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4화 : 스승과의 만남

연작소설

by 공대생의 심야서재

나는 잠자코 연희를 따라가려고 했으나, 연희는 또 말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고 타박을 했다. 내가 대체 어떻게 굴어야 연희의 마음에 들 수 있을까. 어쩌면 세상의 여자로부터 내가 사랑을 받는 방법이란, 결국 아무것도 하지 않거나, 그 무엇이든 모두 다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그 부분에 대하여 아는 것이 너무 없다.


나는 산에 오른다. 물론 나는 그녀의 뒤를 말없이 쫓는다. 관악산은 쉬운 산이 아니다. 게다가 나는 평소에 운동을 거의 하지 않는다. 한마디로 저질체력의 소유자라는 얘기다.


산행이 시작되자마자 좁은 오솔길이 구불구불 끝없이 이어졌다. 나는 원래도 말이 없었지만, 아무리 숲의 고요한 향기가 나른하게 퍼져나간다 해도, 숨쉬기가 너무 힘들어서 대화란 것을 나눌 힘이 단 하나도 없었다. 나는 솔직히 연희의 허리를 잡고 싶었다. 혹은 연희가 뒤에서 내 허리를 밀어주는 것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 어느 수단도 연희와 나는 접촉할 수밖에 한다. 야릇한 스킨십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런 그림을 연상하니까, 자꾸만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상상할수록 깊이 어디론가 진입할수록 땀은 더 비 오듯 쏟아졌다.


“아니, 남자가 뭔 땀을 그렇게 흘려요?” 연희가 어이없는 표정으로 말했다. “아니, 남자는 땀 좀 흘리면 안됩니까? 너무 힘들어서 그렇죠.” 나름 치밀한 변론을 구사했지만, 그다지 먹혀들 것 같진 않았다. “조금만 참아봐요. 우리 등산 이제 막 시작했다고요. 앞으로 갈길이 머니까, 기운 좀 내봅시다.”라고 말하며 연희는 두 번째로 내 손을 잡았다. 이제는 스킨십이 아주 자연스러워지는 단계로 진화하고 있었다.


연희는 나보다 반걸음 정도 앞서 걸었다. 내가 조금이라도 지치면 팔을 강하게 흔들었다. 어쩌면 남 보기에 나는 복날의 개처럼 억지로 끌려가는 그림처럼 비쳤겠지만, 잠시라도 그 개였을 또 다른 존재의 나는 행복했을지도 모른다. 그 장면은 잔잔한 일본 영화풍 같은 것이었을지도. 언제 시작했을지 모를, 어느 장면을 보더라도 딱히 문제없는 그래서 더 감정이 포근해지는, 오기가미 나오코의 <안경> 같은 영화…


기운을 내고 걸음을 옮겼다. 희말라야를 처음 등정하는 초보 산악인처럼, 물론 나는 관악산에 실제로도 처음이다. 눈에 들어오는 모든 장면들을 기념하며, 특히 연희와 어떤 순간을 함께 보내고 있다는 감격스러움을 모든 세포에 각인시키겠다는 자세로 걷고 또 걸었다. 때로는 펭귄처럼 때로는 최초로 달에 오른 닐 암스트롱처럼 유영하듯 걸었다. 물론 산길은 끝이 없는 또 다른 길을 안내했다. 고지를 점령하면 더 높은 고지가 우리 앞에 막아섰다.


체력이 거의 방전되었을 무렵 정상 비슷한 곳이 나타났다. 이제 산은 산으로서의 위용보다는 바위로서의 측면을 더 강조하려는 듯했다. “이제 그만 올라가면 안 될까요?” 길섶에 털썩 주저앉으며 안방처럼 기다랗게 누워버리려는 자세를 취할 찰나, 연희는 “힘들어요? 그래요 힘들면 이제 그만 올라가요.”라고 의외의 태도를 보였다.


‘뭐지? 더 올라가자고 할 것 같은데, 여기서 그만 마치자니?’ 내가 한계적 상황에 봉착했다는 사실을 인정이라도 한 걸까? 연희는 의외로 납득하는 눈치였다. 그녀는 내 옆에 앉아서 내 어깨에 팔을 걸쳐놓으며 이렇게 말했다. “그래요 힘들면 그만 가요. 이 정도면 민석씨도 충분히 노력한 것 같네요. 오늘 우리의 목표는 달성한 것으로 쳐요.”라고.


“그런데, 스승님은 어디에 계신가요? 오늘 아침에 일찍 만나기로 한 것 같은데… 저는 스승님이 관악산 숲 속 어딘가에서 도라도 닦는 분이라고 상상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아까 요 밑에 작은 암자를 지나갈 때, 스님이 나오셔서 합장이라도 하는 건가, 싶어서 잠시 긴장했었다고요. 근데 그 앞을 스윽 지나가버리대요. 이건 뭔가 싶었죠. 저에게 도움이 될 거라고 그렇게 연희씨가 강조하던 스승님은 어디에 계신 거예요?”


