週末안영회 2023 - 들음의 여정
지난 글에서 만든 경청의 과정에 따르면 '자기 이해'에 해당하는 내용에 대한 기록입니다.
와시다 기요카즈 <듣기의 철학>에 있다는 다음 문장은 명문이 아닐 수 없습니다.
듣기는 상대에게 자기 이해를 낳는 것이며 그래서 산파술이라고 부를 수 있다.
다음 문장을 읽으며 떠오르는 분이 있어 고마웠습니다.
우리는 말하면서 생각을 정리하고 새로운 발상도 떠올린다. 하지만 이는 누군가 잘 들어주는 사람이 있어야 가능하다.
반면에 나 역시 누군가에게 그렇게 하고 있는지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한편, 제임스 셜리반[1]의 다음 문장 역시 경청의 힘을 설명합니다.
존재의 자기 발산인 '말'을 판단하거나 교정하려는 시도 없이 들을 때 화자는 자신의 참된 빛깔을 보여 줄 용기를 내고, 그렇게 자기 검열을 거치지 않은 날것 그대로의 자신을 드러낸다. 그런 자리에 무성한 것은 이미 사랑이다.
<듣기의 말들>에서 가와이 하야오 선생의 권고를 보니 전문적인 코칭에 눈을 뜨게 한 사건들도 떠오릅니다.[2]
말하면 들어라. 말하지 않아도 들어라.
어떻게 말하지 않아도 들을 수 있을까요? 슬램덩크 명대사 '왼손은 거들뿐'에 힌트가 있습니다. 그리고 <듣기의 말들> 다음 쪽에는 그 예시가 있습니다.
"그건 그렇겠지. 하지만 네 고양이에 대해 얘기해 줘."
한편, 카를 메닝거 박사는 <빛나는 인격>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고 합니다.
듣는 일은 신비한 자력을 가진 창조적인 힘입니다. 사람들은 자기 말을 잘 들어주는 친구의 곁에 머물고 싶어 합니다. 누군가 우리말에 귀 기울여 줄 때, 우리의 존재는 만들어지고 열리고 확장됩니다.
피터 드러커에 따르면 자문이나 컨설팅의 본질도 경청에 있다고 합니다.
가장 중요한 전제조건은 열심히 들어주는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열심히 이야기를 할 수 있고, 그 과정에서 스스로 해법을 찾는다.
복음서 풀이에도 비슷한 교훈을 주는 문장이 있습니다.
경청하면 상대가 스스로 문제를 해결한다는 점을 여기에서도 확인한다.
말하고 싶은 생각이 들 때 떠올리면 좋을 지침입니다.[3]
캐치볼을 할 때 청자는 자신의 생각을 섞지 말고, 화자가 표현하지 않는 것은 덧붙이지 말라고 당부한다. 특히 "민감하고 중요한 대목은 그 사람이 구사한 단어를 고스란히 반복하라"
히가시야마 히로히사는 <듣기의 힘>에서 상담가의 맞장구의 고급 기술은 내담자의 말을 되풀이하는 맞장구라고 합니다. 그게 고급 기술인 이치를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사람은 자기 어휘가 그대로 돌아오면 저항을 느끼지 않기 때문이다.
<당신이 옳다>에서 배운 '충조평판'이라는 일종의 중독(?)을 피할 수 있는 대책이 될 수 있을까요?
인간에게는 본능적으로 타자의 충고와 개입을 달가워하지 않는 성향이 있고, 무엇보다 의사가 주도하면 환자는 자신에게 문제를 해결할 힘이 있음을 망각한다. <중략> 앞으로는 해결사나 조언자의 자리에 서기를 정중히 거절하고, 그가 손수 답을 찾을 거라고 믿는 신자(信者)의 자리, 그의 말을 묵묵히 듣는 경청가의 자리에 설 수 있을까?
예전에 대화가 통하는 장면에서 '사랑방'이란 표현을 떠올린 일이 있는데, 아래 문장이 그 상황에 대해 부연하는 듯합니다.
"친구를 찾아서 경청하는 귀에 말하는 사람은 행복하다"인데 여기서 친구는 곧 '듣는 귀'를 가리킨다.
여기에 더하여 글을 쓰고 있는 현재 링크드인으로 받은 Kent Beck의 메시지는 제 생각을 더 풍부하게 합니다.
특히 'my people'이라는 표현은 앞서 느낀 '관계'에 대해 비슷한 맥락을 전제한 듯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가 말한 피드백(feedback)이 효과적으로 작용하려면 경청하는 상대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인식을 하게 해 주기 때문입니다.
제 주변에는 고맙게도 제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분들이 있어 생각을 발전시켜 올 수 있었습니다. 더 확장해 보면 popit과 브런치 독자님들도 여기에 해당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상대에게 교류를 돌려주지는 못한 듯하여 분발이 필요합니다. 무엇보다 내 생각을 강요하는 오랜 습관을 버리고 '상대의 어휘'를 쓰며 듣는 훈련부터 익힐 예정입니다.
