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5
할아버지는 할머니의 나이가 여든둘인지,
여든하나인지 잘 모른다고 말하며 웃습니다.
할머니의 나이를 물어서 잘 모른다고 대답했으니
할아버지 당신의 나이를 물었더라도 잘 모른다고
대답했겠지요. 살다보면 그렇게 됩니다. 아무것도
셈하지 않고, 무엇도 바라지 않으며, 있는 그대로를
기쁘게 받아들이는 일. 살다 보면 사랑도 그렇게
완성될 겁니다.
[이병률,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 6]
216
양파 볶는 냄새는 세상의 모든 냄새를 담고 있다.
어둠과 그늘, 절벽의 햇살, 꽃잎이 짓이기며
빨아대는 습기, 간절한 한 사람의 안부,
그 모든 것을 담았다. 허기에 지쳐 집에 돌아오면
뭘 먹을 것인지 정하지도 않았으면서 양파를 볶던
때가 있었다. 먼 곳에서 긴 시간을 처절하게 살 때였다.
양파를 볶다가 소시지를 넣어 뒤적거리거나,
양파를 볶다가 물을 붓고 스파게티 면을 끓이기도 했다.
양파를 볶다가 부자가 되어야겠단 생각도 했고
양파를 볶다가 불을 끄고 시를 읽은 적도 있다. 그러면
채우는 느낌과 바닥을 내는 느낌이 내 몸에 동시에
배어들었다. 공간을 가득 채운 양파의 그것에는
그리운 냄새가 있었다. 절절한 곡예가 있다.
[이병률,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 9]
217
평범이란 말보다 큰 말이 세상에 또 있을까.
평범한 것처럼 남에게 폐가 되지 않고
들썩이지 않고 점잖으며 순하고 착한 무엇이
또 있을까.
[이병률,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 21]
218
파리에 백 년이 넘는 전통을 가진 소박한
빵집이 있다. 이 집은 바게트가 아주 유명한
집인데 빵맛의 비결은 특별한 게 없다고 하지만
빵반죽을 할 때, 그걸 조금 떼어서 남겨둔 다음,
다음번 반죽을 할 때 합치는 것이다.
(한번 빚은 반죽 덩어리를 모두 다 오븐에
굽지를 않고 반죽의 일부를 남겨 다음번 바게트를
반죽할 때 섞는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말하자면
백 년 된 기억이 조금씩 끊임없이 섞이면서
빵 맛을 고스란히 유지하고 있는 거란 이야기가 된다.
[이병률,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 24]
219
나는 이야기에 약하다. 이야기에 무너진다.
그래서 엿보고 엿듣고, 내 여행은 어쩌면
당신의 그런 일들을 받아 적는, 기록인 것이다.
[이병률,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 24]
220
어떤 카페가 좋아 자주 드나들게 되었는데
알고 보니 카페 기둥에 흰색 페인트를,
화장실 문에 흰색 페인트를 칠해놓은 게 마음에
들었던 거다. 사실 그 색이 좋아 카페의 분위기가
좋고 심지어 커피 맛도, 주인장의 얼굴까지도 좋다고
느낄 수 있는 것처럼 누군가를 좋아하는 일은
아주 사소한 부분들을 쌓아가는 것이다.
고로 당신이 좋다, 라는 말은 당신이 무슨 색인지
알고 싶다는 말이며 그 색깔을 나에게 조금이나마
나눠달라는 말이다. 그 색에 섞이겠다는 말이다.
[이병률,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 29]
221
낯선 나라에 도착하자마자 제일 먼저 배우게 되는
말은 '물'인 것 같다. 그 다음은 '고맙다'라는 말.
'물'은 나를 위한 말이고 '고맙다'라는 말은
누군가를 위한 말. 목말라서 죽을 것 같은
상태도 싫고 누군가와 눈빛도 나누지 않는
여행자가 되기는 싫다.
[이병률,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 31]
222
사람을 좋아하는 일은 그러네요. 내가 그 사람에게
어떻게 보이느냐의 '상태'를 자꾸자꾸 신경 쓰게 되는 것.
문득 갑자기 찾아오는 거더라구요. 가슴에 쿵 하고
돌 하나를 얹는 기분.
[이병률,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 39]
223
세상 끝 어딘가에 사랑이 있어 전속력으로 갔다가
사랑을 거두고 다시 세상의 끝으로 돌아오느라
더 이상 힘이 남아 있지 않은 상태 : 우리는 그것을
이별이라고 말하지만, 그렇게 하나에 모든 힘을
다 소진했을 때 그것을 또한 사랑이라 부른다.
[이병률,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 52]
224
사실 나이 든다는 게 괜찮을 때도 있더라구요.
묵직해져서 덜 흔들리고 덜 뒤돌아보고.
알게 되는 것도, 알아가는 것도 나이가 하는 일,
맞습니다.
[이병률,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 53]
2024. 6.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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