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선지와 빨래집게
동화 속에 묻어나는 작가의 언어
얼마 전부터 브런치에 <동화>를 연재하기 시작했다. 20대때 생텍쥐베리의 <어린 왕자>와 같이 어른도 볼 수 있는 동화를 써보면 어떨까, 막연하게 생각했으나 엄두는 전혀 나지 않았다. 소싯적부터 내 글재능의 한계를 지레 짐작한 것이고 먹고 살기 바빠 세월이 지나간 것 같다. 금번 동화 1화는 진짜 즉흥적으로 습작을 썼다. 막상 다 쓰고 나니 서랍에 넣기 아까워 발행을 했다. 급기야 이 동화를 엮어서 짝꿍에게 선물 주면 어떨까란 생각이 들어 브런치북을 덜컥 발행하고 말았다.
동화를 쓰자니, 어린이의 심상으로 돌아가, 세월에 묻히고 일상에 가려져 잊혔던 고성 같은 커튼이 열리고 있다.
어느 초등학교 교실밖 복도 한복판. 신주머니를 잃어버린 초등학교 1학년 아이가 당황해 찾고 있어. 근데 커다란 가방을 든 심술궂은 선생님이 나타나 다그치는 거야.
"너는 애가 왜 그 모양이니? 다들 하는, 그 신주머니도 못 찾니. 아휴, 내가 못 살아. 어디에 두었냐고 묻잖아!"
선생님의 날카로운 목소리에 더 대답을 못하고 쩔쩔매는 아이, 그것이 도리어 더 답답했던 선생님은 성을 내며 소리를 질렀어. 반 아이들은 호통치는 소리에 하나, 둘 주위를 빙 둘러 수군거렸지. 선생님은 주위를 둘러싼 한 아이의 손에 들린 신주머니를 낚아채더니, 눈물을 글썽이려는 아이의 머리를 여러 차례 내리 쳤어. 신주머니를 못 챙겼다는 이유가 전부였어.
출처: 청년 클레어의 <[동화] 1. 투덜이 털보의 탄생> 중에서
1화 투덜이 털보의 탄생에 나왔던 신주머니 사건은 브런치 시작하고 나서 떠오른 내 어린시절 기억이었다. 내 글 데일 카네기 < 인간관계론 >을 쓰면서 건져 올린 흐려진 탁상인데, 동화의 소재로 체용했다.
1화를 쓴 후 2화를 쓰며, 그때 내 마음이 어땠는지 스스로에 다그쳐 물었다. 당일 날은 도리어 생각보다 밋밋하게 지나갔고 심지어 어머니 포함 가족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것도 같다. 자존심이 무척 강한 아이였는지라, 세상 누구도 모르게 이 사건이 묻혔으면 좋겠단 마음이 더 간절했던 것 같다. 그래서일까, 집에 가서도 대놓고 울지도 못했던 것 같다.
몽울거리는 눈물이 지면에 닿는 순간, 이 찰나의 속도는 때로 영겹의 거리처럼 멀기만 하다. 끝내 신주머니를 찾지 못한 꼬마숙녀 다솜이는 커다란 책가방을 짊어지고 축 쳐진 걸음으로 도시의 아스팔트를 걷어차며 걸었다. 어른 걸음으로 금세 갈 거리를, 부끄러움을 등뒤로 묶어 놓은 채로 한참 앞을 헤쳐 걸었다.
'등뒤로 묶어버리면 보이지 않아'
좀 전까지 홍당무처럼 빨개졌던 얼굴은 이 마법의 주문 덕분에 조금씩 나아졌다. 다솜이는 축 늘어지려는 어깨에 빨래집게를 갖다 댔다. 인생의 오선지엔 여러 줄의 빨랫줄이 있다. 마음이 오선지의 밑바닥으로 내동댕이 쳐질 때, 다솜이는 마음의 빨래집게를 꺼내 심장의 파편들을 모아, 영차 영차 오선지 계단을 올라간다. 꼴찌 '도'에 머물러 있던 심장은 어느새 '솔'을 넘어 윗줄 '도'까지 올라간다. 우울에 눌린 마음을 격려하는 다솜이의 습관이다.
슬픔은 무겁게 다가오며 엄포를 놓지만 실은 겁쟁이다. 빨래집게를 보면 도망간다. 이 빨래집게는 다솜이 어머니가 만들어 준 인생의 비밀이다.
'우리 착하고 이쁜 딸. 너는 잘하고 있어. 실수할 때에조차 너는 앞으로도 더 잘 할 수 있어'
출처: 청년 클레어 <투덜이 털보와 마음숲>의 2화 습작 중인 글 중
그날의 모멸감과 수치심, 서러웠던 감정들이 땀범벅이 되어 무의식 밑바닥에서 나를 갉아먹곤 했다. 다만 어머니가 걱정할까 봐 또 나의 자존심을 지키고자 억지로 묻어 놓았던 것 같다.
오히려 이 신주머니 사건은 당일보단 한참 지난 후 일상중 불현듯 떠오르곤 했다. 아버지의 알코올중독, 가난한 집, 가출한 손윗 언니, 오빠의 신경쇠약, 어머니가 빚쟁이들에게 겪는 수모. 신주머니 사건은 이런 내 삶의 굳은 살에 닿을 때에서야 따끔따끔 나를 더 울렸다.
마음은 너무 슬픈데, 속 시원하게 대놓고 울 수도 없었다. 아니 내가 아프다는 것도 자각하지 못 했던 것 같다. 조숙했던 탓도 있지만 내가 슬프다는 것이 더 비참했기 때문이다. 내 인생이 마치 길거리에 너저분하게 방치된 포대 자루 같았다. 당시엔, 오직 하나 어머니의 사랑만이 이 구멍 난 소리에 공명할 뿐이었다.