육아를 하는 제 입장에서는 그렇게 하다 보면 기대할 수 있는 장면이 있습니다. <듣기의 말들> 30쪽에 헤르베르트 플뤼게의 <아픔에 대하여>에서 인용한 문장이 있습니다.
아직 '언어로 무르익지 않은 것'이 아이의 아픔이다. 심장병 아동은 자신의 아픔을 오로지 태도의 변화로만 표현할 뿐이다.
먼저 <다른 사람 마음은 짐작하지 말고 물어보기>편의 동기가 된 아이의 우는 모습이 떠오릅니다.
책 65쪽 다음 문장을 보면, 아이가 충분히 공감을 받고 난 후에 비로소 공감할 수 있는 상태가 된다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아들도 자신의 실망을 충분히 확인한 다음에야 아빠 입장에서 서야 한다고 했다.
물론, 이미지를 소환한 까닭은 경청에 따른 자기 이해가 아닙니다. 제가 얼마나 듣지 않는지를 깨달은 전혀 다른 맥락이긴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듣기는 매우 어렵고, 듣고 이해하는 노력은 자기 이해라는 부가적인 선물까지 얻는다는 점을 <다른 사람 마음은 짐작하지 말고 물어보기>편을 쓸 때 깨달았기 때문인 듯도 합니다. 한편 <어떻게 원하는 것을 얻는가>에서 강조하는 상대방의 머릿속 그림 그리기 단계도 떠오릅니다.
다시 책으로 돌아가면 저자는 아픔의 언어가 얼마나 궁핍한지 그래서 이를 듣기 위해서는 특별한 노력이 필요함을 설명합니다.
"햄릿의 생각과 리어왕의 비극을 표현할 수 있는 영어가 오한과 두통을 위한 말을 갖고 있지 않다니." 병듦을 표현할 어휘가 태부족한 것은 그 이유다. 실제로 우리가 통증에 몸부림칠 때 동원 가능한 어휘는 '아프다'가 유일하다. 그 밖에는 짐승의 언어에 가까운 끙끙 앓는 소리가 전부다. 언어의 궁핍에 굴하지 않고 최대한 고통을 표현하려는 몸짓은 얼마나 눈물겨운가. 언어를 넘어서서 아픔을 포착하고 공감하려는 시도는 또 얼마나 눈물겨운가.
그리고 들은 내용은 둘의 공동 소유물이란 점도 잊지 않으려고 노력하겠습니다.
<듣기의 말들> 39쪽의 다음 문장은 마치 관계의 비밀을 알려주는 듯합니다.
짙은 사귐을 나누려면 상처받기 쉬운 부위를 드러내는 용기를 발휘해야 한다. 감추었던 나의 그늘을 관계의 빛에 노출하는 용기가 네게도 맨산을 드러내는 용기를 촉발한다. <중략> 기억하라. 내 비밀을 공유한다는 것은 누군가에게 비수를 쥐여 주는 모험이다.
그리고 설마 상대가 배신(?)을 하더라도 나는 비밀을 지키려고 노력해야겠다는 마음으로 읽습니다.
경청은 듣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듣고 간직하는 것까지를 의미한다. 우리가 누군가의 비밀을 듣고 간직하는 것은 인간의 마땅한 도리이지만, 나아가 이 세상에 우정이 번식할 토양을 일궈 주는 보다 큰 사랑이다.
한편, 복음서 풀이를 통해서 예수의 경청은 사람들을 모이게 하는데 영향을 끼쳤음을 시사합니다.
경청하면 사람을 얻게 된다는 말, 이청득심(以聽得心)은 허언이 아니다.
<듣기의 말들>은 경청에 대한 책이지만, 아래 글은 기도에 대해 몰랐던 놀라운 비밀을 알려 주는 듯도 합니다.
기도가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는 것은
아마 그런 이유 때문이겠죠.
왜냐하면 하나님은 언제나 침묵하시고
어떤 충고도 하지 않으시며
일을 직접 해결해 주려고도 하지 않으시니까요.
그러니 부탁입니다.
침묵 속에서 내 말을 귀 기울여 들어주세요.
만일 하고 싶다면.
당신의 차례가 올 때까지 기다려 주세요.
내가 내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기 위해서 저녁에도 기도하는 습관을 추가해야겠습니다.
[1] 제임스 셜리반 <세상에서 가장 강한 힘 경청>
[2] 더불어 반면교사로 멘토병에 걸린 듯이 보였던 자칭 애자일 전문가도 떠오릅니다.
[3] 유진 T. 젠들링 <포커싱Focusing>
1. 계획은 개나 주자
8. 나의 경력관리와 직업사
11. <강력의 탄생> 그리고 개인 차원의 창조적 파괴
12. 이젠 어른이 돼야 해, 소년
18. 성공했냐가 아니라, 목적이 뭐고 어떻게 하느냐가 문제
19. 상대방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려면 무엇을 해야 할까?
22. 대화를 하세요, 그게 관계예요
23. 협력에서 방향성의 문제란?
24. 아기 발걸음과 실패할 용기
25. 나를 흔드는 일들 고찰하기
28. 전할 내용이 있다면 번거로움을 넘어 소통할 수 있다
31. 들음의 여정의 다시 시작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