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5
“그냥 너를 다시 만날 수 있어서 기뻐. 너랑 다시
이야기할 수 있어서 정말 좋아.” 친구 N은 새해 인사를
핑계 삼아 시간 간격을 두고 이런 문자를 보냈다.
‘뭐해? 그냥 연락해봤어. 새해 복 많이 받으라고.
참, 시간되면 집에 밥 먹으러 와.’ ‘미안해. 너무 뜬금없었지?
새해 핑계로 슥 넘어가 보려고 했어. 모르긴 몰라도
나 같은 애 주변에 많을 거야.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바로 연락도 못 하고, 미안해. 내가 이렇게 후졌어.’
‘다시 만나서 기쁘다’는 말과 ‘내가 이렇게 후졌어’라는 말이
살아서 ‘다행’이라는 말보다 내 치유에 훨씬 큰 도움을 주었다.
‘좋은 위로’라는 건 뭘까. 아직도 잘 모르겠다. 그러나 이제는
아픈 사람을 알아볼 수는 있을 것 같다. 그들 곁에 함께
서 있는 것도 해줄 수 있다. 나는 기꺼이 그들 곁에 서 있기를
선택할 것이다. 힘을 내도록 그 사람 편이 되어주는 데는
많은 말이 필요치 않다.
[김초롱, 제가 참사 생존자인가요, 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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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사 이후, 나는 제대로 사과하지 않는 어른들을 보면서 외로웠다.
나아가 점점 더 나만 이상한 사람이 되어가는 듯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가슴에 시퍼렇게 멍이 드는 것 같았다. 사과받고 싶었다.
나를 대신해 세상을 떠났다고 생각하는 희생자들에게는 사과하고 싶었고,
제대로 인정하고 사과할 줄 모르는 어른들에게는 사과받고 싶었다.
왜 아무도 사과하지 않지? 우리는 이렇게 아픈데. 세상은, 이 시대는,
사과하지 않기 위해 ‘네가 놀다가 죽은 것’이라며 개인 탓으로 돌리고 있었다.
우리는 학창 시절에도 진짜 어른을 찾았고,
어른이 된 지금도 진짜 어른을 찾고 있다.
[김초롱, 제가 참사 생존자인가요, 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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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청회에서는 국회의원을 비롯해 유가족마저 생존자들의
생생한 현장 증언에 모두가 말을 잃어갔다. 대충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실제로 ‘이랬구나’ 하고 처음 체감하는 듯하던 그 분위기를 나는
잊을 수가 없다. 보신각 타종 행사를 해도 군중 밀집 관리에 들어가고,
각종 행사와 시위가 있어도 군중 밀집 관리에 들어가 기동대를 배치한다.
그런데 왜 유독 이태원과 그날의 사고 시그널은 놓친 것일까.
나는 우리 사회가 다른 세대에게, 다른 연령대의 인간에게,
다른 사람들에게 관심 없이 세상에 그저 자신이 사는 방식만 존재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얘기했다. 다양성에 관심이 없고 아예
알려고 하지 않는 그 태도가 문제였다. 참사는 그 행사가
젊은 세대에게 얼마나 큰 부분을 차지하는 일상인지 몰랐던
무지함의 결과가 아닐까. ‘인간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던 것,
나는 이것이 근본적인 원인이라고 생각했다.
[김초롱, 제가 참사 생존자인가요, 176-1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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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 주저앉아 숨을 고르다 일어나서 어찌어찌 발언하고 내려왔는데,
유가족 어머니 중 한 분이 내 앞에 다가와 이렇게 말씀하셨다.
“용기를 내줘서 고마워요. 나는 초롱 씨가 다 잊고 행복하고
밝게만 살아줬으면 좋겠어. 다 잊고 잘 살아줘요. 행복하게만, 응?
요즘 젊은 사람들 사는 것처럼. 그러면 난 정말 바랄 게 없네.
이 이야기 꼭 해주고 싶어서 찾아왔어요. 진상규명도 그냥 우리가
다 할 일이니까 신경 쓰지 말고. 이제 더 울지 말고 씩씩하게 잘 살아줘요.
너무 큰 짐은 다 버려두고 앞으로는 웃고 살 일만 걱정했으면 좋겠네.
그간은 용기를 내주길 바랐는데 오늘 보니 못할 짓이다 싶어.
그냥 젊은 친구들은 원래 살던 대로 밝고 밝게 사는 게,
그게 우리를 위한 것 같아. 그동안 고마웠어요.”
내게 잊어도 된다고 말해준 유일한 분이었다. 다 잊으라는 말이
이렇게도 슬프고 위로를 주다니, 대체 그들과 내게 어떤 슬픔이
존재하는지 헤아릴 수가 없었다. 내가 밝게 사는 것이,
평범하게 웃고 지내는 것이 그들을 위한 것이라니, 그 마음을
어떻게 헤아려야 할까.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잊어달란 그 요청을
고이 접어두고 사는 내내 꼭 기억하겠다고 마음먹었다.
[김초롱, 제가 참사 생존자인가요, 191-192]
2024. 6.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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