불면의 밤.
누군가 뒤척이는 밤을 목도한 것이 언제였을까.
초등학교 5~6학년, 아버지의 알코올중독과 가정폭력이 절정을 이루던 시절. 아버지는 사실상 가장으로서 수입원을 포기한 상태였다. 그나마 막도동으로 벌어온 돈도 어머니에게 안 주고 술 마시는데 거이다 소진했다. 그때부터 어머니는 한참이 지나도록 빚 없이 사신 적이 없으셨다. 어머니는 빚을 갚아야 할 날짜가 다가오면 이내 뒤척이듯 잠을 이루지 못 했다. 어머니는 가끔 아니 자주, 빚쟁이들의 빚 독촉에 연신 허리를 구푸려야 했다. 자녀들 육성회비가 몰리는 달에는 제때 돈을 갚지 못해, 빚쟁이들에게 '신용 없는 사람이다'라며 욕 아닌 욕을 한 바가지 얻어먹어야 했다.
그 시절 내겐 신종 부캐(자신이 사용하는 주요 캐릭터 외의 캐릭터를 이르는 말)가 생겼는데, '자금 운반책'이 그것이다. 당시 어머니가 어떤 인연으로 만난 사람들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매달 어머니가 빌린 빚들의 일정 금액을 받아서 이른바 채권자인 그 아주머니들 댁에 갖다 드리는 임부를 맡았다. 그 당시엔 내가 하고 있는 일이 무슨 의미인지, 이 일이 한낱 어린 인간에게 어떤 상처를 주는지 따위는 따질 겨를이 없었다. 뙤약볕이 짙은 한여름에는 태양과 논쟁하며, 날씨가 궂은 날엔 눈비와 투쟁하며 임무를 완수했다. 어른 세계가 꼬맹이에게 던져준 냉혹한 추위는 이내 동심에 녹아들어 묻히곤 했던 것이다.
우리가 살던, 달동네 무허가 시멘트집과는 비교도 안 되는 네모 반듯한 마당이 넓은 2층집. 가끔은 자영업을 하는 가겟집. 그 각각의 집들은 천태만상이었다. 돈줄을 쥐고 있는 어느 댁 마나님 같은 아주머니들에 가닿기 몇 분 전, 나는 자주 내 표정관리를 어떻게 해야 할지 긴장되었다. 연신 굽신거려야 할지, 배포 있게 당당한 척해야 하는지 말이다. 그렇게 부끄러운 손을 내밀고 뒤돌아서곤 했다.
그 동네에는 제법 큰 놀이터가 있었다. 이 놀이터는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 근처에 있어, 절친들과 놀던 아지트 중 하나였다. 그래서일까, 이 장면 곧 내가 빚을 갚으러 다니는 것을 누군가 봤을까, 순간 부끄럽고 두려울 때도 있었다.
어느 날은 잠시 쉬어가고 싶어, 그 놀이터 그네에 한참이나 앉아 있었다. 슬프다, 아프다 말하기 싫었다. 아니, 내 삶이 슬프고 아프다고 인정하기 싫었다. 그러면 내가 아주 무너질 것만 같았다. 나마저, 내 삶을 그렇게 인정하면 너무 비참할 것 같았다. 그때부터였을까, 극내향인 스스로를 밝고 외향적인 사람으로 바꾸고 싶었던 것은.
그네를 타고 하늘을 보았다. 동화 같았다. 그네를 쳐서 하늘로 올라갔다, 내려갔다. 더 세게 하늘로 쳐올리면, 내가 저 하늘로 날아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네가 부풀어 올라 닿은 하늘, 그 어딘가엔 비밀의 문이 있어, 그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상상도 했다. 그러나 그 당시 나에겐 이 비밀의 문보다 내 삶이 더 비현실적이었다. 11명의 가족이 달동네 9평 집에서 살 수 있다는 것도, 술 마시면 부엌칼을 들고 아내고 자식들을 다 죽이겠다 달려드는 아버지도, 바로 위 언니의 가출 상태도, 나중엔 오빠의 우울증과 신경쇠약도, 큰언니와 둘째 언니의 미싱공의 노곤한 삶도. 굉장히 자존심이 강하고 예민한 나, 그런 내겐 이 현실을 헤아리는 것조차 버거웠다. 현실을 계수하지 않고 그냥 하루살이처럼 '오늘도 죽지 않고 살았다'라는 사실에 자족했다. 아니 자족해야 했다. 끔찍한 현실의 폭우를 태양에 널어서, 목가적 유년시절로 짱짱하게 말려, 나는 그렇게 마술을 부리듯 살아낸 것 같다. 그 시절 불면의 밤들을 말이다.
출처: 청년 클레어의 <로또 당첨이라고?> 중에서
삶은 포대 자루 같았지만 이내 동화 여주인공처럼 그것을 치마 삼아 살아졌고 여물어져 갔다. 삶이 파편처럼 흩어질 것 같은 순간, 동화속 솜털들이 뽀송뽀송 나를 미지의 세계로 이끌곤 했었던 것이다.
*<깜짝 공지> 제가 최근 연재 시작한 동화의 뼈대는 동화는 처음이지? <9/2 업데이트> 에 업데이트본 담아봤어요. 투덜이 털보와 기석이는 제 짝꿍이 모델입니다. 이미 아시는 분들은 '투덜이 털보' 캐릭터에서 짝꿍을 느끼시더라고요. 짝꿍이 제 글에 대한 답례 선물로 OST작곡과 동영상 제작을 해주기로 했어요. 제가 생초보 작가지만 독자분들을 위해 정성껏 준비하려고 하는데요, 완주할께요 :)
**이번 주초 생텍쥐베리의 <어린왕자>를 다시 읽었습니다. 어제는 젊은 날 언론인중 리스펙 했던 손석희 교수의 최근 따끈따끈한 선곡들을 들었습니다.(아래 링크) 며칠 전에 방송된 내용인데, 퇴근길 오랜만에 라디오를 보며 들으니 좋았습니다.
