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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욱 Aug 01. 2016

낮술과 여행에 관한 상대성이론

(2016.02.08 in Czech Republic, Prague)


세상 모든 도시에는 그곳을 여행의 목적지로 선택한 사람들의 기대가 살고 있다. 몽골 초원의 별이 쏟아지는 밤하늘과, 에펠탑을 바라보며 먹는 달콤한 디저트와, 제주도의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바다 같은. 세상 모든 도시엔 그곳에 여행을 왔거나, 여행을 떠날 예정인 사람들의 숫자만큼 기대들이 존재한다. 이런 의미에서 여행은, 무언가에 기대를 품는 일이라고도 할 수 있다.


프라하는 야경에 대한 기대가 가득한 도시다.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프라하는 '유럽의 3대 야경'같은 타이틀로 잘 알려져 있다. 나 역시 프라하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 기대했던 도시의 모습은, 어두운 밤거리를 밝히는 오렌지색 조명의 향연들이었다. 그렇게 도착한 프라하에서의 하루는 밤을 위해 위해 존재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밤을 기다리며 중세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거리를 걷고, 맛있는 맥주를 마시며, 뜨르들로를 사 먹거나 알폰스 무하의 작품을 감상하다 보면, 유럽의 겨울 해는 금방 저물었다. 사위가 어두워지면, 그제야 나는 발을 조금 더 부지런히 움직여 높은 곳으로 향했다. 그렇게 부지런히 움직여 도착한 곳에서 도시를 내려다보면, 어두워진 프라하엔 반짝이는 불빛들이 내려앉아있었다. 그렇게 첫째날 마주한 프라하의 반짝이던 야경은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프라하는 곧 나에게 야경의 동의어가 되었다.


비록 야경에 끌려 이 도시에 오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프라하에 볼 것이 야경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고요하고 이국적인 프라하의 골목은 먼 이국에서 온 여행자의 눈길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100여 년 전 과거의 보헤미안들이 만들어낸 도시의 모습은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도시의 모습 자체도 아름다웠지만 그보다 더 놀라웠던 사실은, 100년이라는 세월을 지나서도 도시의 모습이 거의 그대로 유지되고 보존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옛 모습이 거의 그대로 보존되고 있는 거리를 보고 있으면, 자연스레 내가 살고 있는 도시와 비교하게 되곤 했다. 어쩌면 그래서 한국인들이 유난히 프라하로 많이 오는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나라는 과거보단 현재, 현재보다는 미래에 더 가치를 두는 나라였으므로.

프라하에서의 이틀째 날이었다. 저녁엔 오페라를 보기로 되어있었지만, 그 전까지의 내 하루는 아무런 계획 없이 텅 비어있었다. 계획 없는 여행자가 할 일이라곤 그저 걷는 일 뿐이었으므로, 나는 우선 숙소를 나와 맥주가 맛있다는 스트라호프 수도원으로 무작정 걸어갔다. 걸어가면서, 프라하에 온 모든 여행자들 중에 아마 가장 계획 없이 온 사람을 꼽자면 내가 열 손가락 안에 들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걸어가는 길에, 마침 영화'뷰티 인사이드'의 엔딩 장면을 블타바 강변에서 찍었던 것이 생각나 그곳에서 사진을 몇 장 찍었다. 영화에서는 블타바 강변의 모습과, 저 멀리 보이는 까를교와 비투스 대성당의 모습을 배경으로 키스하는 주인공들의 모습이 무척 인상적이었는데, 실제로 본 그곳의 모습은 평범하면서도 어수선한 느낌이었다. 생각보다 사람은 많이 지나다니지 않아 고요했지만, 그곳이 프라하가 아니었다면 그리 인상적이지 않을 풍경이었다.

스트라호프 수도원은 어제 둘러봤던 프라하 성을 지나 한참을 더 올라가야 하는 곳에 위치해있었다. 전날 둘러본 터라 이미 눈에 익은 프라하 성과 말라스트라나 거리를 지나면, 저 멀리 언덕에 소박하게 생긴 모습의 건물이 보였는데, 그 건물이 바로 스트라호프 수도원이었다. 구시가지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수도원의 풍경과, 안뜰의 이곳저곳 구경하던 나는 기왕 이 곳에 온 김에, 수도원의 도서관을 구경해보기로 했다.

