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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on Dec 18. 2015

딸. 한여름의 크리스마스는 처음이지?

모든 육아는 훌륭하다 #32

마트가 알려줬다. 곧, 그 날이라고.


"이거 뭐야? 샀어?"

"마트 판촉물이네. 저번엔 피규어 주더니만. 이번엔 뭐야? 뜯어봐."


냉장고 정리를 마치고 자리에 앉아 포장을 뜯었다. 종이를 뜯어 이리 저리 끼우니 까만 선글라스를 쓴 크리스마스 소년이 나타났다. 그제야 벽에 걸린 달력을 물끄러미 넘겨다봤다. 오마나, 크리스마스가 코 앞이었다.


40불 쯤 사면 주는 크리스마스 판촉물. 12개 시리즈를 다 모을 수 있을까.



언제나 다섯 번째 계절이었다.

크리스마스는.


크리스마스는 특별했다. 노는 게 일이었던 학창시절 명절이 특별했을까 주말인들 기다려졌을까. 관심에 선물 얹어 받는 내 생일도 좋았지만 사실 크리스마스만 못했다. 뜨끈한 장판과 두툼한 이불 사이에 쏙 들어가 귤 까먹기 좋은 날. 따뜻한 코코아와 커피 한 잔을 떠올리는 것만으로 추위마저 사랑스러워졌다. 동네 오빠와의 유치한 로맨스를 꿈꾸며 자체 이불킥을 날리던 그 시절의 크리스마스.



그 날을 늘 함께 했던 크마고우 캐빈도 떠올랐다. 언젠가부터 절대반지를 낀 프로도에게 편성을 빼앗겼다지만 그 시절 우리의 그날 밤은 영원히 이 녀석의 차지다.



무튼. 그렇게 특별했던 그 날을 잊고 있었다. 아마도 흰 눈이 예고해주지 않아서, 하얀 입김 너머 캐롤이 울려퍼지지 않아서 인가보다. 여긴 한여름의 뉴질랜드니까.



하얀 눈 대신 뙤약볕 아래서

크리스마스를 맞게 생겼다.


이 곳은 여름이다. 난 당신과 같은 달력을 넘기며 다른 계절을 보내고 있다. 이 곳의 크리스마스는 뜨겁게 더울게다. 무려 2주짜리 크리스마스 홀리데이를 보내며 사람들은 비키니를 입고 해변을 누비겠지. 선명한 볕 아래 삼삼오오 모여 마당에서 바베큐를 구울 거다. 반바지에 슬리퍼를 신고.



그 날을 맞이하는 풍경도 사뭇 다르다. 굴뚝을 타고 들어가느라 물구나무를 선 산타 할아버지, 퀵보드를 탄 루돌프, 턱시도를 차려입은 눈사람이 이웃의 마당에 가득하다. 지난 할로윈 때는 거미줄을 잔뜩 쳐놓았던 집이다. (참 부지런도 하다.) 



사실 달라진 건 동네의 풍경만은 아니다. 


연인 대신 2살짜리 딸의 선물을 포장했다. (산타 할아버지 손을 거치겠으나) 포장지를 두른 엄마의 첫 선물이다.

부모님과 함께 여행을 떠난다. 20년 만이다. 



아이를 위한 첫 크리스마스 선물,

부모님과 함께 하는 첫 크리스마스 여행.


딸아이가 내년부터 다니게 될 어린이집 크리스마스 파티에 초대받았다. 8천원 이내 선물을 가지고 오면 산타 할아버지(를 가장한 아르바이트생)가 전해준단다. 포장지에 싸서 주는 엄마의 첫 선물은 선글라스다. 마침 딸 내외와 함께 연말을 보내려 와 계신 부모님과는 함께 여행을 간다. 댓발 나온 입을 하고 다녔던 사춘기 시절 마지막 가족 여행 이후 20년 쯤 되었나. 


따뜻하게 설렌다. 캐빈과 흰 눈이 없어도 좋다. 따뜻한 코코아 한 잔 따위- 없어도 그만이다. 전기장판에 드러누워 귤 까먹던 내게 두꺼운 솜이불을 내어다 덮어준 건 우리 엄마였다. 귤을 박스 채 쟁여놓고 식탁 위 바구니를 화수분처럼 채웠던 것도 엄마였다. 추운 겨울 따뜻한 뭐라도 사 먹으라며 엄마 몰래 용돈을 찔러준 건 아빠였다. 제아무리 캐빈이 귀여웠어도 혼자 <나홀로 집에>를 봤다면 그렇게 가열차게 낄낄댈 수 있었을까. 내가 기억하는 가장 오래된 그날 밤, 동네 문방구에서 산 공작세트를 양말에 넣어 잠든 척한 내 머리맡에 놓고 나가시던 엄마의 뒷모습이 여즉 선명하다. 


그 시절 그 날의 추억엔 항상 풍경처럼 가족이 있었다가족은- 내 평생의 크리스마스다.


딸. 서른 몇 살에 맞이하는 어느 크리스마스 날, 엄마가 선물해준 선글라스 기억해줘. 





<모든 육아는 훌륭하다> 지난 글


#1. “미안해 그리고 미안해” feat. 엉망 엄마

#2. 그래, 엄마에겐 ‘곤조’가 있어야 한다.

#3. 엄마는 희생해야만 하는걸까?

#4. 육아에도 기획이 필요하다.

#5. '요즘 계집애들은 애를 안 낳으려 한다'는 당신에게

#6. 아이도 엄마도 행복한 육아 <둘다 리스트 10가지>

#7. 육아에 훈수를 금합니다.

#8. 육아우울증 극복을 위한 Tip 5가지

#9. 워킹맘의 육아휴직 손익계산서

#10. 딸. '잘' 살 필요없어.

#11. 딸. 엄마를 필요로 해줘서 고마워.

#12. 딸. 엄마랑 사진찍자, 100장 찍자.

#13. 딸. 엄마랑 커플룩입어볼까?

#14. 딸. 엄마가 우리 딸 맘을 몰랐네.

#15. 딸. 아빠는 도와주는 게 아냐.

#16. 딸. 맘충이라고 들어봤니.

#17. 딸. 오늘이 세상 마지막 날이라면 말야.

#18. 딸. 문제는 전업맘일까?

#19. 엄마도 아이도 좋아하는 <아지트> 만들기

#20. 딸. 넌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건 아냐.

#21. 엄마도 아이도 좋아하는 <친구> 사귀기

#22. 엄마도 아이도 좋아하는 <커플룩> 입기

#23. 딸. 엄마가 바라는 추석은 말야.

#24. 딸. 외동이면 외로울까?

#25. 엄마도 아이도 좋아하는 <춤>추기

#26. 엄마도 아이도 좋아하는 <여행> 떠나기

#27. 엄마도 아이도 좋아하는 <책> 읽기

#28. 엄마도 아이도 좋아하는 <집안일> 하기

#29. 엄마도 아이도 좋아하는 <마당> 꾸미기

#30. 엄마도 아이도 좋아하는 <그림> 그리기

#31. 엄마도 아이도 좋아하는 <기록> 남기기

#32. 딸. 한여름의 크리스마스는 처음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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