글 쓰는 비행사
생텍쥐페리의 작품 목록을 살펴보면 비행과 관련된 제목이 많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이는 생텍쥐페리가 비행사란 직업을 가지고 있었던 것과 관련된다. 그가 공군에 입대하였을 당시에는 정비 부대에 속해 있었으나, 개인 교습을 받은 후 비행기 조종사 면허를 따고 비행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제대 후에는 우편 비행을 하며 민간 항공 업무에 봉사하기도 했다. 이때의 비행 경험을 바탕으로 그는 〈남방 우편기〉와 〈야간 비행〉을 창작한다. 그리고 〈야간 비행〉으로 페미나문학상을 수상하여 작가로서 인정받게 된다.
〈어린 왕자〉를 둘러싼 비화
제2차 세계 대전 중 공군 대위로 활약했던 생텍쥐페리는 전역 후에 드골의 자유 프랑스 진영에 가담하지 않고 미국으로 가게 된다. 그는 이미 미국에서 인기 작가의 반열에 올라 있었다. 1년여의 미국 생활 중에 그는 대표작 〈어린 왕자〉를 창작한다. 〈어린 왕자〉를 창작하게 된 계기가 독특한데, 1942년 초 뉴욕의 어느 식당에서 그가 냅킨에 그린 아이 그림을 보고 출판업자가 그 아이에 대한 이야기를 어린이용으로 써 보자고 제안한 데서 〈어린 왕자〉가 시작되었다. 특히 책에 실려 있는 삽화는 그가 직접 그린 것인데, 처음에는 삽화가에게 그림을 의뢰했으나 결국에는 자신이 직접 삽화를 그리게 되었다고 한다. 〈어린 왕자〉는 8,000만 부 이상 팔렸으며 160여 개의 언어로 번역되었을 정도로 전 세계적으로 많은 사랑을 받는 작품이 되었다.
비행 중의 행방불명
〈어린 왕자〉를 발간한 후, 생텍쥐페리는 자신의 옛 비행 중대에 복귀한다. 그러나 연합군 반격 작전을 위한 정찰 임무를 수행하다가 행방불명된다. 그의 나이 44세 때의 일이었으며 그 후 50여 년 동안 그의 행방은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1998년 마르세유 동남쪽 바다에서 어부들의 그물에 그의 이름이 새겨진 팔찌가 발견되었으며 몇 년 뒤에는 그의 비행기로 추정되는 잔해가 수거되었다. 또한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 공군 조종사가 그가 탄 비행기를 격추했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그 독일 공군 조종사는 자신이 격추한 비행기가 그가 탄 것이었음을 나중에 알게 되었으며 자신 또한 그의 팬이었기 때문에 그것이 사실이 아니기를 매일 기도했다고 한다. 만일 그 조종사의 고백이 진실이라면 팬이 자신이 좋아하는 작가를 추락사시킨 안타까운 사연이 아닐 수 없다.
한편, 프랑스에서는 화폐가 유로화로 통일되기 전인 1993년에 사망 50주기를 앞두고 그의 얼굴과 어린 왕자의 그림을 넣은 50프랑 지폐를 유통하기도 했다.
ㅡ <교과서가 사랑한 작가 110> 중 ㅡ
생텍쥐페리
프랑스 작가이자 비행사
*출생 - 사망 1900.6.29. ~ 1944.7.31.
1943.4.7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가 미국에서 배포되다
정식 판매부수는 8000만 부가 넘고, 해적판까지 합치면 전 세계적으로 1억 부 이상 팔렸을 것으로 추정되는 작품 <어린 왕자>. 160여 개 언어로 번역되어 오늘날에도 널리 사랑받는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는 책을 읽는 사람들의 통과의례와도 같다. 하늘을 사랑했고 하늘에서 사라져 간 생텍쥐페리는 지금도 많은 이들의 마음속에 살아 있다.
"마음에 담아 가지고 다니는 한 어린 녀석"
1939년 '바람. 모래. 별'의 영문판이 발간된 직후 뉴욕 맨해튼을 방문한 생텍쥐페리
1942년 초 뉴욕의 어느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있던 생텍쥐페리는 흰 냅킨에 장난 삼아 그림을 그렸다. 식당 종업원이 옆에서 유심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함께 식사하던 출판업자 커티스 히치콕이 생텍쥐페리에게 뭘 그리는 것인지 물었다. 생텍쥐페리가 답했다. “별거 아닙니다. 마음에 담아 가지고 다니는 한 어린 녀석이지요.”
히치콕이 그림을 살펴보며 말했다. “이 어린 녀석 말입니다. 이 아이에 관한 이야기를 써보시면 어떨까요. 어린이용 이야기로 말이지요. 올해 성탄절 전에 책을 낼 수 있으면 참 좋겠는데 말입니다.” 며칠 뒤 생텍쥐페리는 친구 레옹 윈체슬라스에게 이렇게 말했다. “날 보고 어린이 책을 써보라는데, 날 문방구에 좀 데려다 주시오. 색연필을 사야 하니 말입니다.” 생텍쥐페리는 자신의 착상을 색연필로 그려보았지만 신통치 못하다고 생각했고, <전시 조종사>의 삽화를 그린 베르나르 라모트의 도움을 요청했지만 라모트의 데생에도 만족하지 못했다. 생텍쥐페리는 점점 더 이 일에 몰두했다.
