週末안영회 2023 - 들음의 여정
지난 글에서 만든 경청의 과정에 따르면 '듣기 몰입'에 해당하는 내용에 대한 기록입니다.
멈추어 나를 내려놓고, 상대에게 거울이 될 준비가 되었다면 몸과 마음을 모두 기울여 들어야 합니다.
어릴 적 명언집에서나 들어 본 이름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시를 저자가 경청을 주제로 풀이한 글입니다.
내 입에서 나오는 말이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려는 듯 귀로 싹 빨아들이는 사람에게 마음을 뺏기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 사람은 내 말만 흡입하는 게 아니라 내 존재를 흡입한다.
저에게는 20대의 들뜬 연애 기분에서만 가능한 일처럼 느껴집니다. 하지만, 존재에 대한 몰입이 떠올라 <당신이 옳다>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1] 그래서 찾아보니 훈계를 하느라 사랑하는 자식의 이야기조차 듣지 못하는 우리에게 하는 조언이 있었습니다.
우선 가장 먼저 보호하고 돌봐야 할 대상이 누구인지 그것부터 생각해야 한다.
경청은 기울 경(傾)과 들을 청(聽)이 합쳐진 한자어입니다.
<듣기의 말들>에서는 이렇게 정의합니다.
경청의 '경'은 몸의 기울임을, '청'은 마음의 기울임을 이른다. 고쳐 말하면 '경'은 듣는 이의 몸가짐을, '청'은 듣는 이의 마음가짐을 뜻한다.
<듣기의 말들> 26쪽에 다음과 같은 표현이 있습니다.
당신의 모든 주의력을 동원해서 들으세요. 이 말은 그 순간에 온전히 임하란 뜻입니다. 그 사람에게 초점을 맞추세요.
<당신이 옳다>에서 여러 차례 강조한 내용이 떠오릅니다. 뒤이어 저자는 청각장애인으로서 듣기 강의를 하는 스티븐 오키프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스티븐은 오랜 세월 자신이 터득한 세 가지 방법을 공유한다. 관심을 갖고 듣기, 눈으로 듣기, 마음으로 듣기. <중략> 나 같은 비농인은 절로 소리가 들리니까 기본을 무시한다. 반면 스티븐은 다른 사람 말을 알아들으려고 애를 쓰지 않을 수가 없다.
기본을 무시하지 않는 자세를 배양하기 위해 또다시 영화 역린을 통해 익힌 '정성'(중용 대사 중 일부)을 떠올립니다. 경청을 습관으로 배양하는 동안에는 매일 아침 다시 외울 생각입니다.
절로 들린다고 착각하지만, 저자의 표현대로 정말 고강도 노동을 투입하지 않으면 경청은 불가합니다.
'주다'의 사용을 예외적으로 허용할 만큼 듣는다는 행위는 수고롭기 때문이다. 들음은 온 마음과 몸을 써야 하는 고강도 노동이다. 그러니 '들어주는' 게 맞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쉽게 실천할 수 있는 방법이 필요합니다.
상대의 눈을 보고 고개를 끄덕이며 들어주라. 아무 말도 하지 말라. 그러면 당신 주위에 사람이 몰릴 것이다.
반대로 내가 이러고 있지 않은지 감시해야 할 대목도 설명합니다.
상대가 말하는 중에 치고 들어갈 기회를 엿보거나 말이 언제 끝날지 조바심을 낸다면 나는 듣지 않는 것이다. <중략> 의사소통의 기본은 상대의 말허리를 꺾지 않고 끝까지 듣는 것이다. <중략> 우오즈미 리에는 듣기의 기본 기술로 '참기'와 '다 알아도 모르는 척하기'를 제시한다.
'다 알아도 모르는 척하기'는 똑같은 얘기를 반복해서 하는 어머니 말을 들을 때 꼭 필요한 덕목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도로테 죌레는 역작 <신비와 저항>에서 "우리의 경험 속에 우리가 없다"는 문장으로 이런 병폐를 지적했다오. 죌레는 "나는 온전한 귀이다"라는 신비로운 표현을 쓰면서 언제 우리가 온전한 손과 발, 온전한 눈과 귀가 될 수 있을지 묻는다오.
저자는 이해를 돕기 위해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매 순간 매 자리에 온전히 머물고자 노력하지만 아직 멀었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소. 이를 닦거나 세수할 때가 특히 그렇소. 나이가 반백이 훌쩍 넘었는데도 여전히 무언가에 쫓기듯, 귀찮아서 빨리 해치우듯, 내 행위에 온전히 임하지 못하는 나를 보오.
