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9화 : 취약점의 해결

연작소설

by 공대생의 심야서재

다음 날 아침, 일찍부터 서둘러야 했다. 6시에 눈을 뜨자마자 샤워를 하고 커피를 마신 후, 간단하게 레토르트 볶음밥을 데워 먹었다. 그리고 커피를 한 잔 더 내려마신 후, 5분 동안 무료하게 시간을 보내다,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구의역에서 광화문역까지 갈아타는 구간을 한 번 갈아탔고 1시간이 채 걸리지 않아서 광화문역에 도착했다. 곧바로 4층까지 있는 스타벅스, 3층에 자리를 잡고 아이스커피 벤티 사이즈를 받아 들었다. 그렇게 자리를 잡으니 9시, 줌 원격 접속 시간까지 약 1시간이 남은 셈이었다.


1시간 동안 그 무엇도 하지 않았다. 단지 나는 기다리는 사람일 뿐이다. 이전 직장이든 오후에 만나는 연희든 나는 누구든 기다린다. 다만, 기다림 끝에 무엇이 찾아와 줄지 예측할 수 없다. 계획한다고 그것이 얼마나 치밀한 미래를 전달해줄지 알 수 없다. 그저 내 성향대로, 하고 싶은 대로 변칙적으로 살아가면 그만이 아닌가.


10시가 됐다. 나는 강차장이 전달해준 Zoom 주소로 접속했다. 얼마간 기다리자 그들이 나에게 제어권을 넘겼다. 강차장의 피씨로 원격 연결이 된 상태에서 또다시 원격으로 서버와 연결했다. 말하자면 인셉션에 나오는 장면처럼 나는 하나의 타인의 환경에서 또 다른 타인의 환경으로 출입구가 존재하지 않는 끝을 향해 달려갔다.


여러 환경으로 진전하니까, 마치 내가 여러 개의 시공간으로 분할된다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정신을 차리고 나면 나는 여전히 스타벅스 3층 구석에 앉아서 노트북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평범한 개발자에 지나지 않았지만…


문제점과 취약점을 찾으려 애썼다. 원격 디버깅을 위해 필요한 프로그램을 가동하고 문제가 있을 거라고 짐작되는 지점에 브레이크 포인트를 걸었다. 그리고 콜-스택을 통해 특정 변수의 값을 추적하고 메모리 릭이 일어나는 건 아닌지, 자원이 누수되는 지점을 찾았다.


문제점은 한 두 개가 아니었다. 차라리 처음부터 새롭게 코드를 짜는 게 나았다. 이건 히로시마에 떨어진 원자 폭탄을 가슴에 싸안고 상공에서 땅으로 함께 추락하는 것과 같다. 이런 건 떠맡으면 안 됐다. 하지만 나는 그들과 온라인으로 계약을 맺고 말았다. 나도 그들과 한 배를 탄 셈이 됐다. 일단 시스템이 가진 문제점들을 노션에 체크리스트로 만들었다. 그리고 각 결함을 픽스할 세부적인 날짜를 적었다. 말하자면 데드라인을 설정한 셈이었다. 우선순위를 설정하고 특급으로 분류된 일들부터 처리하자고. 오늘 주어진 시간은 3시간이다. 1시에는 무조건 노트북을 덮어야 한다. 연희와의 소중한 데이트가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내가 최대로 집중할 수 있는 물리적 시간은 2시간이다. 아무리 최선을 다해도 2시간 이상은 무리다.


결함을 어떻게 보완할 것인지, 코드를 새로 짤 것인가, 임시방편으로 문제를 봉합할 것인가, 고민했다. 하지만 이 시스템은 과거의 내가 만들었다. 그럼에도 나에게 주어진 책임은 퇴사 덕분에 이미 면책됐다. 나는 이미 퇴사자의 신분이다. 결함을 멋지게 봉합한다 한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 그래 봤자, 이 시스템은 그들의 소유지 내 것이 아니다. 애써 최선을 다할 필요는 없다는 이야기다.


최우선적으로 풀어야 할 숙제부터 해결하면 된다. 주어진 시간은 약 일주일 정도다. 그 시간이라면 남은 문제는 충분히 척결해버릴 수 있다. 즉결 심판하듯이 하나씩 처리해나가면 된다. 덜도 아니고 더도 아니다. 그들의 눈높이도 내 눈높이도 아니다. 평균 정도만 해내면 되는 것이다.


본격적인 일이 시작되기에 앞서서 굳이 코딩까지 나설 필요가 없는 일들, 예를 들어, 인바운드와 아웃바운드 포트 설정만으로 충분히 끝나버릴 비교적 간단한 일들을 2시간에 나눠서 깊이 고뇌하는 철학자처럼 해결한 다음, 오늘 해결한 이슈 사항에 대해 강차장에게 리포트했고, Zoom 접속을 해제했다. 연희가 서점에서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었다.


가방에 노트북을 넣고 전원 케이블을 돌돌 말아서 구석에 넣은 다음 스타벅스 문을 열고 나왔다. 정확하게 한 시 오 분 전이었다. 그래, 이 정도라면 서점까지 걸어가는 시간, 넉넉잡고 오분이면 정각에 정문 앞에 도착할 것이다. 연희에게 나는 시간을 비교적 엄수하는 인간으로 계속 남게 될 공산이 컸다.