1942년 여름 생텍쥐페리 부부는 뉴욕에서 기차로 45분 거리에 있는 롱아일랜드 노스포트 근처 이튼 네크에서 식민지풍의 하얀 삼층집을 세내어 살았다. 이 집이 <어린 왕자>의 사실상의 산실이 되었다. 그리고 1943년 4월 6일 레이널앤히치콕(Reynal & Hitchcock) 출판사에서 영어와 불어로 출간되었다.
이듬 날인 7일부터 배포된 영어판 초판은 3만 부, 불어판 초판은 7천 부였다. 나중에 갈리마르 출판사가 레이널앤히치콕 출판사를 고소했고(생텍쥐페리는 자신의 모든 저작에 관한 출판권을 갈리마르와 계약해 둔 터였다.), 프랑스에서는 1945년 11월에야 책이 나왔다. 그러나 전후 인쇄용지 품귀 탓에 실제로 본격적으로 서점에 배포된 것은 1946년 4월이었다. (1948년 레이널앤히치콕 출판사는 하코트 브레이스 앤 컴퍼니에 인수되었다.)
1943년 출간되어 세계인의 사랑을 받아온 '어린 왕자'의 캐릭터. 생텍쥐페리의 원작 그림이 여러 버전으로 바뀌어 그려져 왔다.
“아니, 난 친구들을 찾고 있어. ‘길들인다’는 게 뭐지?”
“그건 사람들이 너무나 잊고 있는 건데… 그건 ‘관계를 맺는다’는 뜻이야.” 여우가 말했다.
“관계를 맺는다고?”
“물론이지.” 여우가 말했다.
“넌 나에게 아직은 수없이 많은 다른 어린아이들과 조금도 다를 바 없는 한 아이에 지나지 않아. 그래서 나는 널 별로 필요로 하지 않아. 너 역시 날 필요로 하지 않고. 나도 너에게는 수없이 많은 다른 여우들과 조금도 다를 바 없는 한 마리 여우에 지나지 않지. 하지만 네가 나를 길들인다면 우리는 서로를 필요로 하게 되는 거야. 너는 내게 이 세상에서 하나밖에 없는 존재가 되는 거야. 난 네게 이 세상에서 하나밖에 없는 존재가 될 거고….”
“이제 좀… 알 것 같아.” 어린 왕자가 말했다.
“꽃 한 송이가 있는데 말이야… 그 꽃이 날 길들였나 봐….”
“그럴 수도 있겠지.” 여우가 말했다.
“지구에는 별의별 일이 다 있으니까….”<어린 왕자> 김화영 옮김, 문학동네. pp.98-99
전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들어가 공군 장교로 복귀하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 1939년 9월 3일, 예비역 공군 장교 생텍쥐페리는 툴루즈 기지로 오라는 명령을 받고 공군 대위로 복귀했지만, 신체검사에서 예전 비행에서 당한 사고로 좌반신의 움직임이 자유롭지 못하다는 이유로 전투기 조종 불가 판정을 받았다. 그러나 생텍쥐페리는 비행하고 싶어 했다. 공군 장성과 장관 등에게 청을 넣어 결국 1939년 말부터 1940년 7월까지 2/33 전투비행 중대 소속으로 고공 정찰, 촬영 임무를 수행했다. 인기 작가였고 연령도 동료 비행사들보다 높았지만, 그는 스스럼없이 동료들과 어울리며 악조건을 견뎌냈다.
1940년 7월에 전역한 생텍쥐페리는 드골이 이끄는 자유 프랑스 진영에 가담하지 않고 프랑스의 승리를 위해 미국의 개입이 절대적이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스스로를 프랑스와 동일시하는 드골에 대한 불신감이 깊었던 데다가, 드골의 자유 프랑스가 독자적으로 대독 전쟁을 수행할 능력이 없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8월 5일에 아게의 누이 집으로 가서 <성채>의 집필에 전념했지만 자신보다 스물두 살이나 많은 유대인 친구 레옹 베르트를 찾아가 그로부터 미국행을 권유받았다. 마침 미국의 출판사와 번역자도 생텍쥐페리에게 <바람과 모래와 별>의 저자 강연과 인터뷰를 권유하고 있던 터였다.
생텍쥐페리가 '어린 왕자'를 집필한 책상과 원고. 책상 위에 '어린 왕자'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모로코, 리스본을 거쳐 1940년 12월 31일 뉴욕에 도착한 생텍쥐페리는 사실상의 망명자 생활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한 달 내에 귀국할 작정이었지만 프랑스로 돌아가도 뚜렷하게 설 자리가 없는 데다가, 미국 내에서 그는 이미 인기 작가가 되어 있었다. 1941년 2월에는 뉴욕의 리츠칼튼 호텔을 떠나 센트럴파크 사우스 240번지 27층 아파트로 이사했고 11월에는 남프랑스 오페드에 머물고 있던 아내 콘수엘로를 미국으로 오게 했다. 그는 미국에서 작업할 때 녹음이 가능한 딕타폰에 목소리를 녹음해서 다른 사람이 그 내용을 타자하는 방식으로 원고를 작성했다.
