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승요? 스승은 아까 말했듯이 바로 저예요 그렇지만 민석씨 자신도 될 수 있고요. 싱겁다고요? 뭐 그런 게 어딨냐고요? 자 눈에 낀 그 흐릿한 안경테 같은 것부터 깨고 제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봐요. 아직도 제가 연희로 보여요?"
"…"
"세상은 다수의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지만 우리는 그 연유 때문에 타인에게 쉽게 동화되고 현혹되기도 해요. 나와 다를 바 없는 타인의 모습에 젖어버려 그만 나를 잃게 되는 거라고요. 그러니까 민석씨가 연희가 되고 연희가 민석씨가 되기도 하는 거죠. 이해가 잘 안 가죠? 생각 좀 해봐요. 생각을… 생각하고 회의하는 사람 데카르트처럼…"
"타인에게 기대려고도 의지하려고도 하지 말아요. 스스로 해낼 수 있어요. 자신감을 가져요. 회사에서 민석씨의 자리를 다시 찾는 일이건, 그 안에서 자신의 일을 발견하는 일이건, 자신감을 갖고 의미를 찾아 나서요. 자신감을 갖게 되면, 사람은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지 않게 돼요. 이기든 지든, 어떻게든 싸움에 나서게 된다고요. 뭐 지면 어때요. 지면 욕한 번 대차게 하고 또 금세 잊어버리고 또 싸우러 나서는 거죠. 그런 면에서 우린 신에게 망각이라는 은총을 선물 받았다고 생각해요. 저요? 저는 꽤 쉽게 잊어버려요. 금붕어처럼… 버림을 받았든, 회사에서 정치 싸움에 패배했든 새까맣게 잊어버려요. 다음날이 되면 밝은 표정으로 또 전선에 나선다고요. 알겠어요?”
"사람은 누구에게나 스승이 될 수가 있다고 했죠. 어느 문학 작품에서 읽었는데, 누가 얘기한 건지는 몰라요. 아무튼 나도 민석씨의 스승이 될 수 있고 민석씨도 제 스승이 될 수 있어요. 기브 앤 테이크? 알겠어요? 주고받는 사이라고요 우린, 무엇이든…"
나는 연희의 말을 듣고 잠시 침묵에 빠졌다. 그녀의 말에 동의하지 않아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녀의 말이 너무 옳았기 때문이었다. 지금까지 나는 내 인생에서 주인공이 아니라고 여기며 살아왔다. 그래서 나는 타인에게 더 많은 조명을 비추기 위해, 내가 등대라고 생각하며 살았다. 그 과정에서 나는 나를 최우선 순위로 생각하지 않았다. 나는 늘 세 번째 아니면 그 이하로 순위를 매겼다. 나는 늘 소외되는 길을 택한 것이었다.
하지만 어떤 우연한 계기 덕분에 나는 앨리스의 토굴 같은 곳으로 굴러 떨어진 것이다. 거기에서 나는 지금까지 내가 살아왔던 세상과는 전혀 다르게 생긴 세계를 만났다. 어쩌면 그 세계는 내가 지금까지 살아왔던 곳과 전혀 결부되지 않은 4차원의 시공간일지도 모른다. 나는 어떤 기묘한 선택 때문에 내가 머물던 세계에서 다른 차원의 세계로 진입했을지도 모른다.
그 새로운 세계에서는 이전처럼 조연이 아닌 주인공으로 살면 된다. 스승을 타인에게서 찾을 것이 아니라 나 스스로를 스승으로 여기며 살아가면 된다. 연희의 말처럼 태도를 바꾸면 나는 나조차도 객관화시킬 수 있다. 불가능한 것이라 여기던 일들이 말끔하게 해결된다.
“그래요 연희씨 말이 맞아요. 그런데 충분히 잘 알지만, 나는 아무래도 혼자서는 힘들 것 같아요. 누가 옆에서 도와주지 않으면, 그가 아무런 역할을 맡지 않아도 단지 누군가 옆에서 단순하게 서 있기만 해도, 나는 거기에서 위안을 받는다고요 그러니까 그 사람 없이는 안된다고요. 저는 그런 인생을 십수 년 살아왔어요. 인간은 독립적인 존재이며 혼자서 충분히 자립할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지만, 허수아비가 옆에 있기만 해도 든든해지는 게 저라는 사람이라고요. 말이 나와서 말인데요. 우린 작은 실수 때문에 인연을 맺게 됐죠. 그것은 신이 기획한 일인지, 지극히 우연이 만든 기묘한 설계 작업 때문인지 알 수 없어요. 그렇게 제 울타리 안으로 연희씨가 침범했으니까, 그러니 이제 나를 도워줘야 해요. 내가 이제 됐어요,라고 말할 때까지 내손을 꼭 붙잡아야 한다고요”
연희는 말없이 내손을 꽉 잡았다. 아까 등산이 시작될 때 잡았던 순간보다 연희의 힘이 더 세진 것 같았다. “알았어요. 뭐 저는 당분간 회사에 나가지도 않고 돈도 꽤 많으니까. 민석씨의 그 멋진 자립 돕도록 할게요. 자, 오늘은 고생했으니까 이제 하산하도록 합시다. 요 산 밑에 냉면 잘하는 집 있어요. 거기 가서 냉면 하고 고기도 같이 먹어요. 가요. 돈은 민석씨가 내고요.”
