묻따풀 2024: 함께 말 차리기
이 글은 최봉영 선생님이 쓰신 《“너 자신을 알라”》에 대해 묻고 따져 풀어 보는 글입니다.
소크라테스에 대한 친밀감은 생각해 보면 놀라운 일입니다.
01.
한국사람은 소크라테스의 이야기를 빌어서 걸핏하면 'Know yourself', 곧 “네 자신(自身)을 알라”라고 말한다. 사람들은 “네 자신을 알라”라는 말을 좇아서, 제 자신을 알게 되면, 저를 저답게 만들 수 있을 것처럼 생각한다. 이러니 사람들은 소크라테스를 ‘테스형’으로 부를 만큼 매우 가깝게 여기게 되었다.
어디에서 기인한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세뇌된 결과란 생각이 듭니다. 세뇌의 무서움은 세뇌되었다는 사실을 모른다는 점입니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세뇌당했다는 말을 들으면, 강한 거부감을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세뇌'에 대한 제 글을 다시 보면서 '교육도 마찬가지 아닌가?'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결국, 말의 뜻을 넓게 따져 묻지 않던 제 습관이 방산처럼 쌓여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일단, 다시 텍스트로 돌아갑니다.
02.
한국사람은 “Know yourself”에서 'yourself'를 '네 자신(自身)'으로 새기기 때문에 'yourself'가 가리키는 뜻을 또렷이 알기 어렵다. 'yourself'에서 ‘you’를 ‘너’로 새기는 것은 괜찮지만, ‘self’를 ‘자신(自身)’으로 새기면 뜻이 흐릿해진다. 사람들은 ‘자신(自身)’과 ‘자기(自己)’, ‘자성(自性)’, ‘자아(自我)’, ‘자체(自體)’ 따위를 아울러 쓰고 있어서 ‘자신(自身)“의 뜻을 또렷이 알기 어렵다. 한자를 배우지 않은 사람들은 ’자신(自身)‘을 ’그냥 그런 것‘으로 알고 쓴다.
저 역시 '자기 자신'이란 표현을 쓸 때, 둘 사이 차이를 분별하지 않았던 듯합니다. 그리고, 자성이란 말은 써 본 일이 없고, 자아는 자주 쓰지만 정의를 알고 있지 않습니다. 포기말[1]로 자아가 뭘까 표현해 보려 했지만, 시작도 못합니다.
03.
'yourself'에서 'self'를 한국말로 옮기면, ‘본바탕’ 또는 ‘본모습’을 뜻한다고 할 수 있다. 본바탕은 어떤 사람이 가진 본래의 바탕을 말하고, 본모습은 본래의 바탕이 온전하게 드러났을 때 볼 수 있는 본래의 모습을 말한다. “Know yourself”는 “너의 본바탕을 알라”라고 옮겨야 말뜻이 또렷이 드러날 수 있다
'너 자신을 알라'로 알려진 말인데, '너의 본바탕을 알라'가 옳다는 주장입니다. 이제 본바탕을 아는 일로 나아갑니다.
01.
누군가 나에게 “너의 본바탕을 알라”라고 말하는 것은 내가 나의 본바탕을 알아갈 수 있는 힘을 갖고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내가 나의 본바탕을 알아갈 수 있는 힘을 갖고 있지 않다면, “너의 본바탕을 알라”라고 말하는 것은 아무런 뜻이 없다.
02번은 01번처럼 명쾌하지는 않습니다.
02.
내가 나의 본바탕을 알아가는 것은 내가 말로써 생각을 펼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말로써 생각을 펼쳐서, ‘나’에 대한 생각을 할 수 있고, ‘나의 본바탕’에 대한 생각을 할 수 있고, 그리고 ‘나의 본바탕’을 묻고 따지고 푸는 일을 할 수 있다. 그런데 내가 말로써 생각을 펼칠 수 없으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01은 공리처럼 느껴지는 반면에, 02는 말이 본바탕을 이루는 요소일 때 성립하기 때문인 듯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본바탕은 말로 이뤄져 있다는 말이 공리처럼 느껴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반복해서 인용한 다발말을 읽다 보니, 이번에는 '알다'의 필수 요소가 '말'이라면 02번이 분명해질 듯합니다.
그래서, 표준국어대사전에서 '알다'를 찾아보았습니다. 12갈래의 뜻을 가진 동사입니다. '알다'의 뜻풀이와 말의 연관성을 살펴봅니다. 다음 풀이를 보면 '말'을 사용하지 않고도 '아는' 경우가 있기는 합니다.