서점 앞에 도착했을 때, 연희는 하얀색 원피스를 입고 서 있었다. 밝은 원피스 색깔 탓이었을까, 다른 어느 누구보다 연희에게선 독보적인 광채가 났다. 사람에게 자연광이 발생한다는 것, 자체 발광하는 빛의 위력이 어떤 느낌인 것인지 나는 100미터 바깥에서도 충분히 그것을 감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모른 척해야 했다. 감격스러움과 그것에서 피어나는 감정 표현은 내 것이 아니다. 그런 것은 한가하게 연애나 하는 20대들에게나 어울린다.


연희는 나를 보자마자 손을 잡고서는 서점 안으로 끌고 들어갔다. 그러더니 호구 조사부터 시작하는 것이었다. “한 달에 책 몇 권 읽어요? 최근에 감명 깊게 본 책이 뭐예요? 서점은 자주와요? 어떤 작가를 좋아해요?” 와 같은 폭풍 같은 질문들을.


나는 그 질문들을 단숨에 소화시킬 자신이 없어서 하나씩 대답해주겠다고, 그리고 단답형으로 말하겠노라고, 나에게서 서술형의 답안은 기대하지 말라고 말했다. “저요? 책이란 것과 전혀 친하지 않고요. 서점도 자주 안 오고요. 좋아하는 작가도 없을뿐더러. 당연히 감명 깊게 본 책도 없어요.”라고 내 취미를 숨기며 말했다.


“책 안 읽는다고요? 그러면 지난번에 <그리스인 조르바>는 뭐예요? 그 정도 책이라면 꽤 마니아틱 하지 않아요? 서점 매대에서 가볍게 들어서 읽는 책은 아닌 걸로 아는데요?”라고 심문하듯 말했다.


“그건 누구한테 기념일 날 선물로 받은 거예요. 선물은 보통 주는 사람이 선호하는 물건으로 간택이 되잖아요? 그러니까 그리스인 조르바는 제 취향이 아니라 그분의 취향인 겁니다. 선물해준 사람이 무안하지 않게 어떻게라도 읽어내려고 노력 중인데, 10년째 읽는 중이라면 믿겠어요? 그 불가능한 걸 제가 해낸답니다. 전혀 이해하지 못하면서 폼으로만 들고 다니는 거예요. 그러니 그 책의 의미와 나를 과장해서 연결하려는 태도는 옳지 못해요”라고 뭔가를 감추는 표정으로 내가 말했다.


매대에 진열된 책들을 훑어보고 그러다가 베스트셀러 코너에 전시된 책들에 관심을 가져봤지만 딱히 어떤 책을 읽어야겠다는 동기 같은 건 생기지 않았다. 내 마음은 지금 온통 다른 곳에 향해 있기 때문이었다.


남해에 있을 때는 서울에서 벌어진 일들은 생각하지 않았다. 오직 남해 그리고 나만 생각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고려해야 할 변수가 너무 많이 생겨버렸다. 도착하자마자 바로 전 직장이 내 삶에 다시 개입을 시작했고 나는 그것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다. 아무리 몇 개월치를 살아갈 돈이 비축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지금 제대로 일하지 않으면 그 이후의 삶은 보장할 수 없다. 싫어하는 인간이 독사처럼 득시글거리는 소굴이라 하더라도 때로는 기꺼이 눈을 감고 들어가야 한다. 그것이 현재의 내 운명이다.


책을 친해지려 노력할수록 오히려 글자에 더 집중이 되지 않아서 빨리 이곳을 탈출해야겠다고 생각할 무렵, 강차장에게 전화가 왔다.



제1화 : 평범한 개발자에게 주어진 기묘한 특명 제2화 : 난 프런트 앤드 개발자라고!

제3화 : 사라진 김대리와 주인이 없는 버그 제4화 : 신촌에 사는 미식가와의 만남

제5화 : 김대리와 나교수의 은밀한 시간 제6화 : 믹스 커피의 순수성에 대해서

제7화 : 길박사의 족집게 강의 제8화 : 배신

제9화 : 김대리의 제안 제10화 : 개선 작업

제11화 : 꿈의 암시 작용 제12화 : 미행 1

제13화 : 미행 2 제14화 : 미행 3

제15화 : 미행 4 제16화 : 방황 1

제17화 : 방황 2 제18화 : 떠남 1

제19화 : 떠남 2 제20화 : 만남 1

재21화 : 만남 2 제22화 : 만남 3

제23화 : 전환 1 제24화 : 전환 2

제25화 : 숙박 1 제26화 : 숙박 2

제27화 : 숙박 3 제28화 : 방벽

제29화 : 바깥쪽 제30화 : 산책

제31화 : 복귀 제32화 : 정리

제33화 : 만남 제34화 : 스승과의 만남

제35화 : 조연과 주연 제36화 : 하수와 고수

제37화 : 잘못된 것들은 제자리로 제38화 : 원격 업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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