더불어 최봉영 선생님께 배운 임자 개념도 다시 떠올리며, <차려서 사는 임자의 사는 얘기>를 다시 꺼내 보았습니다. 나에게 주어진 순간에 온전히 머물러 임자로 살기 위해서는 점이 되어 머무는 일부터 선행해야 한다는 당연한 이치를 다시 되뇝니다. 점이 되고 나서 선이 되어야 하는데, 생각에 이끌려 이 자리에서 떠나가는 어리석음을 너무나도 자주 저지르고 있음을 반성합니다.
오래전에 읽었던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에도 경청에 대한 아름다운 구절이 있었습니다.
나는 다른 사람과 온전히 함께하는시간이 있다고 믿네. 그건 상대방과 정말로 '함께' 있는 것을 뜻해. <중략> 그 사람의 눈을 응시하고 세상에 오직 그 사람밖에 없는 것처럼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허클베리핀의 리더 이기용이 쓴 <듣는다는 것>에서는 이를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고 합니다.
저에게 듣는다는 건 주의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중략> 말 그대로 이 순간만큼은 당신이 내 삶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인 거죠.
책은 실천을 위한 M. 스캇펙의 지침[2]을 전합니다.
만약 부모가 진심으로 아이의 얘기를 들으려면 다른 모든 일을 제쳐 놓아야 한다. 진심으로 들으려면 그 시간을 오로지 아이에게만 바쳐야 한다.
그리고 다행스러운 소식을 덧붙입니다.
여섯 살 아이가 제대로 들어주기를 바라는 것은 작은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모든 이야기를 정성을 다해 들을 필요는 없고, 다섯 가지 보기를 주며 균형 있게 활용하라고 조언한다고 합니다.
조잘거림을 금지하기
재잘거리도록 방관하고 듣지 않기
듣는 척하기(중간에 적절하게 맞장구를 쳐 주면서)
선택적으로 듣기(쓸데없는 말은 버리고 중요한 내용에 귀를 쫑긋 세우기)
아이의 모든 말에 정성을 다해 듣기
나아가 독일의 신학자 폴 틸리히는 '사랑의 첫째 의무는 듣는 것이다'라고 주장합니다.
"사랑이 별게 아니다. 잘 들어주는 것. 오직 그뿐이다." 옳다. 다들 자기 말 좀 들어 보라고 아우성치는 세상에서 사랑이란 상대의 말을 흥건하게 들어주는 것이 아니겠는가.
페라리는 듣기 훈련의 하나로 상대방의 "이야기가 끝나더라도 즉각 끼어들지 말고 5분만 침묵하라"라고 권면한다. 이는 말상대가 남은 이야기를 다 꺼내도록 기다려 주는 배려다. 그러면 "기대하지 않았던 새로운 아이디어나 통찰이 담긴 발언이 튀어나오고 미처 헤아리지 못했던 상대의 진심을 눈치챌 수도 있는 순간"이 보상으로 주어진다.
저자는 5분 기다림에 대한 보상에 충분하다는 듯이 덧붙입니다.
상대가 이야기를 다 한 것 같아도 실은 진짜 하고 싶은 말이 바로 뒤에 대기 중일 때가 적지 않다. <중략> 더 깊은 이야기, 혹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를 듣게 될 것이다.
각오하는 지금은 아직 생소하기 짝이 없는 표현이라 머쓱합니다. 하지만, 아주 기본적인 것들부터 실천하면서 아기 발걸음으로 나아가면 언젠가는 도달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처음에는 소리부터 제대로 듣고, 상대가 그 의미를 어떻게 사용하는지 따져 물으면서 '듣는 귀'가 되려고 노력하는 일부터 시작하겠습니다.
[1] 최근 <당신이 옳다>는 저에게 일종의 경전으로 곁에 두고 보는 책이 되었습니다.
[2] M. 스캇 펙, <아직도 가야 할 길> (최미양 옮김, 율리시즈, 2011)
1. 계획은 개나 주자
8. 나의 경력관리와 직업사
11. <강력의 탄생> 그리고 개인 차원의 창조적 파괴
12. 이젠 어른이 돼야 해, 소년
18. 성공했냐가 아니라, 목적이 뭐고 어떻게 하느냐가 문제
19. 상대방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려면 무엇을 해야 할까?
22. 대화를 하세요, 그게 관계예요
23. 협력에서 방향성의 문제란?
24. 아기 발걸음과 실패할 용기
25. 나를 흔드는 일들 고찰하기
28. 전할 내용이 있다면 번거로움을 넘어 소통할 수 있다
31. 들음의 여정의 다시 시작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