이렇게 내가 묻자. 연희는 잠시 눈을 감았다. 약 5초 정도쯤 눈을 감았다가 지그시 뜨고는 내 눈을 그윽하게 바라봤다. 그러더니 배낭에서 뭔가를 주섬주섬 꺼냈다. 그것은 두 사람이 겨우 앉을 너비의 돗자리였다. 돗자리를 평평한 곳에 깔더니 블루투스 라디오를 꺼내곤 스마트폰에 연결했다. 아주 익숙한 솜씨로. 그러니까 매일 이곳 관악산에서 신성한 제사라도 펼치는 불자처럼, 아니 정말 연희는 그 순간 스님처럼 보였다.


"민석씨 내 옆에 무릎 꿇고 앉아요." 헉 내가 무슨 잘못이라도 한 건가? 무릎 꿇고 사과라도 해야 하는 건가 싶어서, 오전에 연희와 만나서 여기에 오기까지 내가 어떤 잘못을 범했는지 마음속에서 목록을 작성하고 있었다. "사죄하라고 무릎 꿇으라는 거 아니니까요. 긴장하지 말고 편안하게 앉아요."


연희는 스마트폰으로 법당에서 나올 법한 비교적 고요한 음악을 틀었다. 그곳엔 아무도 없는 공백 그 자체의 기운만 서려 있었다. 인공 조명도 자연적인 색채도 가미되지 않았다. 오직 나와 연희 사이에서 발산하는 빛들만 고고하게 미세한 열기를 띠고 있었다.


“나모라 다나다라 야야 나막알약……“


나는 방금 들려온 불경 소리를 듣고 잠시 멈칫거렸다. 여긴 분명 관악산 숲 어느 지점이다. 시골의 작은 암자도 규모가 있는 절간도 아니다. 주변을 둘러봐도 부처님이 살만한 그런 장식물들이 체계적으로 배치되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지금 들리는 소리는 분명 불경이다. 절에 다니지 않는다고 해서 불경도 모르는 얼간이는 아니다. 그 정도 소리는 구분할 줄 안다.


“민석씨가 무릅을 꿇고 앉았으므로 우리의 계약은 자동적으로 성립되었어요." "계약이라뇨? 무슨 소리예요? 연희씨" 솔직히 기분이 묘했다. 연희의 행위를 관찰하다, 어제 연희가 언급한 스승과 도움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니 그것과 연희가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인지 묘하게 궁금했다.


“알아들을 수 없어도 가만히 들어봐요.”라고 목소리가 말했다. 그래, 성대에서 어떤 소리가 전해진 게 아니라 목소리 자체에서 샘솟듯 흘러나온 거나 마찬가지였다. 형체는 연희가 분명했지만 어떻게 보면 그 소리는 연희에게서 발산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소리만 균일하게 점 하나로부터 퍼져 나오고 있었다. 저 소리는 대체 어디에서 시작된 걸까. 뿌연 안개가 바닥에서부터 서서히 밀려들어왔다. 연희는 구름을 타고 마치 공중 부양하는 자세로 그 자리에서 둥둥 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것은 순전히 나의 착각일 뿐이었지만…


“스승 같은 건 어디에도 없어요. 민석씨가 스승이고 민석씨가 제자인 거예요. 스승과 제자라는 관계는 꼭 타인과 맺어져야 하는 할까요? 저는 아닐 거라고 봐요. 민석씨는 스승 없이도 충분히 홀로 설 수 있는 존재라고요”라고 연희가 말했다. “아니 나는 연희씨가 스승님을 소개해주신다고 해서, 새벽부터 서둘러서 여기에 온 건데, 다짜고짜 스승이 필요 없다. 너는 너 혼자서도 충분히 설 수 있는 그런 존재다,라고 말씀하시면 제가 난처해지지 않겠어요? 저는 뭐가 뭔지 대체 어떻게 이야기가 흘러가는 건지 모르겠어요. 게다가 지금 불경은 또 뭐예요. 도대체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네요.”라고 내가 말했다.


“사실, 민석씨와 저는 남부터미널에서 인연을 갖게 됐죠. 어쩌면 잘못 끼워진 단추 탓에 우리가 만났다고 볼 수도 있겠죠. 그 과정엔 예측하지 못한 변수가 개입된 거였죠. 작은 변수는 나비처럼 날갯짓을 해서 우리를 독일마을까지 이끌어줬고요. 물론 우리는 그 과정을 함께 시작해서 어딘가를 거쳐가며 투닥거렸죠. 게다가 민석씨는 어쩌면 스스로 사소하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꽤 많은 것들을 양보하고 희생했죠. 사람이 누구인지, 선량했는지 아닌지, 이타적인지 이기적인지는 한 가지 행동만 봐도 알 수 있다고 믿어요. 민석씨는 저에게 이타적인 모습을 보여줬어요. 어쩌면 민석씨는 자신의 모습은 그저 수동적인 면의 다른 형태라고 말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저는 아니라고 봤어요. 더욱이 민석씨가 겪은 이야기를 들으면서 더 확신을 하게 됐죠.”


