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작소설
짐을 싸야 했다. 어디론가 다시 떠나야 할 운명을 맞았으니까. 내 운명은 한 장소에 머무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것이 나에게 묶인 파국의 굴레일 것이다. 이곳에 남아있을 아무런 이유가 없었다. 무의식적으로 집주인에게 전화를 걸어서 월세를 지불할 능력이 없게 될 거라고 고백하곤 죄송하지만 방을 당장 빼야겠다고 말했다. 집주인은 침묵을 조망하다가, 차분하게 알았다고 단답형으로 대답했다. 주인은 이번 달 말에 방을 빼주면 된다고 말했지만, 나는 오늘 바로 집을 비우겠다고 다시금 강조했고 주인은 내일까지 보증금을 입금해주겠다고 화답했다. 모든 일이 단 몇 마디의 문장으로 끝이 나버렸다. 마치 종결되지 못한 미궁의 사건이 어둠 속으로 사라진 것처럼.
거의 모든 짐이 버려졌다. 나에게 필요한 최소한의 수량이란 어느 정도일까 생각했다. 나는 그것을 개량할 자신이 없었다. 다만, 나는 가벼운 것을 추구해야만 할 것 같았다. 노트북만 한 대 있으면 어디서든 일이란 것을 할 수 있다. 거기에 더하여 네트워크만 존재하면 장소에 상관없이 일에 집중할 수 있다. 장소란 것이 문제가 되기도 하겠지만, 여기저기 떠돌면서 그건 차차 다시 생각해보기로 했다. 노마드의 시대가 아닌가.
남은 책들을 모두 꺼내서 노끈으로 단단히 묶었다. 재활용 장에 내다 놓으면 누구든 필요한 사람이 수거해 가리라. 쌓여 있는 접시와 머그컵 따위의 그릇들도 모두 재활용장에 내다 놓으면 된다. 책과 그릇류, 옷가지들을 분류해서 필요 없는 것들은 재활용장 가장자리에 쌓아두었다. 몇 차례 왔다 갔다 하니 모든 물건이 간단하게 처리됐다. 캐리어에는 필수적인 것들만 챙겼다. 세면도구, 속옷 두어 개, 가벼운 옷가지 같은 것들을.
무거운 캐리어 하나, 그리고 다수의 가벼운 짐들. 백팩엔 잃어버려서는 절대 안 되는 것들을 넣는다. 노트북이나, 신분증, 여권, 도장, 통장 같은 것들. 나중엔 캐리어까지 버려야 할지도.
남부 터미널에 도착했다. 키오스크 앞에 줄을 섰다. 내 앞엔 3 사람 정도가 발권 중이었다. 내 목적지는 물론 남쪽 어딘가였다. 남해 바닷가 어디쯤? 왜 그쪽이어야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내 행동을 지배하는 생각은 이미 남해로 급격하게 기울어지고 있었다. 그곳에서 오랫동안 잠들고 싶었다.
어느새 공간은 버스 안 쪽으로 이동. 내 자리를 찾아갔지만 내심 기대하던 연희는 그때처럼 그 자리에 존재하지 않았다. 똑같은 일이 연속으로 일어날 확률은 얼마나 될까? 동전을 하늘에 던졌을 때 앞면이 연속으로 천 번쯤 나올 확률과 비슷한 걸까. 뭐 희박하더라도 상관없다. 남해에 연희가 있건, 없건 중요한 건 아니다. 내가 남쪽으로 내려가겠다고 자발적으로 결정한 사실에 더 값이 매겨질 테니까.
그때 전화가 한 통 걸려왔다. 또다시 강차장이었다.