스트라호프 수도원의 도서관은 철학의 방과 신학의 방 두 가지로 나뉘어 14만 권의 장서를 보관하고 있는 유서 깊은 도서관이었는데, 왠지 맥주만 마시려고 수도원에 오는 일이 어쩐지 좀 한심하게 느껴져서 구경하게 됐다. 도서관 내부는 오래된 책의 냄새와 함께 장서를 보관하고 있는 두 방의 화려한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비록 직접 철학의 방과 신학의 방에 들어갈 수는 없었지만, 구경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경외심을 불러일으키기엔 충분한 광경이었다. 내부 사진을 촬영하기 위해서는 돈을 더 내야 했지만, 돈을 내면서까지 촬영할 생각은 들지 않아 이내 밖으로 나왔다.

도서관 구경을 마친 뒤 나는 이곳을 방문한 주 목적이었던 맥주를 마시러 도서관 옆에 위치한 브루어리에 들어갔다. 내부에는 자리가 없으니 외부에 앉아서 마시라는 직원의 말에 살짝 당황했지만(겨울에 노천에서 맥주라니!), 맛있는 맥주 앞에서 두려울 것이 없었던 나는 자리를 잡고 앉아서 맥주를 주문했다. 우리나라보다 따뜻하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어쨌든 겨울이었던지라 노천에서 맥주를 마실 정도의 온도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스트라호프 수도원 맥주는 차가운 손을 비벼가며 먹는 수고로움조차 감수할 수 있을 정도로 맛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 곳의 맥주는 스트라호프 수도원 맥주라기보단, 스트라호프 수도원과 같은 정원에 Klaterni Pivovar라는 이름의 상업 양조장이 운영될 수 있도록 수도원 측에서 허가를 내준 것이라고 보는 편이 더 맞다. 맥주에 노베르트 성인의 이름을 딴 Sv. Norbert가 붙고, 스트라호프 수도원이 표기되어 있긴 하지만, 벨기에의 트라피스트 맥주처럼 수도사들이 양조 공정에 직접 관여하는 맥주는 아니기 때문이다. 공식적으로 트라피스트 맥주로 불리기 위해서는 실제 수도원 내부에서 수도사들에 의해 만들어져야 하기 때문에, 엄밀히는 수도원 맥주는 아닌 셈이다(아무렴 어떤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곳의 맥주 맛은 정말 최고였다). 그래서인지 이 곳의 맥주는 수도원 맥주 하면 흔히 생각나는 은은한 과일향과 씁쓸한 끝 맛으로 기억되는 트라피스트 계열의 맥주가 아닌, 앰버에일과 흑맥주를 팔고 있었다.

프라하에 다녀온 뒤로 가장 달라진 점을 꼽자면 흑맥주를 즐기게 됐다는 점이었는데, 그건 프라하에서 지금까지 마셔본 흑맥주와는 다른 내 취향의 흑맥주를 많이 마셨기 때문이었다. 이 양조장의 흑맥주는 바디감이 그리 강하지 않았고 탄산도 적당히 있어서, 맥주는 탄산이 많아야 제맛이라고 여기는 나 같은 사람에게도 잘 들어맞는 맥주였다. 전 세계적으로 대표적인 흑맥주로 여겨지는 기네스와는 다른 종류의 맛이었다.

뒤이어 시킨 앰버에일은 IPA처럼 쓴 맛이 강하지 않으면서도 은은한 캐러멜향과 찐득한 거품이 무척 인상적인 맛이었다. 흑맥주를 한 잔 마신 뒤에 아침 겸 점심을 먹기 위해 안주와 함께 주문했는데, 안주로 나온 햄과 고기가 너무 짰던 터라 특히 엠버에일의 묵직한 탄산과 향긋한 맛이 잘 어울렸다.