“계속해서 말해도 되죠?” 연희가 말했다. 나는 경청하는 자세로 “계속하세요”라고 대답했다.


“음… 민석씨는 실패를 경험했어요. 그 실패는 작다고 봐야 할까요? 크다고 봐야 할까요? 인생이 얼마나 길게 이어질지는 예측하지 못하겠지만, 어떤 사람은 인생을 아주 짧게 간주하죠. 그래서 꽤 조급하게 굴어요. 미미한 실패를 스스로 크게 확대 해석해버리는 거죠. 스스로를 실패라는 낙인을 찍어버리고, 앞길을 가로막아버리는 거예요. 그 사람은 인생의 길에서 대안을 찾지 못해요. 계속 과거의 환영에 억눌려 살아서, 좋은 기회, 인연이 찾아와도 그걸 알아보지 못해요. 하지만 민석씨는 그걸 알아봤어요. 무작위적인 선택을 따라간 거예요. 그 지점에서 우린 만나게 됐고 여기까지 오게 된 거죠.”


“아마도 민석씨는 어떤 믿음에 기대고 싶었을 거예요. 작은 믿음, 나 스스로는 해내지 못하지만 누군가 다리를 놓아주면 그 위를 걸어갈 수 있다는 자신감이 미약하게나마 남아 있었다는 거죠. 그게 민석씨를 여기까지 오게 만들어준 거라고요. 성수대교에서 자살한 사람을 목격했다고 했죠? 그 사람과 평범한 한 인간의 운명이 아주 다른 형태로 진행될 거라고 생각해요? 아마 아닐 거예요. 그 사람과 우린 A4 한 장 정도 두께 차이밖에 안될 거예요. 그 사이에서 어떤 사람은 죽음을, 어떤 사람은 삶을 선택하는 거죠. 저는 그런 면에서 민석씨에게 기회가 있을 거라고 믿어요”


"오늘 토 달지 말고 내가 시키는 대로 해요. 자, 두 손을 모으고 일어서서 절을 해봐요. 108배 알죠? 우린 지금부터 108배를 할 거예요. 이건 부처님을 믿고 안 믿고의 문제가 아니에요. 이제 모든 걸 놓고 나에게만 집중하는 시간을 갖는 거예요. 생각일랑 모두 버려요. 고민, 번뇌 따위 버리고 현존하는 거예요. 오직 호흡하는데만 열중해요. 여기 목탁 소리가 한 번 날 때마다 절을 해요. 자 나처럼 따라 해 봐요. 처음이라 엄청 힘들겠지만, 비 오듯 땀이 쏟아지겠지만, 끝나고 나면 뭔가 얻을지도 모르잖아요. 자, 군소리 말고 시키는 대로 해봐요."


연희는 정말 이상한 여자다. 남해 독일마을에서 혼자 펜션을 운영하고 잡지사에서 기자로 일하지만 쉬겠다고 휴직을 한 상태고 나를 위해서 관악산 중턱에서 돗자리를 깔고 불경, 그러니까 천수경을 줄줄 외우더니, 이제는 108배를 하잔다. 생각하면 할수록 이 여자가 누구인지 나에게 왜 찾아온 건지, 이해할 수 없다. 뭐 이 세상에 내 이해 범주에 속하는 일이 별로 없긴 하지만




제1화 : 평범한 개발자에게 주어진 기묘한 특명 제2화 : 난 프런트 앤드 개발자라고!

제3화 : 사라진 김대리와 주인이 없는 버그 제4화 : 신촌에 사는 미식가와의 만남

제5화 : 김대리와 나교수의 은밀한 시간 제6화 : 믹스 커피의 순수성에 대해서

제7화 : 길박사의 족집게 강의 제8화 : 배신

제9화 : 김대리의 제안 제10화 : 개선 작업

제11화 : 꿈의 암시 작용 제12화 : 미행 1

제13화 : 미행 2 제14화 : 미행 3

제15화 : 미행 4 제16화 : 방황 1

제17화 : 방황 2 제18화 : 떠남 1

제19화 : 떠남 2 제20화 : 만남 1

재21화 : 만남 2 제22화 : 만남 3

제23화 : 전환 1 제24화 : 전환 2

제25화 : 숙박 1 제26화 : 숙박 2

제27화 : 숙박 3 제28화 : 방벽

제29화 : 바깥쪽 제30화 : 산책

제31화 : 복귀 제32화 : 정리

제33화 :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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