하늘을 나는 작가로서 대륙간 비행에 연거푸 도전하다
생텍쥐페리가 처음으로 하늘을 난 것은 1912년 12살 때였다. 조종사 베드린이 모는 비행기를 타고 앙베리외 공항에서 처음 이륙했던 것. 1919년 생텍쥐페리는 해군사관학교 입시에 응시했지만 구두시험에서 불합격됐고 이듬해 파리 미술학교에서 청강생으로 6개월 간 공부했다. 그리고 1921년 공군에 소집되어 전투비행단 제2연대 소속으로 스트라스부르에서 근무했다. 처음에는 정비부대 소속이었지만 개인교습을 받은 후 조종사가 되었고 1922년 전투 중대 중위로 파리의 주 공항인 부르제에서 공군 2년 차를 마쳤다. 이해 작가 루이즈 드 빌모랭과 약혼했지만 이듬해 파혼했고 6월에 제대했다. 제대 이후 사무원과 트럭 외판원 생활을 했고, 본격적으로 작가 수업을 한 것은 1923년부터였다. 그리고 1926년 ‘르 나비르 다르장’지에 단편 ‘비행사’를 발표했다.
1926년부터 항공사에 취업하여 프랑스의 툴루즈와 서아프리카 세네갈 다카르 항로 우편기를 조종하고, 다카르 항로상의 아프리카 기항지인 모로코 남부 캅 쥐비의 항공기지 착륙장 지점장으로 18개월 간 일하기도 했다. 사막 지역에서 보낸 이 시기가 <인간의 대지>, <어린 왕자>, <성채> 등 여러 작품에 큰 영향을 미쳤다. 1929년에는 아에로포스탈 아르헨티나 영업부장이 되었고, 과테말라 출신 문인 엔리케 고메즈 카리요의 미망인 콘수엘로와 만나 1931년 4월 12일에 결혼했다. 이 해 <야간비행>이 출간됐고 페미나상을 수상했다. 1934년에는 에어프랑스사에 입사해 사이공에서 활약했고 이듬해에는 파리-사이공 비행기록을 세우기 위해 이집트로 출발했지만, 12월 30일 카이로에서 200킬로미터 떨어진 지점, 리비아 사막에 불시착해 5일간 걸어가다가 극적으로 구조됐다. 1938년에도 뉴욕에서 이륙해 비행하다가 과테말라에서 추락하여 심각한 부상을 당했다. 이듬해 1939년에는 <인간의 대지>가 출간됐고 같은 해 6월 미국에서 <바람과 모래와 별>이라는 제목으로 번역 출간되어 ‘이달의 책’으로 선정되고 아카데미 프랑세즈 소설 대상을 수상하는 등, 작가로서 최전성기를 맞이했다. 전쟁이 임박했음을 예감하고 미국 여행 중 8월 말에 귀국했다.
"왜 내가 전투기에 몸을 싣고 순정한 삶을 살도록 허락하지 않는단 말인가"
<어린 왕자> 출간 직후 생텍쥐페리는 지난날 동지들이 있는 2/33 비행중대에 합류하기 위해 뉴욕을 떠나 3주간의 여정 끝에 1943년 5월 4일 알제에 도착했다. 당시 알제의 드골 임시정부는 생텍쥐페리를 공공연히 비겁자로 비방하며 <전시 조종사>의 판매를 금지시키기까지 했다. “왜 내가 전투 비행기에 몸을 싣고 순정한 삶을 살도록 허락하지 않는단 말인가.” 당시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생텍쥐페리가 한 말이다.
유럽의 화폐가 유로화로 통일되기 전까지 프랑스에서 유통되던 지폐로 생텍쥐페리의 얼굴이 담겨 있다.
우여곡절 끝에 1943년 7월 21일 생텍쥐페리는 튀니스에 주둔하고 있던 자신의 옛 비행중대에 복귀했다. 그러나 조종사 연령제한이 30세 전후인 라이트닝 비행기를 타기에는 그의 나이가 많았다. 결국 관측과 기관총 보조사수 역할을 제외한 비행기 조종 허가를 받지 못했지만, 1944년 4월 단 5회의 정찰비행만 한다는 조건으로 비행중대에 다시 복귀할 수 있었다. 6월 29일에는 출동 순번이 아님에도 자신이 잘 아는 사부아 정찰이라는 이유를 들어 출동을 자원했고, 안시 상공에서 엔진 고장이 일어나 실수로 이탈리아 제노아 상공까지 이르러 격추 위기에 몰리기도 했다. 그리고 1944년 7월 31일. 지중해의 한 여름은 그날도 맑고 짙푸르고 뜨거웠다. 아침 8시 45분 생텍쥐페리는 그르노블-안시 정찰 임무를 띠고 이륙했다. 론 강 골짜기를 따라 정찰을 한 뒤 코르시카 기지로 돌아오는 고독한 정찰 비행이 시작된 것이다.
예정된 기지 귀환 시각은 오후 1시 30분 무렵. 그러나 생텍쥐페리가 모는 정찰기는 기지로 돌아오지 않았다. 독일 전투기들의 관측과 공격에 완전히 노출될 수밖에 없는 맑은 날씨. 생텍쥐페리의 정찰기는 정오가 조금 지난 시각 니스 서쪽 상공에서 저공비행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바다 쪽으로 선회하여 해안선 저 너머로 사라졌다. 사라지기 전 그의 비행기는 안전 고도인 6천 미터보다 낮게 그리고 예정된 항로를 벗어나 비행하고 있었다.
6월 29일의 비행에서도 생텍쥐페리는 지시받은 항로에서 벗어나 자신의 어린 시절의 추억을 상기시키는 안시 호수 상공을 비행했다는 이유로 주의조치를 받은 적이 있었다. 7월 31일의 비행에서도 그는 어느 곳보다도 자신이 좋아하는 프로방스 지방으로 들어서자 정상적인 귀환 항로에서 서쪽으로 벗어났던 것 같다. 바스티야 북쪽 100킬로미터 지점 코르시카 상공에서 적기에 피격되어 바다로 추락. 이것이 44살 생텍쥐페리의 마지막이었다.
