週末안영회 2023 - 들음의 여정
지난 글에서 만든 경청의 과정에 따르면 '나를 내려놓기'에 해당하는 내용에 대한 기록입니다.
들으려면 걸음도 멈추고 일도 멈추고 생각도 멈춰야 한다. 멈추지 않고는 제대로 듣지 못한다.
몸과 생각을 모두 멈춘다는 말은 세계관도 꺼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즉, 듣자마자 내 기준으로 판단하는 버릇을 극복해야 한다는 뜻이죠. 스피노자의 말에 따라 인식이 대상을 만든다고 생각하면, 나의 인식을 벗어나야 진정으로 다른 사람의 인식을 귀로 듣고 내 안에 다시 구현할 수 있습니다.
<듣기의 말들> 100쪽에 다음과 같은 문장이 있습니다.
모든 사물의 본질을 제대로 인식하려면 '에포케'가 필요하다.
최근에 읽은 탓에 <아티스트로 살기 위해 보는 법을 배워야 한다>편에서 인용했던 <이카루스 이야기> 내용이 떠오릅니다.
그냥 바라보는 것이 힘든 이유는 자신에게 이미 익숙한 지식을 멀리 치워두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에포케가 무엇일까요?
에포케epoche, 고대 그리스 철학에서 말하는 '판단 중지', 사물에 대한 선입견이나 습관적 이해를 멈추고 직관하라는 것
그리고 박총 님은 에포케를 스피노자의 교훈과 연결합니다.
스피노자는 "인식이 대상을 만든다"라고 선포하여 대상이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선이해가 대상을 규정한다는 점을 짚었다.
<당신이 옳다>에서 충초평판의 굴레에서 나오기 위해서 <사람의 감정은 항상 옳다>라고 설파한 내용에 스피노자의 교훈을 적용해 보려면, 다음 박총 님 말씀을 따라야 할 듯합니다.
상대방을 빛의 속도로 판단하는 우리가 진정한 의미의 경청을 경험하려면 판단중지를 길동무로 취해야 한다.
다행스러운 사실은 '직장인의 심정'이라는 제한된 주제에 대한 것이기는 해도 내가 절대로 다른 사람 입장을 미루어 짐작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일이 있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점심시간에 본 영상에서 박문호 박사님이 말씀하신 '겸허'를 배양하려면 멀었다는 생각을 하게 해 주는 문장을 만납니다.[1]
아침에 일어나서 아무것도 당연시하지 말고 세상을 바라보라. 모든 것이 위대한 현상이다. 모든 것이 믿을 수 없이 신기하다. 삶을 시시하게 대하지 말라.
한편, 육아하는 입장이라 다음 글은 특별히 더 와닿습니다.
아이의 말을 들어주는 것이 상입니다.
감동하는 것은 더 큰 상입니다.
박문희 님의 <들어주자 들어주자>에서 저자가 인용한 글이라고 합니다. 한편, 박문희 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아이의 말대꾸는 버릇없음이 아닌 "아이가 싱싱하게 자란다"는 증거다. "아이의 말을 잘 들어주면 아이의 마음을 청소해 주는 것"
그리고 송지희 <듣는 엄마 말하는 아이>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고 합니다.
아이의 말을 비판 없이 들어주면 제일 먼저 방어적인 태도가 사라진다.
<들음의 여정을 다시 시작하자>에서 고해한 대로 아직 어머니의 말은 흥건하게 들을 자신이 없지만, 먼저 아이의 이야기부터 시작해야 하겠습니다.
마르틴 부버에 따르면 이 세상에 독립된 '나'는 없다. 나는 오직 '나-너' 혹은 '나-그것'의 '나'로 존재할 뿐이다.
최봉영 선생님이 한국말의 기본 바탕이라고 주장하시는 '쪽인 나'가 떠오릅니다.