“홍대리! 통화 괜찮아? 괜찮겠지. 괜찮을 거야. 괜찮아야 돼. 근데 난 안 괜찮아. 내 말 좀 들어봐. 이거 어쩌냐. 김대리가 어젯밤에 동호대교에서 자살을 기도했어. 근데 죽지는 않았어. 다행인 건가? 차라리 잘 된 일인 건가, 잘 모르겠어. 그와 깊이 연루된 사람들은 내심 김대리가 죽어서 영원히 입을 다물기를 바랐을지도 몰라. 근데 불행인 건가? 죽지는 않았어. 근데 죽은 건 아닌데, 사실 산 것도 아니야. 무슨 일이냐고? 그게 말이야… 산 송장이 되어버렸거든. 식물인간 말이야.”
“아니, 갑자기 전화하셔서 김대리가 자살을 시도했다는 건 뭐고, 식물인간은 또 무슨 말씀이에요. 차근차근 말씀을 해보세요.” 나도 모르게 목소리의 데시벨이 올라갔다. 그 소리와 동시에 주변에 앉은 사람들의 표정이 사나워졌다.
“제가 지금 길게 통화할 수 없는 데 있어서요. 조금 자세히 말씀을 해주세요. 잘 듣고만 있을게요”
“알았어. 목소리를 낼 수 없는 환경에 있구나. 어디 극장에서 영화라도 보고 있는 건가. 아무튼 그게 중요한 건 아니니까. 좀 전에 얘기한 대로 김대리가 어젯밤 동호대교 난간에서 한강으로 뛰어들었어. 근데 운 좋게도 한강변에서 산책하던 사람이 그걸 보고 바로 뛰어들었나 봐. 구조대가 도착하기도 전에 구해버린 거지. 구해놓고 운 나쁘게도 인공호흡은 하지 못했나 봐. 소중한 골든타임을 놓쳐버린 거야. 뭐 누구의 잘못이겠어? 엠뷸런스가 그나마 도착해서 겨우 인공호흡을 한 모양인데 이미 5분을 넘겨버린 후였지. 심장은 어찌어찌 다시 뛰게 만들었는데, 뇌세포의 반이 죽어버린 거야. 식물인간이 된 거지. 다시 살아날, 아니 현실로 되돌아올 확률은 의학적으로 0.1% 정도? 죽은 거나 마찬가지야. 들리는 소문에 따르면 그 소식을 듣고 몇몇이 환호했다는군, 자기네들의 혐의를 벗을 절호의 기회를 맞았다나. 참 인간들이 그래, 사람의 목숨을 앞에 놓고 자기네들 신변이 더 중요하다는 거잖아.”
“김대리는 책임을 지고 싶었나 봐, 법률적인 책임이 아니라 자신을 사회에서 지우는 사회적인 소멸이라는 방법으로 말이야. 자신이 사라지면 자신이 알고 있던 비밀도 몽땅 사라져 버릴 테니. 죽으면 공소가 만료되어버리잖아. 홍대리 입장에서는 어때? 통쾌한가? 아, 이런 거 묻는 건 실례인 거 같네. 홍대리도 알고 있어야 할 것 같아서 연락했어. 그게 다야. 그럼 잘 있어. 혹시 다른 소식 있으면 또 알려줄게. 프로젝트는 조만간 재가될 거야. 조금만 더 기다려.”
“네 알겠습니다…”
나는 눈을 감고 어떤 광경을 떠올렸다. 그 장면의 중심엔 내가 알거나 혹은 모르는 사실로 치부될 어떤 인물이 서 있었다. 그 장면은 눈을 감을 때마다 반복적으로 재생된다. 김대리는 매일 생의 마감을 시도한다. 한강, 동호대교 위, 자정을 넘겨버린 시간, 난간에 홀로 서는 것이다. 김대리에겐 긴 침묵과 찰나의 여정, 그리고 강물로 낙하하는 소리만이 난간 위에서 수면 위로 아우성치듯 일렁인다. 매일 같은 시간, 김대리는 동호대교 북단, 허리보다 높은 난간, 새까만 강물, 곤두박질, 망각, 영원히 닫혀버리고 마는 3막의 무대, 종결되지 못한 사건, 남은 사람들, 배신, 이런 사생아처럼 생긴 문장들을 난간 옆에 펼쳐놓고 공중을 향해, 아니 바닥으로 검은 구멍으로 침묵과 함께 걸어간다. 그리곤 반복의 비바람 속으로 흩어지며 나에게 질문한다. 몸을 흩날리며 고개를 나에게 향한 채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모든 기억은 촉이 나간 백열등처럼 깜박거리다, 결국 수명을 다할 거라고, 네 몫의 빛은 어디쯤 있냐고.
