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작소설
눈을 떴는데 확인해 보니, 새벽 3시였다. 잠의 신 휘프노스에게 제발 다시 잠들게 해달라고 간청해봤지만 한 번 달아난 잠은 다시 찾아오지 않았다. 결국 책이나 읽자고 <그리스인 조르바>를 꺼낸 후, 아무 페이지나 펼쳤다. 하지만 단 한 글자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다시 덮어놓고 눈을 감았으나 역시 휘프노스는 찾을 수 없었다. 그렇게 누웠다가 다시 일어나서 책을 펼쳤다가를 반복하다 보니 어느덧 6시가 됐다.
나는 자포자기하고 세수를 하고 이빨을 닦았다. 그리고 따뜻한 커피를 입천장이 데도록 급하게 마신 다음 외출 채비를 했다. 약속은 8시였다. 늦지 않도록 좀 이른 시간에 도착하는 게 내 스타일이니 서둘러야 했다.
구의역에서 신림역까지 약 35분 거리다. 집에서 나가서 구의역까지 걸어가는 시간 약 5분, 지하철 기다리는 시간 평균 5분, 그리고 신림역에서 4번 출구를 찾기까지 헤매는 시간을 계산해서 7시쯤 집에서 나가면 큰 문제는 없겠지만 6시 30분에 출발하기로 했다.
역식 철두철미한 내 예측대로 7:30분에 현장에 도착했다. 큰 무리 없이 4번 출구를 찾았고 근처 카페에 들러 커피라도 마셔볼까 잠시 고민하다, 아침에 마신 커피가 생각나서 커피는 하루에 한 잔이면 충분하다는 계산 끝에, 그냥 4번 출구 앞에서 서성이기로 했다.
연희는 정확하게 8시에 나타났다. 이르지도 늦지도 않은 그러니까 연희는 아주 정확한 시간 개념을 소유한 인간임이 분명했다. 계단 입구에서부터 연희는 손을 흔들고 나타났다. 나는 그 장면이 꽤 어색하고 낯설게 느껴졌다.
“민석씨, 예상보다 일찍 나왔네요? 난 당연히 10분 이상 기다릴 줄 알았는데…”
나는 대답을 하지 않고 그냥 웃었다. 물론 웃는 표정이나 우는 표정의 차이점이 무엇인지 나는 모른다. 너무 오랜 세월을 굳은 얼굴로 살아왔다. 그래서 나는 기쁠 때도 슬플 때도 늘 똑같은 표정을 지었다. 어느 순간 그렇게 사는 게 너무 편해졌달까. 평범한 인생의 표정엔 감정조차 담기지 못한다.
“아니, 민석씨는 웃는 걸 할 줄 모르는 사람이에요?”
“아, 지금 웃었는데요…”
“그게 웃은 거라고요? 아니 웃을 때는 나처럼 따라 해 봐요. 아니 아니 그렇게 말고, 여기 양쪽 입꼬리를 추켜 올리고 눈은 하회탈처럼 약간 찡그리고 볼때기는 이렇게 양옆으로 잔뜩 잡아 늘어서…”라고 하더니 연희는 내 볼을 지난번 꿈인지 아닌지 확인할 때처럼 꽉 잡아당기는 것이었다.
“아…” 나는 또 꿈인지 현실인지 확인하기 위해서 연희가 확인하는 건 아닐지 생각했지만, 정신을 차리고 보니 연희는 나를 고의적으로 골려주려고 작정한 모양이었다. 고약한 여자. 너무 아프다.
연희는 “풋”하고 혼자서 웃더니 출발하자고 했다.
“출발? 우리 지금 어디로 가나요?”
“아니 내가 어제 스승님 만나러 간다고 했잖아요. 그분 만나기 엄청 어렵거든요. 아무나 절대 만나주지 않는다고요. 그러니 이따가 만나면 정말로 감사하다고 인사해야 돼요. 알았죠? 자 갑시다.”
연희가 슬쩍 내 손을 잡았다. “헉, 뭐야 무서워. 왜 이 여자 갑자기 내 손을 잡는 거야. 아, 이런 건 대본에 없는 건데,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하지? 그냥 못 이기는 척하고 자연스럽게 손을 흔들며 걸어가면 되는 걸까. 아니면 슬쩍 손을 빼면서 주머니에 넣어버려야 할까.” 아, 어렵다. 지금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우리는 마을 버스정류장 앞에 섰다. 연희는 내손을 꽉 잡고 표지판에 붙어 있는 버스의 배차시간을 확인했다. “아니, 연희씨 뭘 그렇게 표지판을 들여다보고 있어요? 앱 실행하면 시간 다 나올 텐데요. 요즘은 마을버스 도착시간까지 다 나온다고요.” 나는 빌미를 잡은 사람처럼, 연희의 손을 슬쩍 밀어버리고 앱을 작동시켰다. 물론 그렇게 한 것은 나만의 작은 작전이었다. 자연스럽게 여자의 손으로부터 멀어지기 위한, 그럴듯한 작전.
하지만 앱에서는 마을버스의 도착시간을 알려주지 않았다. 나는 조금 무색해져서 고개를 떨구며 연희의 눈치를 봤다.
“거 봐요 민석씨, 마을버스 도착시간 따위는 앱에서 보여주지 않는다니까요. 그냥 표지판에서 배차시간 확인했으니 기다려봐요. 뭐가 그렇게 급해요. 남자가 말이야, 진득하고 무겁게 침묵을 지킬 줄도 알아야지.” 연희는 어느새 또 남자를 들먹거린다. 내가 남자라는 사실은 굳이 강조하지 않아도 잘 알고 있다.
2~3분쯤 기다리자, 버스가 도착했다. 아침이었지만 버스 안에는 아주머니와 아저씨들로 인산인해였다. 비좁은 마을버스 안쪽에서 우리는 손잡이 하나에 흔들거리는 몸을 지탱해야 했다.
버스는 언덕길을 위태롭게 올라갔다. 아니 바퀴로 굴러간다는 개념보다는 느릿느릿 기어간다는 말이 맞았다. 의자에 앉아서 우리를 마치 외계인이라도 된 것처럼 구경해대는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다양한 표정들만이 빛났다.
거의 언덕 끝에 다다랐을 때, 버스에서 겨우 내릴 수 있었다.
“이제 산에 또 올라가야 해요.”
“산이요? 우리 오늘 등산하러 신림역에서 여기까지 온 거예요?”
“등산이라니요. 등산이 뭐가 어때서요. 그리고 등산하러 온 거 아니거든요!” 연희는 눈을 흘기며 말했다.
“잠자코 따라오기나 해요. 쓸데없는 질문은 금지예요. 투덜거리는 것도 금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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