독일 공군기에 격추당한 생텍쥐페리의 비행기 잔해에 남은 사랑의 증표
1998년 마르세유 동남쪽 바다에 넙치잡이 어부들이 쳐놓은 그물에 작가의 이름이 새겨진 팔찌 하나가 걸려 올라왔다. 아무런 자취도 남기지 않고 사라진 생텍쥐페리의 비행기 ‘p38라이트닝’이 바다에 추락한 것이 분명해졌다. 팔찌 안쪽에는 ‘콘수엘로’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었으니, 생텍쥐페리가 마지막까지 아내를 그리워하고 있었다는 짐작도 가능해졌다. 이후 몇 년 뒤에는, 그가 마지막 탔던 비행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잔해가 같은 해역에서 수거되기도 했다. 그리고 지난 2008년 3월에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공군 조종사였던 호르스트 리페르트(89세)가 프랑스의 한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자신이 생텍쥐페리가 타고 있던 비행기를 격추했다고 고백했다.
1944년 그날 리페르트는 프랑스 남부 해상을 비행 중에 미국산 ‘p38라이트닝’을 발견하고 수차례 근접 공격하여 격추시켰다고 밝혔다. 그는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이제 안 찾아다녀도 된다. 내가 바로 생텍쥐페리의 비행기를 격추시킨 사람이다. 나중에야 바다에 떨어진 그 비행기에 생텍쥐페리가 타고 있었음을 알았다. 나는 제발 그가 아니길 바랐다. 우리 시대의 모든 젊은이들이 그러했듯이 나도 그의 책에 빠져있었기 때문이다.”
이건 정말이지 커다란 수수께끼다. 어린 왕자를 사랑하는 여러분에게나 나에게나, 이 세상 어딘가에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양 한 마리가 한 송이 장미꽃을 먹었느냐 먹지 않았느냐에 따라서 이 세상천지의 모든 게 온통 다 달라져버리니 말이다. 하늘을 쳐다보라. 그리고 이렇게 자문해 보라. “양이 그 꽃을 먹었을까, 먹지 않았을까?” 그러면 세상이 얼마나 달라지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른들은 아무도 그게 그렇게 중요하다는 걸 깨닫지 못할 것이다. (<어린 왕자>, 김화영 옮김, 문학동네. p.137. 끝 부분)
추천하는 덧붙여 읽으면 좋은 책
<어린 왕자>에 대한 작품 분석과 해설이 작가의 삶의 중요한 계기들과 함께 잘 정리돼 있다. 생텍쥐페리의 스케치 사진이 많이 실려 있다.
생텍쥐페리에 대한 추억레옹 베르트 저양영란 역끌리오 1999.08.14 상세 보기
생텍쥐페리가 <어린 왕자>를 헌정한 레옹 베르트는 생텍쥐페리보다 스물두 살이나 많았지만, 둘도 없는 친구 사이였다. 그 자신도 작가였던 베르트가 1950년 생텍쥐페리에 얽힌 추억을 담아 출간한 짧은 회고록이다.
전설적인 사랑알랭 비르콩들레 저이희정 역이미지박스 2006.09.15 상세 보기
생텍쥐페리와 그의 아내 콘수엘로의 사랑이야기 중심으로, 작가 생텍쥐페리를 둘러싼 시대 배경과 환경을 담았다. 20년 동안 콘수엘로 드 생텍쥐페리의 비서로 일한 호세 마르티네스 프룩투오조가 공개한 다양한 유품들과 만날 수 있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생텍쥐페리 [Antoine de Saint-Exupéry] - 프랑스 작가이자 비행사 (인물세계사, 표정훈)
1944년 7월 31일 어린 왕자의 작가 '생 텍쥐페리'
... 전투기 몰다가 실종
어린왕자를 집필한 프랑스의 소설가 '앙트완 생텍쥐페리'는 2차 세계대전 중 프랑스 공군 조종사로 활동하다가 1944년 7월 31일 2차 세계대전 유럽전선 종전 10개월여를 남기고 실종되었다.
그의 유해는 발견되지 않았지만 1990년 그의 유품으로 추정되는 비행기 부품들이 발견되면서 그가 전투기를 몰다 추락사했다는 것이 드러났고 1998년 4월 프랑스 마르세이유 남동쪽 해저에서 어부 '장 끌로드 비앙코'가 우연히 그물로 생 텍쥐페리긔 이름이 적힌 팔찌를 건져올리기도 헀다.
얄궂은 것은 생텍쥐페리의 이런 사실을 알게 된 당시 나치 독일군 전투기 조종사 '호르스트 리페르트'는 <생텍쥐베리, 최후의 비밀>이라는 저서에서 자신이 생텍쥐페리가 몰던 정찰기 P38라이트닝을 요격했다고 주장한 바 있다.
리페르트는 공격 당시에 정찰기에 생텍쥐페리가 탑승한 사실을 전혀 몰랐으며 요격한 후 며칠 뒤에 자신이 생 텍쥐페리가 몰던 정찰기를 추락시켰음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덧붙여 리페르트는 그의 작품을 정말 좋아했다고 말하면서 주변을 더욱 안타깝게 했다.
어린왕자의 작가로 잘 알려진 생 텍쥐베리, 하지만 12세에 비행기를 처음으로 접한 후 우편비행업무를 하다가 29세부터 아르헨티나의 한 항공회사에 취직하면서 조종사의 삶을 살게 된다. 이때의 경험을 토대로 쓴 소설이 <야간비행> , <남방우편기>, <인간의 대지>다.
