아가는 한국인의 삶의 본질은 크게 다르지 않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사람 사는 모습이 결국은 다 비슷비슷한 것은 아닐까- 뭐 그런 생각들.

그러나 한 개인의 하루하루는 어떤 장소에 어떤 모습으로 있느냐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 저런 생각을 하며 걷던 거리가 종로 1가였다면 그다지 특별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지만, 내가 걷던 곳은 프라하의 황금소로였다. 눈 앞에 보이는 모든 풍경은 낯설었고 피부에 와 닿는 프라하의 공기는 생경했다.

프라하 성을 구경한 뒤 말라스트라나 거리를 향해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그곳은 체코의 국민작가이자 세계적인 작가 '얀 네루다'의 <말라스트라나 이야기>라는 단편집의 배경이 된 장소였다. 체코와 프라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던 나는 이 책을 통해 프라하라는 도시에 대해, 그리고 말라스트라나라는 거리에 대해 이 도시에 오기 전, 어렴풋하게나마 상상할 수 있었다.


<말라스트라나 이야기>속 소시민들의 이야기들은, 소설보다는 어쩐지 동화에 더 가까운 느낌이었다. 실제 말라스트라나 거리의 모습은 동화 속 마을보다는 좀 더 현실적인 느낌이었지만,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며 소설 속 이야기들을 떠올려보기도 하고, 골목마다 새겨진 이야기들을 상상해보기도 하며 시간을 보냈다. 동화 같은 소설의 배경이 되기엔 충분한 거리였다.

말라스트라나 거리를 걸은 뒤, 다시 까를교를 건너 돌아왔다. 주위는 조금씩 어두워지고 있었다. 해가 지면, 내가 기대하던 프라하의 밤을 볼 수 있을 것이라는 사실에 조금씩 흥분됐다. 프라하에서는 늘 낮보다 밤이 더 기다려졌다.

프라하를 걸으면 걸을수록, 어떻게 이런 도시가 있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곳은 2016년에 사는 내가 과거로 시간여행을 떠나게 만드는 곳이었다. 낡았지만 옛 프라하의 모습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집들과, 고려 청자색의 돔 지붕을 배경으로 도로 위를 달리는 트램들과, 18세기의 복장을 한 채로 태연스럽게 거리를 걸어가는 여인까지. 눈앞에 나타난 그녀의 등장으로 내가 걷던 거리는 순식간에 17세기나 18세기 즈음의 그 어딘가로 이동했다.


놀라운 점은, 그녀의 복식이 주변 풍경과 전혀 위화감 없이 어울리고 있다는 점이었다. 프라하를 보고 왜 중세시대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도시라고 하는지, 그제야 정확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곳은 오히려 화려한 레이스 장식이 가득한 치마를 한껏 부풀린 바로크나 로코코풍의 귀부인 드레스와, 길게 땋은 머리 모양의 가발을 쓴 남자들의 모습이 더 잘 어울리는 곳이었다. 프라하 어느 극장의 오페라 배우였을 그녀 덕에, 나는 잠시나마 시간여행을 떠나 볼 수 있었다. 잊히지 않는 장면이었다.


뜻하지 않게 길거리에서 귀부인을 접하니, 프라하라는 도시에 어떤 매력이 더 숨어있을지 궁금해졌다. 역시 여행은 놀라움과 우연, 그리고 뜻하지 않은 즐거움이 가득했다.

하벨 시장은 순수하게 프라하에 오지 못한 어머니께서 꼭 한번 가보라고 하셔서 들렀던 곳이었다. 어떤 이유로 어머니가 이 장소에 꽂혔는지는 전혀 알 수 없었지만, 그곳은 아주 작은 시장이었다. 소박한 사람들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곳이기도 했지만, 그저 그런 관광상품 같은 물품들이 대다수를 이루고 있는 곳이었다. 간식이라도 사 먹을 수 있을까 싶어 들렀던 곳이었지만, 별다른 수확 없이 나는 프라하의 밤을 기다리기 위해 부지런히 발을 움직였다.

첫째 날, 프라하의 야경을 감상할 곳은 바로 화약탑이었다. 이곳은 프라하의 구시가지와 신시가지를 나누는 경계로, 이전에는 성문과 같은 역할을 하는 곳이었다고 한다. 거뭇한 화약의 흔적들을 보면 누가 봐도 화약탑임을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 주변은 굉장한 번화가여서, 근처에 가는 순간 따로 떨어져 나와 있는 듯한 느낌의 이 탑에 저절로 눈이 갈 수밖에 없었다.


화약탑 위로 올라가자 저 멀리서 태양이 지며 노을을 만들어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날은 아직 완전히 어둡지 않았다. 해 질 녘의 프라하는 차분했고, 화약탑 위는 고요했다. 다행히도 프라하의 2월은 생각만큼 춥지 않았다. 살을 베는 듯이 날카로운 칼바람 대신, 차가운 듯 시원한 바람이 내 얼굴을 스치며 지나갔다. 해지는 하늘과 바람, 그 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시간이 한 시간쯤 흘렀지만, 밤은 생각보다 천천히 찾아왔다. 거리엔 오렌지빛 가로등이 하나 둘 켜지기 시작했고, 저 멀리 프라하성에도 불빛이 들어왔지만, 도시엔 아직 완전한 어둠이 내리지 않았다. 거리가 주황빛으로 천천히 물들며, 낮과는 전혀 다른 색으로 갈아입는 프라하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것도 나쁘진 않았다. 그 순간, 빛은 곧 기다림의 동의어였다.

프라하에서 낮은 오로지 밤을 위해 존재했다. 도시에 완연한 어둠이 내리면, 해 질 녘의 푸르스름한 윤곽을 밝히는 불빛이 하나 둘 켜졌다. 그 속에서 건물들은 저 혼자 우뚝 솟아있었고, 오렌지색 거리에는 유럽의 3대 야경을 자랑한다는 도시를 보기 위해 쏟아져나온 관광객들과, 그들을 붙잡는 호객꾼들, 그리고 이런 일상에 넌더리가 난 듯한 주민들이 한데 뒤섞여 있었다. 그 풍경들은 낮과는 다른 밤의 생명력을 불어넣었다. 프라하는, 밤의 도시이자 빛의 도시였다.


결국 프라하에서 내가 할 일은 오로지 해가 지기만을 기다리기 위해 기다리는 일뿐이었다. 해가 지기 전에 도시 곳곳을 쏘다니면, 어느덧 사위가 어둑해지곤 했다. 나는 그 어둠 속에서 푸른빛과 오렌지 빛이 섞인 도시를 하염없이 바라보곤 했다.


해가 지기를 기다리는 것 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던 도시에서, 낮의 시간은 오로지 밤을 위해 존재할 뿐이었다. 프라하에서 나의 시간은, 밤을 위해 존재했다.



저의 이전 글들은 아래 목록을 참고하시면 좋을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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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1 - 낭만이 여행자의 일이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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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2 - 여행의 시작, 그 설렘을 안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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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런던

1. 나는 홀로 주책 맞게 설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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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그들 각자의 여행 방식

https://brunch.co.kr/@framingtheworld/7

3. 어찌할 수 없는 외로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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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내가 그 곳에 섰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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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식도락의 화성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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