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작소설
새벽부터 부슬부슬 봄비가 내렸다. 하루에 쓸쓸함이라는 맛이 가미된 것이다. 침대에 누워 작은 창 사이로 시야를 옮기니, 오직 흐르는 비와 정지된 시간만이 존재할 뿐인 이상한 장르의 영화가 상영되고 있었다.
남해 독일마을에서 맛보는 비는 과연 어떨까, 궁금했다. 이런 곳이라면 비름 흠뻑 맞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인다. 원두를 그라인더로 갈고 커피를 드립한 후, 식탁에 앉아 그 맛을 음미해봤다. 서울 흔한 카페에서 마시는 산미가 강하게 풍기는 가벼운 커피와 크게 다를 바 없었다. 거기에서도 여기에서도 커피는 커피라는 본래의 목적으로 존재할 뿐이다. 그렇다면 나라는 인간의 목적은 어디에 있을까. 내가 죽은 상태가 아닌 살아 있음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 그 자체가 목적에 해당되는 걸까, 단순히 운이 좋아서 살아 있는 거니까 그 운을 지탱하기 위해 여기가 아닌 바깥으로 목적을 찾아 떠나야 하는 걸까.
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그 소리가 공기 중으로 사라지기도 전에 연희가 문을 벌컥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일어났어요?”라고 인사하며 이미 어디론가 떠날 차비를 다 맞춰놓은 사람처럼 나를 불렀다. “네. 이렇게 일어나서 모닝커피를 흡입하는 중이죠. 그런데 노크하면서 동시에 문을 여는 사람이 어딨어요?”라고 내가 말하자, “여기 있잖아요? 됐죠? 노크하면서 동시에 문 여는 일을 해내는 사람 잘 봤죠? 처음 봤어요? 그렇다면 앞으로 자주 구경하게 될 거예요”라고 연희는 또다시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빨리 준비하고 나와요. 남자는 딱히 준비할 것도 없잖아요? 대충 아무거나 챙겨 입고 가방에 노트북과 민석씨가 그렇게 아끼는 <그리스인 조르바>도 넣고 하여튼 간 몽땅 챙겨 오면 되겠네요. 자 5분 드릴게요. 나 여기 소파에 앉아 있을 테니 짐 챙겨요” 그러더니 그녀는 <그리스인 조르바>를 신기한 물건이라도 되는 것처럼 만져보더니, 마치 시장에서 물건을 흥정이라도 하는 사람처럼 요리조리 그 물건을 뜯어봤다.
“아니, 이렇게 불쑥 오자마자 5분 내에 준비를 마치라니, 번갯불에 땅콩이라도 구워 먹는 거랍니까. 시간을 좀 달라고요. 아직 커피도 다 안 마셨는데…”
“시간 없어요. 차표 이미 예매해놨거든요. 7시 남해터미널에서 출발하는 버스예요. 지금 시간이 5:50분이니까, 나가서 택시 잡는 시간도 필요하고, 아 택시는 제가 콜 부를게요. 그럼 시간 아낄 수 있겠다. 5분이면 충분하죠?”
나는 그녀의 주문에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마시던 커피는 부어버리는 수밖에. 양치질을 대충하고 노트북과 그것에 달린 케이블 몇 가지 종류를 가방에 채워놓은 후, 빨랫줄에 널린 속옷을 얼른 챙긴 다음, 바로 백팩에 그것을 욱여넣었다. 시간을 확인하니 정확히 4분 40초가 흘러가 있었다. “준비 다 됐어요. 가시죠. 택시 불렀어요?”내가 말하자. “3분 후에 도착한대요”라고 연희가 대답했다.
모든 게 급작스럽다. 연희와의 만남부터가 그랬으니까. 시작도 마무리도 그렇게 마음대로 가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다. 나는 아무것도 내 의지대로 통제할 수 없다. 어느 순간 세상이 내 자율권을 건드리기 시작했으니까.
신발을 신고 문을 여는데 아직 햇살은 동쪽 끝에서 연기처럼 서서히 피어오르고 있었다. 얇은 바람막이 하나만으로 다시 서울과 맞서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지만, 딱히 내가 무방비 상태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나는 이 상황을 스스로 초래했다. 내가 원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니 실망할 필요도 좌절할 필요도 없다. 내 옆에는 연희라는 든든한 여자도 있지 않은가.
나는 걸음을 옮겨보기 시작했다. 아주 천천히 온 동네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대하는 사람처럼 모든 장면을 머릿속에 하나하나 각인시킬 태세로 유영하듯 걸었다. 조금 걸어가자 이미 도착한 택시 한 대가 보였다. 내가 먼저 뒷자리 안쪽에 탑승하고 그 이후 연희가 내 옆에 앉았다. 연희는 조금 가까이 밀착한 듯했다. 어쩌면 내 착각일지도... 서울에서 남해에 내려올 때보다 우린 한결 더 가까워진 것 같았다.
역시 택시비는 내가 치렀다. 카드 한도는 이제 고려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지난번 회사 퇴사할 때 받은 퇴직금 때문이었다. 그 정도의 비용이라면 서울에서 일을 하지도 않고 어쩌면 6개월 정도는 버틸 수 있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실업급여도 신청할 수 있으니, 더하여 이런저런 아르바이트까지 하게 되면 약 1년 정도를 버틸 수 있을 정도의 자금이 마련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걱정할 필요는 하나도 없었다.
남해로 내려올 때와 달리 연희와 나는 버스 안에서 거의 대화를 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연희도 나도 자신의 자리를 정확하게 찾아냈다. 나는 줄곧 창밖을 바라보며 지나간 풍경과 새롭게 나타나는 풍경의 차이점에 대하여, 그 다름에 내포된 의미들을 해석해내기 위해, 나름 분주했다. 그녀도 나도 우리에겐 서로 할 일이 놓여있던 것이다. 물론 그녀의 일은 내가 알 수 없다. 알 수 없어도 그녀가 분주하다는 건, 그녀의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렇게 우리는 택시와 시외버스를 이용해서 남부 터미널에 도착했다. 그러니까 우리는 시작 지점에서 어디론가 잠시 사라졌다가, 정해진 운명에 따라 다시 제자리로 환원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얼마나 많은 시간이 우리를 거쳐왔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시간이 생성되고 사라지기를 반복했지만, 시간은 서로에게 상대적이었다. 내 시간은 지체됐을까, 조급하게 흘러갔을까, 정지되어 있었을까, 나는 그 부분을 명확히 해석할 수 없었다.
남부 터미널에 내린 후, 우리는 서로의 연락처를 교환할 것인지 다시금 간단한 협상을 거친 후, 언제 어떻게 누가 먼저 연락 공세를 취할 것인가, 말 것인가, 이런 시시콜콜한 부분들까지 일일이 결정한 후 서로의 집으로 돌아갔다. 집에 도착했을 때, 내 집은 예상과 하나도 다를 바 없이 처음의 상태, 그러니까 마치 핵폭격을 받은 그 모양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인터넷을 뒤져 청소업체에 전화를 건 후,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정리할 수 있냐고 문의했고 그들은 예약이 밀려있어서 차주에나 가능하다고 해서, 나는 약간의 웃돈을 주고 오늘이라도 당장 작업해줄 수 없겠냐고 물었다. 그들은 웃돈이 개념적으로 타당하다면 당장이라도 가능하다고 화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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