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0화 : 모든 것은 다시 원점으로

연작소설

by 공대생의 심야서재

“홍대리, 잠깐 통화 가능해?” 평소와는 다른 차분한 풍의 강차장이었다.

“오늘 일처리 한 게 무슨 문제라도 생겼나요?” 내가 물었다.


“아, 그런 건 아니고 지금 회사가 갑자기 경황스러워져서, 지금 모든 프로젝트가 올 스톱됐어. 진행되던 프로젝트가 원인 불명의 사건 때문에 홀드 된 거지. 윗선의 까다로운 지시사항이야. 그래서 홍대리한테도 미안하게 됐는데, 당분간 진행하던 일을 보류해야 할 것 같아, 라고 말해야겠어. 미안해, 지금은 정신이 사나워서 내가 나중에 다시 전화할게.”라고 용건만 최대한 추려낸 강차장이 자신의 말을 하고 전화를 끊었다.


황당한 일이다. 갑자기 전화해서 프로젝트를 마무리해달라던 까탈스러운 인간들이 이제는 급작스럽게 전화해서 일을 홀드 하란다. 이것들이 단체로 장난치나. 짜증이 순간적으로 솟구쳤다. 옆에서 관심 있게 엿듣던 연희가 한마디 했다.


“무슨 일이에요? 가만히 돌아가는 분위기를 지켜보니까, 이전 직장하고 다시 관계가 시작된 거죠? 내가 이런 말은 안 하려고 했는데, 민석씨 호구예요? 그놈들과는 아예 상종을 하지 말아야지, 내칠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뭘 도와달라는 거예요? 민석씨는 뭐 옛정 같은 게 생각해서 도와주기라도 하려고 그런 거예요? 지금 자선 사업해요?”


“아니, 그런 건 아니고요. 예전에 제가 몸담았던 프로젝트가 있는데, 대타도 아직 뽑지 못했고 출시도 가까워졌다고 해서 조금 도와주려고 한 것뿐이에요. 조금 도와주고 돈 많이 받으면 좋잖아요. 시간당 25만 원씩 받기로 했어요. 그 정도면 괜찮죠?”


“아니, 이 사람아. 그래요 참 좋겠어요. 대체 최저 시급의 몇 배에요? 금방 부자 되겠어요. 아주 좋아, 근데 배팅할 줄 모르네. 아니 칼자루는 지금 누가 쥐고 있어요? 민석씨 아니면 그 일 해줄 사람 있어요? 표정 보니까 딱 알겠네. 민석씨 밖에 없는 거네. 그럼 칼자루는 민석씨가 쥐고 있는 게 맞는데, 왜 지금 칼날을 쥐고 손에 피를 철철 흘리고 있어요? 나, 진짜 이해를 못 하겠네. 그런 건 말이에요. 내가 협상을 좀 해봐서 아는데, 러시안 스타일로 승부를 거는 거예요. 시간당 25가 뭐예요. 나 같으면 250을 받아도 할까말까인데, 어쩔 수 없이 그들은 민석씨를 찾을 수밖에 없는 거잖아요. 근데 어떻게 25에 합의를 봤어요?”

“그렇죠. 그 시스템 내부를 속속들이 이해하고 있는 건 저뿐이죠… 다른 사람인 일정 안에 절대 못 맞춰주죠.”

“그럼, 이 멍청이 같은 사람아, 그걸 25로 딜을 해요? 25가 뭐야. 시간당 250은 불러야지. 그 회사 내가 좀 알아보니까 돈도 많은 회사더만, 몇 시간이 걸릴지 며칠이 걸릴지는 모르지만, 일단 그놈들의 취약성을 민석씨가 캐치한 거니까, 그리로 집요하게 파고들었어야죠. 한몫 챙길 때는 판을 크게 벌여서 크게 먹어야 하는 거예요. 지금 무슨 조카들하고 소꿉놀이해요?”

"전 조카가 없는 걸요?"


나는 또다시 연희의 연설에 빠져들고 말았다. 솔직하게 인정한다. 나는 협상가적인 면에서 많이 부족한 게 사실이다. 특히 돈이 개입되는 문제, 연봉과 계약 이런 부분에는 더 취약하다. 월급도 주는 대로, 사이드잡을 할 때도 그들이 제시하는 대로 계약했다. 물론 계약서 따위는 절대 꼼꼼하게 검토하지 않는다. 그런 걸 들여다보느니 그리스인 조르바를 한 문장이라도 더 읽는 게 훨씬 유익할 테니.


“안 되겠어요? 민석씨 내가 진짜 심각하게 말하는데요. 앞으로는 돈과 관련된 문제는 나하고 먼저 상의해요. 그냥 맡겨두다가 이 사람 영혼까지 무료로 증여해버릴 것 같은 태세네. 알았어요?”


“연희씨. 나서 주고 생각해주는 건 고마운데요. 연희씨가 저한테 뭔데요? 지금 왜 그러시는지 저는 잘 모르겠어요. 아니 도저히 이해를 못 하겠어요. 중간에서 커미션이라도 챙기고 싶어서 그러는 거예요? 대체 왜 자꾸 내 일에 개입하려 드는 거예요?” 내가 다소 짜증 나는 투로 물었다.