눈을 감으면 그림자가 어둠 속으로 스며든다. 김대리의 환영이… 무심하게 흘러가는 검은 새떼처럼 김대리의 마지막 장면이 상영되다 어느 지점에서 툭 끊어진다. 나는 극심한 피로를 느끼지만 잠들 수는 없다. 김대리의 환영이 계속해서 살아났으므로 눈을 감으면 더 진하게 그 장면이 되살아나서 녀석의 결말을 더 강렬하게 증거 했으므로.
죽음으로서 사건은 과연 간단히 종결될 수 있을까. 남은 사람은? 미해결 된 증오와 남겨진 사람의 복수심은? 불타오르다 만 쇠붙이처럼 용도 폐기되는 걸까? 어느 한 사람의 죽음이, 그러니까 나와 밀접한 관계를 맺은 누군가의 죽음이, 과연 나에게 대수롭지 않은 그 무엇으로 넘겨버릴 수 있을까. 나는 녀석의 죽음을 놓고 침묵으로 응수해야 하는 걸까. 규칙적으로 덜컹거리는 버스의 작은 소음이 밀려드는 도로의 저편으로 흡수되는 것처럼, 녀석과 관계된 불편한 기억들도 언젠가 질서를 잡게 될까. 그런 일은 아마도 살아서는 일어나지 않을 것 같다. 이렇게 눈을 감을 때마다 녀석의 죽음을 계속 목격하게 되는 것처럼, 난 녀석의 마지막을 외면하지 못할 것 같다.
남해로 향하는 버스는 쉼 없이 달렸다. 최종 목적지는 분명했지만 표지판은 구간구간 다른 모습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나를 향해 웃기도 하고 때론 슬프게 미간을 찌푸리기도 했다. 그럼에도 멈추지 않고 감정을 참아내며 아래로 또 아래로 향했다.
어느 순간, 시작과 끝, 아마도 분기점쯤을 지나서였을까. 갑자기 연희가 보고 싶어졌다. 하지만 아무리 그리워해도 나는 연희의 얼굴을 그려볼 수 없었다. 아무리 떠올리려고 노력해도 연희는 희미한 안개처럼 나타났다가 가실 뿐, 안타까웠지만 그저 아쉬운 슬픔만 복받쳐 올라 의미 없는 그리움만 탄생시킬 뿐이었다.
맹렬한 속도로 달려가는 버스 속에서 내 기억은 새롭게 재편된다. 의미를 잃은 것들은 의미를 되찾은 것들로, 증오와 원망은 체념으로, 복수심은 미완이지만 완결된 형태로, 체념과 완결되지 못한 것들은 다시 무관심의 세계 속으로, 나에게 무용한 것들은 무관심의 서랍 속으로 복구되진 못했지만 안전하게 채워진 후, 문을 스스로 닫아버린다. 그렇게 무의 심연을 확보한 후, 나는 다시 연희를 그 속에 채워 넣기 시작했다. 그릴 수 없는 것들을 그리워하고, 그리워하는 것들을 스케치하려는 나의 왜소한 동작들이 머릿속에서 반복되는 것이다. 그녀를 찾을 때까지. 그녀의 얼굴을 그려낼 수 있을 때까지. 남해 어딘가에서 나를 기다릴 그녀를 만날 수 있을 때까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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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 사라진 김대리와 주인이 없는 버그 제4화 : 신촌에 사는 미식가와의 만남
제5화 : 김대리와 나교수의 은밀한 시간 제6화 : 믹스 커피의 순수성에 대해서
제37화 : 잘못된 것들은 제자리로 제38화 : 원격 업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