냉혹하게 말하자면, 경청하지 않는 사이는 '나-너'의 관계가 아니라 '나-그것'의 관계에 불과하다. 경청이 결여된 사이는 비인격적인 관계요. 사물과 맺는 관계라고 해도 틀리지 않다. "너와 나는 오직 온 존재를 기울여서만 만날 수 있다." 이 위대한 선포가 경청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면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더불어 <대화를 하세요, 그게 관계예요>에 담았던 느낌들도 떠오릅니다.
경청을 동반하지 않으면 제대로 대화를 할 수 없고, 대화가 없다면 인간적인 관계로 보기 어렵다는 생각까지 듭니다. 실제로 그렇게 생각한다기보다는 제 각오가 그러한 듯도 합니다.
<당신이 옳다>에도 '진심으로 궁금해야 질문이 나온다'는 구절이 있습니다.
누군가를 공감하기 위해 누가 재가 돼버리는 것은 공감이 아니라 감정 노동이다. 공감을 잘못 이해하면 그렇게 탈진만 한다. 공감은 한 사람의 희생을 바탕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공감은 너도 있지만 나도 있다는 전제에서 시작되는 감정적 교류다.
그리고 뜨끔하게 하는 문장이 뒤따릅니다.
궁금해야 질문이 나온다. 궁금하려면 내가 내린 진단과 판단이 전부가 아닐 수 있다는 생각의 틈이 있어야 한다.
다른 사람에 대한 호기심이 없다시피 한 저에게는 굉장한 도전이 될 듯합니다. 그리고 경청과 관계의 연관성을 강조하는 설명을 옮겨 둡니다.
남들과 깊은 관계를 맺고 오래 유지하는 사람은, 아는 것도 별로 없고 재미도 없는 내 이야기에 귀문을 여는 사람이다. 누군가 내 이야기를 넋 놓고 들어 준 경험이 있는가? 그때 그 사람의 표정은 잊히지 않고 오래오래 각인된다.
다음 구절들은 '나를 내려놓기'라고 붙인 이름과 잘 어울리는 내용입니다.[2]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자신에게로 향해야 한다는 생각을 버리고 기꺼이 다른 사람들에게 영광을 돌리면, 자신의 마음에 고요함이 찾아드는 기쁨을 맛볼 수 있다. <중략> 주목을 끌고자 하는 욕구를 포기하고, 대신 다른 사람과 영광의 기쁨을 진심으로 함께 나누겠다고 마음속 깊이 결심하는 일은 즐거울 뿐 아니라 마음을 평화롭게 만드는 방법이기도 하다.
뒤이은 문장은 구체적인 실천법까지 제시합니다.
입을 가만히 다문 채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지켜보도록 하라. 그리고 그냥, "정말 멋진 일이군요." 혹은 "좀 더 얘기를 해 주세요"하고 말하며, 상대가 자유롭게 얘기를 이어 가도록 놓아두라. 큰 관심을 보이면 보일수록 얘기하는 사람은 더욱 신이 날 것이다. 당신이 자신의 말을 주의 깊게 경청한다는 것을 깨닫고 나면 경쟁하려는 마음도 수그러든다.
단락의 제목은 저자가 다음 문장 이후에 인용한 정현종 시인의 시구 일부입니다.
'울지 마'는 관습적인 위로의 말이기도 하지만 분위기를 망쳤다는 완곡한 원망이거나 어떻게 반응할지 모르는 당혹함의 토로이기도 하다. 울음은 잠자코 들어주는 거다. 울음 역시 경청의 대상이다. 경청이 어렵다면 그칠 때까지 가만히 있기라도 하는 거다. 슬픔이 잠시나마 보송해질 때까지.
귀에 피가 날 정도로 '울지 마'를 들었지만 다행히 <감정의 언어 지각하고 적극 대응하기>를 쓸 때 둘째가 충분히 울라고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 이미지를 앞으로 '울음을 듣는 능력'을 소환할 때 사용할 예정입니다.