이후 <어린왕자>를 통해 세계적인 문호로써의 명성을 얻게 된 생 텍쥐베리, 하지만 당시 프랑스는 나치 독일의 치하에서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고 이에 보다 못한 생 텍쥐베리는 펜 대신 전투기 조종간을 잡으면서 프랑스 해방을 위해 싸웠다.
그는 나치 독일과 싸우기 위해 미국으로 망명했고 이후 미 공군 소속으로 나치 독일과의 전투를 시작하는데 이후에는 다시 프랑스 공군으로 들어가 프랑스의 해방을 위해 활약한다.
때는 1900년 6월 29일 아주 좋은 날에 프랑스 리옹에서 한 아이가 태어납니다.
그의 이름은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 장 드 생텍쥐페리 백작의 자식으로 귀족의 후손인 금수저로 태어납니다만..
4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외가 쪽에 있던 생 모리스 드 르망 성에서 자랍니다. (보통 아버지를 여의면 가세가 기울지만.. 어머니도 귀족..) 아버지는 없었지만 어머니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유년을 보냅니다. 어린 생텍쥐페리는 언제나 생기가 넘치고 잔꾀가 많은 영리한 꼬마였어요.
그 꼬마는 12살에 맹랑함으로 그의 인생의 처음으로 하늘을 날게 됩니다. 1912년 프랑스 남동부에 있던 비행장에서 비행 조종사 베드린이 비행기를 수리하고 있었는데 자신감 가득했던 어린 생텍쥐페리는 그 조종사에게 다가가 자신을 태우고 비행을 해줄 수 있는지 당돌하게 물어봅니다.
조종사는 그 꼬마의 용기 있는 모습에 깊은 인상을 받았고 결국 조종사는 생텍쥐페리를 태우고 두어 바퀴를 돌며 비행했습니다. 그 경험은 생텍쥐페리의 꿈을 심어주는데 큰 영향을 주었어요.
생텍쥐페리는 날개를 달고 하늘을 나는 꿈을 꿉니다.
14살에는 자신의 동생이 병으로 죽으며
큰 슬픔을 겪게 되는데 이 슬픔에 비극은 약 30년 후에 쓰일 '어린왕자' 마지막 부분에 모티브가 된다. 19살이 되고 해군사관 학교에 들어가려 했으나 시험에서 떨어지고.. 파리로 넘어가 파리 미술학교 건축학과의 청강생으로 공부를 합니다. 생텍쥐페리는 공부보다는 파리 시내의 카페를 돌고 샌느강변을 돌면서 그림도 그리고 문학에도 관심을 가졌어요. 그렇게 그는 백수생활을 즐겼다고 하네요.
21살이 되던 해에 학업을 그만두고 군에 입대를 합니다. 이때 항공정비병으로 근무하게 되는데 자신이 이루고 싶었던 꿈이 있어서였을까요? 군비행기 조종 자격을 취득할 수 있었고 더 나아가서 민간 비행사 시험에 합격하며 자신이 원하던 비행 조종사 꿈에 가까워져요. (하면 된다..)
1922년 소위에 임관하고 부르제 제33비행연대 정찰부대에 근무하면서 시인이자 소설가인 루이즈 드 빌모랭과 약혼을 하며 행복한 시간을 보내요. 하지만 그녀의 집안에선 위험한 직업을 가진 생텍쥐페리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죠. 그러다 일이 터집니다.
정찰비행 중 항공기가 추락하면서 두개골이 골절되는 중상을 입게 돼요. 그 일로 더 이상 군에서 복무를 할 수 없었고 의가사 전역을 하게 됩니다. 전역 후에 회계사로 취직을 했지만 조종사의 꿈을 버릴 수 없었죠.
위험한 조종사의 직업을 반대하던 약혼녀는 꿈을 포기하지 않는 생텍쥐페리와 잦은 다툼이 있었고 결국 파혼까지 하게 됩니다. (꿈이 뭐길래.. 그 꿈 이루어질까?)
파혼 후에 자동차 회사의 영업사원 일을 하게 되면서 문학을 가까이했던 대학생 때를 생각하며 글쓰기에 전념하여 산문과 시를 집필하기 시작했어요.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파리의 작가들과 친분을 쌓았고 잡지사의 편집장 장 프레보의 주선으로 단편소설 '비행사'를 발표하면 눈길을 끌 수 있었어요.
하지만 날개를 달고 싶었던 생텍쥐페리는 끊임없이 항공사의 면접을 봤고 결국 라테코에르 항공사에 취직하며 툴루즈에서 툴루즈-카사블랑카 정기 노선의 항공우편 조종사로 근무하게 됩니다. 항공우편 조종사는 많은 위험을 안고 가는 직업이었습니다. 실제로 사고도 많이 났죠.
리옹 생텍쥐페리공항
항공사의 항로가 연장되면서 생텍쥐페리는 중간 기착지였던 모로코 남서부에 쥐비 곶(현 타르파야) 우편 비행 중계소의 책임자로 파견근무를 했습니다. 이곳 사막에서 불시착 항공기 수리 업무와 조난 비행사 구조 업무도 함께 병행했죠.
여기서 겪은 자신의 이야기로 책을 출간하게 됩니다. 제목은 '남방 우편기' 이 책을 출판하며 작가로서 데뷔해요. (항공사의 일을 하며 작가까지 되는 당신은 몸이 10개?)
1930년 가장 친한 동료인 '기요메'가 안데스 산맥 횡단 중에 행방불명되어 생텍쥐페리가 직접 5일 동안 수색에 나섰지만 실패하였다.