순간 찬물을 확 끼얹은 것처럼 정적이 찾아왔다. 나와 연희 사이에 존재하지 않았던 벽이 불쑥 솟아난 기분이랄까. 연희는 말없이 내 얼굴을 멍하게 쳐다보다가, 정말 이해할 수 없니?라고 묻는 것처럼 표정을 짓고는, 입시에서 최저 점수를 받은 사람처럼 말없이 돌아섰다. 그리곤 “연희씨…”라고 짧게 그녀를 부르는 내 목소리에도 일절 반응하지 않고 역사 안으로 사라졌다.


내가 말실수라도 한 걸까? 하지만 나는 실제로 그녀와 나 사이에 무엇이 가로막고 있는지 아니면 이어주고 있는지 알 수 없다. 나는 어쩌면 관계라는 것을 점검하고 나아가 보다 명료하게 서로가 서로에게 무엇이 될지 구체적으로 정의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러고 싶었다. 분명하고 확실한 관계가 아닌 흐릿하고 모호한 관계는 더 이상 내 삶에 관여하도록 내버려 두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나와 연희, 우리는 무엇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까. 우리는 흔한 연인 사이처럼 사귀는 거라고 말할 수 있었을까. 그냥 버스에서 우연하게 만나서 인연과 비슷한 형상으로 잠시 시공간을 보내다가 아무렇지 않게 언제든 서로를 모르는 사람처럼 돌아설 수 있는 관계가 아닌가.


연희는 집인지 어딘지 알 수 없는 곳으로 돌아갔고 이전 직장은 당분간 일을 주지 않기로 했고, 나 역시 어디든 목적지를 정해놓고 그곳으로 가야만 한다. 집인지 짐인지 알 수 없는 곳으로…


집으로 돌아와 청소업체가 정리한 집구석을 구경했다. 마치 부동산에서 남의 집을 구경 나온 사람처럼… 냉장고 자리에는 빈 냉장고의 흔적만 남았고 싱크대가 있던 자리에도 싱크대의 윤곽선만 남았고 책상이 있던 자리에는 4개의 다리가 놓은 자리의 흔적만 남았다. 다행히 소파가 놓인 자리에는 아무런 흔적이 없었다. 왜냐하면 찢긴 장판을 뜯어내고 새것을 깔았기 때문이었다. 어떤 물건은 사라지고 자신의 흔적을 남기지만 어떤 것은 과연 그 자리에 존재했는지 흔적조차 더듬을 수 없다. 세상에 존재한다는 건 무엇을 의미할까. 나는 여기에 무엇을 남길 수 있을까. 아니, 남긴다는 생각 자체가 오류는 아닐까. 나는 이 세상에서 그저 잠시 소란을 떨다가 사라져 갈 손님 같은 인간이니까.


저 빈자리는 무엇으로 대체될까. 냉장고가 꽉 차게 자리를 차지하던 그 공간엔 냉장고이거나 혹은 그와 비슷한 물건이 자리를 차지해야 할까. 아니면 지금처럼 빈 공간으로 내버려 두는 게 맞을까. 하지만 냉장고 없이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다. 냉장고는 냉장고로써의 몫을 수행해야 한다. 그렇다면 나는 인간으로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어떤 물건이 없어도 인간은 살아갈 수 있다. 하지만 어떤 물건은 물건 자체에 귀속된다. 심하게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는 수렁처럼 그곳에 빠지면 절대 헤어 나올 수 없다. 나는 소파가 원래 있었던 자리에 마치 소파에 앉는 것과 유사한 동작으로 바닥에 앉았다. 그리고 몸을 똑바로 누이곤, 천장을 말없이 주시하다, 눈을 감았다.


눈을 감았다 뜨면 하루가 지나가고 또 한 번 그런 동작을 반복하면 하루가 지나가면 얼마나 좋을까, 이렇게 무력하고 무모한 동작을 지속하더라도 하루는 제 역할을 해낼 것이다. 그게 삶이 아닐까.





제1화 : 평범한 개발자에게 주어진 기묘한 특명 제2화 : 난 프런트 앤드 개발자라고!

제3화 : 사라진 김대리와 주인이 없는 버그 제4화 : 신촌에 사는 미식가와의 만남

제5화 : 김대리와 나교수의 은밀한 시간 제6화 : 믹스 커피의 순수성에 대해서

제7화 : 길박사의 족집게 강의 제8화 : 배신

제9화 : 김대리의 제안 제10화 : 개선 작업

제11화 : 꿈의 암시 작용 제12화 : 미행 1

제13화 : 미행 2 제14화 : 미행 3

제15화 : 미행 4 제16화 : 방황 1

제17화 : 방황 2 제18화 : 떠남 1

제19화 : 떠남 2 제20화 : 만남 1

재21화 : 만남 2 제22화 : 만남 3

제23화 : 전환 1 제24화 : 전환 2

제25화 : 숙박 1 제26화 : 숙박 2

제27화 : 숙박 3 제28화 : 방벽

제29화 : 바깥쪽 제30화 : 산책

제31화 : 복귀 제32화 : 정리

제33화 : 만남 제34화 : 스승과의 만남

제35화 : 조연과 주연 제36화 : 하수와 고수

제37화 : 잘못된 것들은 제자리로 제38화 : 원격 업무

제39화 : 취약점의 해결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제39화 : 취약점의 해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