73쪽의 문구도 비슷한 이야기를 덧붙입니다.
슬픔을 말하라는 입, 슬픔을 듣겠다는 귀, 슬픔을 안아 주겠다는 손이 그리운 시대다.
<당신이 옳다>에서 충조평판의 굴레에서 나오기 위해서 <사람의 감정은 항상 옳다>는 사실을 설명합니다. 이에 상응하는 박총 작가의 문구가 등장합니다.
위로가 사치일 정도로 하찮은 슬픔은 없다. <중략> 듣기는 비교급을 사용하지 않는다
듣기는 비교급을 사용하지 않는다. 와~ 정말 대단한 글귀입니다. 듣기란 듣고 판단하기가 아니네요. 제가 지금 듣기에 대한 이해한 수준은 무의식적으로 듣기를 듣고 판단하기로 실행했다는 점과 듣기의 올바른 실천은 들어주기에 가깝다는 점입니다.
나아가 소음까지 들을 수 있으려면 얼마나 나를 내려놓아야 할까요?
과하지만 않다면 고깝게 듣지 말고 곱게 듣는 세상이 되면 좋겠다. 너도 내고 나도 내는 소리, 사람이라면 응당 내는 소리가 아닌가.
제주에 살면서 가끔 새소리가 들릴 때 좋다고 느낀 일은 잊지만, 자연의 소리를 듣지 못하는 나로서 다음 문장은 경이롭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달팽이를 키우면 뭐가 좋으냐고 물으니, 밥으로 오이를 넣어 주고 고요 속에 머무르면 시각사각 갉아먹는 소리가 들린단다. 사람이 음식 먹는 소리도 ASMR로 듣는 세상에서 달팽이가 오이 씹는 소리라니! 하고 많은 동물 가운데 하필 달팽이냐며 핀잔을 준 게 무색해졌다.
멈추어서 듣는 노력을 하겠습니다. 아마도 듣기 몰입에 임하기 전에 일단 듣겠다는, 아니 '들어주자'는 태도를 취하지 않으면 실천을 못할 듯합니다. 그만큼 경청은 고강도의 노동이라 생각합니다. 또한, 마르틴 부버의 관계 속에 내가 존재한다는 말은 대화가 바로 관계라는 강연 내용을 소환해서 경청과 대화, 그리고 관계의 연관성에 이해를 더한 듯합니다.
그리고 말하기로 승리(?)하려는 욕구를 다스려서 다른 이에게 영광을 돌리겠다는 자세를 구현하기 위해 처음에는 "정말 멋진 일이군요." 혹은 "좀 더 얘기를 해 주세요" 말을 초식(招式)처럼 훈습해야 할 듯합니다. 그리하여 슬픔을 듣는 일을 지나면 언젠가는 자연의 소리까지 들을 수 있는 겸허(謙虛)한 자세를 갖출 수 있기를 기대해 봅니다.
[1] 아브라함 J. 헤셸, <경청의 영성>
[2] 리처드 칼슨, <우리는 사소한 것에 목숨을 건다> (강미경 옮김, 창작시대, 2004)
지난 週末안영회 2023 연재
<두 아들과 함께 배우기> 연재로 일부 글을 분리하면서, 기존 글 중에서 두 개가 줄었습니다.
1. 계획은 개나 주자
8. 나의 경력관리와 직업사
11. <강력의 탄생> 그리고 개인 차원의 창조적 파괴
12. 이젠 어른이 돼야 해, 소년
18. 성공했냐가 아니라, 목적이 뭐고 어떻게 하느냐가 문제
19. 상대방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려면 무엇을 해야 할까?
22. 대화를 하세요, 그게 관계예요
23. 협력에서 방향성의 문제란?
24. 아기 발걸음과 실패할 용기
25. 나를 흔드는 일들 고찰하기
28. 전할 내용이 있다면 번거로움을 넘어 소통할 수 있다
31. 들음의 여정의 다시 시작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