오전 11시라는, 비교적 이른 시간부터 맥주를 마셔 가게는 비교적 한산했는데, 맥주잔이 한잔 두 잔 쌓여갈수록 사람들이 점차 많아지기 시작했다. 이 곳에서 우연히 합석하게 된 한국인과 함께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며 정신없이 마시다 보니 어느덧 시간은 오후 2시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낮술도 아닌 브런치 술을 마신 셈이었다. 물론 적당한 취기에 추위는 언제 그랬냐는 듯 달아나고 없어진 뒤였다.


나는 평소에도 틈날 때마다 낮술을 즐기는 편이었다. 낮술에는 묘한 매력이 있었다. 술이란 보통 밤에 마시는 일이었으므로, 환한 대낮에 술을 마시는 일은 이미 그 자체로 일상적이지 않은 행위였다. 그렇게 낮에 술을 마시는 일은, 바쁘게 돌아가는 세상 속에서 나 혼자 떨어져 나와 있는 느낌을 주곤 했다. 테라스에 앉아 멍하지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고, 머리 위로 떨어지는 따뜻한 햇살을 느끼며 맥주를 한 모금 들이키면, 나를 둘러싼 시간만 느리게 돌아가는 듯이 느껴지곤 했다. 어쩐지 한량 같기도 하고 불량하기도 한 그 순간이 즐거워 대학교를 다닐 때도, 회사를 다닐 때도 나는 종종 테라스 있는 카페나 술집을 찾아 맥주 한잔씩을 하곤 했다. 뭐랄까, 낮술은 나라는 하찮은 존재가 세상의 권태와 무의미를 향해 날릴 수 있는 유쾌한 결정타와도 같았다. 결정적으로 낮에 마시는 술은 어쨌든 밤에 마시는 술보다는 항상 적당히, 기분 좋게 취할 수 있었다. 물론 그 술이 밤까지 지속되는 날에는 얘기가 달라졌지만.

맥주를 다 마신 나는, 합석한 사람과 짧은 인사를 나누고는 페트르진 전망대로 향했다. 사실 전망대라는 것들은 대게 거기서 거기인 경우가 많았지만, 어쨌든 내게 시간은 차고 넘쳐흘렀다. 적당히 오른 술기운을 떨칠 필요도 있었기에 나는 약간의 오르막길을 걸어 페트르진 전망대에 도착했다.

페트르진 전망대는 1891년 파리의 에펠탑을 모방해 1:5 비율로 축소해 만들어진 건축물이라고 한다. 가까이서 보면 에펠탑과 비슷하다는 느낌이 없지 않아 있긴 했지만, 왜 에펠탑이 처음에 파리 사람들에게 흉물스러운 철골 구조물로 평가받았는지 어렴풋하게나마 알 것도 같았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페트르진 전망대의 외관은 그리 인상적이지 않았다. 탑은 299개의 계단으로 되어있어 걸어 올라갈 수도 있다고 되어 있었는데, 차마 걸어 올라갈 엄두는 나지 않았던 나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는 편을 택했다. 엘리베이터는 둔탁한 소리를 내며 올라갔다. 영화에서나 보던 투박한 인상의 엘리베이터였다.


전망대에 도착해 오렌지색 지붕들이 가득한 프라하 시내를 바라보고 있으니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탑이 있는 언덕 위로 불어오는 겨울바람은 매섭게 몰아쳤지만, 풍경만큼은 놀라우리만치 고요하고 정적이었다. 프라하만이 보여줄 수 있는 풍경이자, 분위기였다. 세계 어느 도시도 이 정도 규모의 잘 보존된 역사적 풍경은 없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100년도 더 옛날의 보헤미안들이 이 언덕에 올라서도 나와 비슷한 풍경을 바라봤으리라는 비현실적인 생각은 시가지를 내려다보는 한없이 느긋한 여행자에게 이루 말할 수 없는 특별한 경험으로 다가왔다.


여행지에서의 시간은 일상 속의 시간과는 다른 속도와 방향을 지닌 채 흘러간다는 사실을 다시금 느꼈다.


한달여만에 글을 올립니다. 사진이나 글은 종종 인스타그램에 업데이트하곤 합니다. 글을 쓰는 속도가 느려졌는지, 이 글을 쓰는데에 생각보다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리네요.


https://www.instagram.com/jw_yoon_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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