「2」 어떤 사실이나 존재, 상태에 대해 의식이나 감각으로 깨닫거나 느끼다.
하지만, 사회적 활동 혹은 인간관계를 포함하는 순간 말없이는 '알다'라는 것이 성립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뒤이어 '알다'와 '이해'의 차이를 알기 위해 또 표준국어대사전 풀이를 찾아 읽어 보면서 또다시 <낱말의 뜻을 깊고 넓게 묻고 따지는 일의 소중함>에서 느낀 '낱말의 뜻을 깊고 넓게 묻고 따지지 않은 결과'를 제 머릿속 개념의 부실함 속에서 발견합니다.
계속 선생님의 글을 인용합니다.
04.
누군가 나에게 “너의 본바탕을 알라”라고 말하는 것은 내가 나의 본바탕을 알아가는 일을 하도록 깨우거나, 이끌거나, 부추기거나, 북돋우는 것이다.
다행스러운 점은 계속 매달리면 감을 잡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줏대와 잣대가 소크라테스의 명언과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이제야 눈치챕니다.
다음의 다발말[2]은 두 가지를 연상하게 합니다.
05.
내가 나의 본바탕을 알아가는 일은 나의 마음에 들어있는 온갖 것들의 바탕을 알아가는 일이다. 나는 마음에 들어있는 온갖 것들의 바탕을 알아야 나의 본바탕을 알아보는 일로 나아갈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일은 내가 나의 마음에 무엇이 어떻게 들어있는지, 갈피를 잡아서 하나하나 갈래를 나누어보는 일로써 이루어진다.
하나는 또(?) '인수분해'의 응용이라는 점입니다. 두 번째는 욕망을 이해하는 일과 관련이 있다는 깨달음입니다.
계속 이어갑니다.
01.
나의 마음은 나의 몸속에 깃들어 있는 것이지만, 몸과는 따로 하는 어떤 것으로 자리하고 있다. 몸과 마음은 함께 하면서 또한 따로 하는 것이다. 이런 까닭으로 언제나 늘 함께 하는 몸과 마음을 두고서 “몸 따로, 마음 따로”라고 말한다.
<데카르트의 오류>를 읽으며 익혔던 과학적 사실들의 조각이 떠오릅니다.
02.
나의 몸속에 깃들어 있는 마음은 안팎을 갖고 있다. 이러한 마음의 밖에는 몸이 자리하고 있고, 몸의 밖에는 바깥으로 끝없이 이어지는 누리가 펼쳐져 있다.
<말의 탄생: 녀겨서 니르기>에서 손때[3]를 묻힌 그림을 소환합니다.
머리가 마음의 안과 밖을 이어준다는 말에 사로잡힙니다.
03.
나의 몸속에 깃들어 있는 마음을 안팎으로 이어주는 것이 머리이다. 머리는 마음의 안에 있는 것과 마음의 밖에 있는 몸과 누리가 함께 할 수 있도록 이어주는 구실을 한다. 이런 까닭으로 나는 머리가 깨어 있지 않으면, 마음의 안에 있는 것과 마음의 밖에 있는 몸과 누리가 함께 하는 일을 할 수 없게 된다. 나는 마음을 잘 쓰기 위해서 머리를 잘 써서, 머리가 잘 굴러가고, 잘 돌아가도록 해야 한다.
마음을 잘 쓰기 위해서는 제대로 녀기는 일이 필요하다는 말로 바꿀 수도 있을 듯합니다. 여기서 멈추고 뒷부분은 다음 글에 맡겨야겠습니다.
[1] 왜 포기말인지는 <언어에 대한 일반이론>에서 일부 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2] 왜 다발말인지는 <언어에 대한 일반이론>에서 일부 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3] <학습법과 창의성 모두 기억이 핵심이다>에서 인용한 박문호 박사님의 말, '내 감정의 손때를 묻히라는 겁니다'에서 유래합니다.
2. 정신을 차리고 터박이 바탕 낱말을 또렷하게 따져 묻기
3. 말의 바탕치, 짜임새, 쓰임새, 펼침새 따위를 살피다
6. 말과 마디말에 대하여
10. 아이와 영어책을 읽다가 영어 문장의 차림을 짚어 봄
16. 낱말은 덩어리가 아니라 인수분해 하면 또렷해진다
17. 한국말 낱말 다시 분류하기: refactor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