우린 그렇게 장장 2시간에 걸친 등산과 108배라는 것을 끝내고 하산을 시작했다. 우리가 내려갈 때는 내려가는 사람보다 오르는 사람이 훨씬 많았다. 뭔가 우리는 시간을 역행하는 기분이 들었다. 다른 사람과 다른 길을 앞으로 걷게 된다는 그런 암시가 느껴졌다면 비약이었을까.
우린 그날 점심으로 냉면과 삼겹살을 먹었고, 다시 신림역에 도착해서는 카페에서 차가운 커피를 마셨다. 그리고 연희는 연희가 사는 연희동으로 나는 자양동으로 각자 돌아갔다. 나는 집에 도착해서 하루 동안 벌어진 일들을 생각했다. 꽤 많은 일들이 벌어진 까닭일까. 가슴이 벅차게 차오르는 기분이 들었다. 오랜만에 느끼는 시원한 기대감이었다.
나는 연희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내일은 어디에 갈까요?”라는 단문의 메시지였다. 연희에게 곧바로 답장이 왔다. “내일은 오후에 서점에 가도록 해요. 광화문 서점 앞에서 봐요. 점심은 각자 해결하고 오후에 서점에서!”
나는 연희의 제안에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메시지는 여전히 1이라는 숫자를 숙제로 남겼다. 애써 부정하지 않았으니 그것은 본격적인 데이트를 암시하는 듯한 그 제안에 응하는 것으로 봐야 했을까. 숫자 1은 두어 시간 정도 후에 없애도록 하자. 뭐, 서점에 남녀가 함께 가서 책 몇 권 같이 본다는 것에 어떤 가능성을 대입한다는 게 긍정적인 의미라도 되는 될까. 내가 너무 성급하게 앞서 나가는 건 아닐까.
집으로 돌아가는 지하철, 손잡이를 잡고 서서 나는 반대편 차창에 비친 한 남자를 살폈다. 검은 윤곽과 회색 음영이 희미하게 교차하고 있었다. 그 남자의 얼굴엔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오직 음영으로서만 존재할 뿐이었다. 그저 침묵의 냄새를 진하게 풍기고 있었달까. 나는 속으로 잠시 잊고 있던 기억으로 돌아갔다. 어느 날 비극이 점화된 바로 그 지점으로.
강남역으로 가자. 순간 선택한 판단이었다. 나는 지금까지 내게 주어진 과제를 마무리하지 못하고 도피하듯 서울을 떠나서 남해로, 남해에서 다시 서울로 돌아왔지만 서울은 내가 떠나온 곳보다 더 멀리 있는 기분이었다. 내 삶은 대체 어디에 그리고 어디로 가고 있을까. 나는 분명 현존하고 있지만 어쩌면 나는 그렇지 않을지도 모른다. 나는 마치 우울한 그림자처럼 이곳저곳을 떠돌고 있는 게 전부는 아닐까. 연애든, 직장으로 복귀하는 일이든, 일단 정리가 필요하다. 나는 한동안 이 모든 일에서 멀어져 있었다. 직장에서 벌어진 수습하지 못한 사건, 집이 누군가에게 더럽혀진 일, 나는 아무것도 수습하지 않고 그저 외면만 했던 것이다. 회사로 돌아가자, 일단 그곳을 찾아서 잘못된 것들을 되돌리고 그 후에 다시 삶을 찾아보자. 그게 우선이다.
강남역으로 도착한 다음, 나는 신분당선 지하상가를 거쳐 4번 출구로 나가는 에스컬레이터로 방향을 바꿨다. 스르르 소리도 없이 계단이 알아서 움직였다. 한쪽에선 올라가고 한쪽에선 내려가는 일이 벌어진다. 에스컬레이터의 속성은 이런 것이다. 두 가지 가능성이 동시에 공존하는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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