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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공간에 단어를 써놓는 것의 의미는 생각보다 크다.
‘친구’라고 쓰면 나는 그 단어 속으로 들어가 버리고 싶다.
‘무지개’라고 쓰면 그 단어를 보고 싶다. 그런 단어들은 아주 많다.
흑조, 4월의 눈, 호랑가시나무, 러시아식 꿀 커피.
나는 그 단어들을 여행의 단어들이라고 불렀다.
내 몸이 아니라 내 마음을 움직이는 단어들이었다.
각각의 단어들에는 사연이 있다. 그러나 내가 왼편에
얼마나 멋진 문장들을 옮겨 썼든 나의 삶은 오른쪽 페이지에
아직 완전히 쓰이지 않은 채로 있었다. 그 엉성한 생각들은
좀 더 정교해지고 정확해지다가 언젠가는 현실이 되어야 했다.
나는 점점 더 쓰이지 않은 페이지에 관심을 기울이는 데 익숙해졌다.
나는 과거보다는 미래를 생각하고 싶었다. 내 메모장의 여백이
현실보다 더 중요한 현실 같았다. 먼 훗날 나는 보르헤스가
이것을 아주 멋진 문장으로 표현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단어를 읽지만 그 단어를 살아낸다.”
[정혜윤, 아무튼 메모, 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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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내가 쓴 글은 지루하기 짝이 없었지만 일기도
메모로서 분명히 장점이 있다. 자기 자신을 보게 만든다.
과거를 돌아보게 한다. 객관적으로 보는 것이야말로
도덕적인 것의 출발이다. 자신의 못난 점을 인정하는 것도
대단한 용기다. 그러나,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나 자신에 대해
말하는 것보다는 나 자신에게 말을 거는 것이 좋다.
내 속을 들여다보는 것보다는 내 속에 들어오는 이야기들에
빠지는 것이 더 좋다. 내가 나를 보는 것이 아니라 내가 새로
포착한 문장이 나를 보게 만드는 것이 좋다. 그때 쓴 것과
비슷하게 재현하면 이런 메모들이 나올 것 같다.
[정혜윤, 아무튼 메모, 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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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서 메모를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결국 우리는 사회적 존재다.
메모는 재료다. 메모는 준비다. 삶을 위한 예열 과정이다. 언젠가는
그중 가장 좋은 것은 삶으로 부화해야 한다. 분명한 것은 우리가
무엇을 메모할지 아무도 막지 못한다는 점이다. 분명한 것은 메모장
안에서 우리는 더 용감해져도 된다는 점이다. 원한다면 얼마든지
더 꿈꿔도 좋다. 원한다면 우리는 우리가 쓴 것에 영향을 받을 수 있다.
어떻게 살지 몰라도 쓴 대로 살 수는 있다. 할 수 있는 한 자신 안에 있는
최선의 것을 따라 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이 있지 않은가.
자신 안에 괜찮은 것이 없다면 외부 세계에서 모셔 오면 된다.
[정혜윤, 아무튼 메모, 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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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로 칼비노의 말이 떠오른다. “해답이 아니라 경이로움을 즐기라.”
나는 지칠 때면 속으로 이렇게 말하곤 했다.
‘지금 어디선가 고래가 숨 쉬고 있다! 지금 고래가 제 할 일을 하고 있다.’
그리고 고래처럼 깊게 숨을 쉰다.
‘나는 너와 함께, 너처럼 힘을 낼 거야.’
고래처럼 물 밖으로 솟구쳐 태양을 향해 뛰어오를 수 있다면 좋을 것이다.
그러나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 아니다.
[정혜윤, 아무튼 메모, 96~97]
2024. 6.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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