하지만 며칠 후 기요메는 약 6일을 안데스산맥을 밤낮으로 걸어 살아서 돌아오게 된다. 그 친구가 영향이 되어 만들어진 작품이 '야간비행'이다. 아르헨티나 항공우편 회사의 개발과장으로 부임한 후 또 자신의 경험이 바탕이 된 '야간비행'을 출간하게 되는데, 이 작품은 프랑스 출판 시장의 문학 상인 페미나상(Pric Fenina)을
수상하며 여러 나라 언어로 번역되어 출간되고 영화로도 만들어지며 베스트셀러 작가로서의 행보를 이어갑니다. (남방 우편기가 영화와 되었을 땐 자신이 직접 비행사로 출연하기도 했다죠?)
그렇게 승승장구하며 살다가 35살에 자신의 개인 전용기를 구매하였습니다.(부럽..) 그리고 파리-사이공의 비행시간 신기록 달성을 위하여 이집트로 출발하게 됩니다. 호기롭게 비행을 시작했지만.. 비행기 결함으로 리비아 사막에 불시착하였답니다. 다행히도 5일 만에 극적으로 구조되어 파리로 귀국하게 되죠.
그의 사고는 계속됩니다. 1938년에는 뉴욕에서 괴테말라로 가는 비행기를 이륙하던 중 잘못되어 중상을 입기도 했습니다. 그 당시 우편 비행기는 결함이 많아 사고가 흔했다고 하죠.
그럼에도 그의 비행의 꿈은 끝나지 않습니다. 물론 문학활동도 쉬지 않았습니다. 이때 '인간의 대지'를 출간하게 되는데 이 작품은 아카데미 프랑세즈의 소설 대상을 수상하였고 뉴욕에 출간되어 베스트셀러가 된답니다.
'인간의 대지'는 일본 애니메이션 감독
미야자키 하야오가 몇 번이고 반복해서 읽은 책이었고 일본어 번역판의 표지도 직접 그렸다. 그는 생텍쥐페리 책을 통해 인생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이야기했다.
1939년 세계는 혼란에 빠집니다.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여 생텍쉬페리는 조금 늦은 나이었지만 군으로 소집됩니다. 전공을 살려 공군 정찰기 조종사로 근무하게 되는데요. 여러 번 목숨을 잃을뻔하면서도 각종 작전에 참여하였습니다.
하지만 결국 프랑스는 나치 독일에 함락되었고 생텍쥐페리는 프랑스를 떠나 미국으로 망명하였습니다. 그의 여러 행보는 프랑스에서도 독일에서도 환영받지 못했죠.
생텍쥐페리는 뉴욕에서 고국을 그리워하며 외로운 삶을 살게 되는데요. 자신의 정찰대 경험을 바탕으로 '전투조종사'를 집필하였고 '아라스로의 비행'이라는 제목으로 미국에서 출간하여 베스트셀러가 됩니다. (이제는 베스트셀러 작가 생텍쥐페리..)
이 책은 자신의 조국 프랑스에서도 출간되었으나 독일 점령 시기로 발매 금지처분을 받기도 했답니다.
미국이 정오일 때 프랑스에선 해가 진다.
그러니 해지는 것을 보려면 1분 안에 프랑스로 달려갈 수 있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불행히도 프랑스는 너무 멀리 있다. 고국을 그리워하면 생텍쥐페리는 뉴욕에서 지내던 어느 날 미국의 출판업자 '유진 레이날'과 저녁식사를 하게 되었는데, 생텍쥐페리가 냅킨에 낙서로 어린아이의 그림을 그렸답니다..
그걸 본 레이날은 냅킨에 그려진 아이가 주인공이 되는 동화를 쓰면 좋겠다는 제의를 받게 됩니다. 그 말에 생텍쥐페리는 원고를 쓰게 되었고 시끄러운 도시 뉴욕을 떠나 조용한 시골마을로 가서 책을 쓰는데 집중했습니다.
1억 7천에 낙찰되었다는 어린왕자 삽화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조언을 구하기도 했고 자신이 책에 들어갈 그림을 직접 그리는 등 여러 가지로 공을 들였습니다.
1943년 4월 생텍쥐페리의 위대한 소설 어른들을 위한 동화 '어린왕자'가 완성되어 출간됩니다. 영어판과 프랑스어 판을 동시에 출간하며 그는 세계적인 유명 인사가 됩니다.
그런 그가 친독파로 알려지며 프랑스에선 구설수에 오르면서 그 논쟁을 돌파하고자 프랑스 군대에 재입대를 합니다.
정찰대로 들어가지만 적정 나이 35세가 지났기에 항공기를 운행할 수 없어 지상직을 수행하지만 그의 조종사의 꿈을 버리지 못하고..
중장에게 끈질긴 청탁으로 5번 + 3번의 조건부 비행으로 자격을 얻게 되었습니다.(대단하다..) 여러 번의 부상은 있었으나 무사히 비행을 마치며 임무를 수행하였고 드디어 하기로 했던 마지막 8번째 비행을 실행합니다.
1944년 7월 31일 오전 8시 반. 홀로 정찰 임무를 받고 6시간 분의 연료를 채운 후 론강 골짜기를 따라 정찰을 한 뒤 코프시카 기지로 돌아오는 정찰비행이었습니다. 이것이 그의 인생의 마지막 비행이었습니다. 6시간이 지나도 그는 돌아오지 않았고 전시상황이라 사고 원인은 조사되지 못하고 8시간 후 결국 실종으로 사망처리가 되었습니다.
60년 만에 발견된 격추된 비행기
한 간에는 그가 우울증 때문에 자살한 것은 아닐지 의견이 모아지기도 했습니다. 실제 친독일과 반독일의 색깔논쟁과 친한 친구 기요메의 죽음으로 우울증이 찾아왔다고 합니다.
그로 인해 폭음을 했고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좋지 않은 상황이었기에 그런 이야기가 나왔나 봅니다.
죽음 속에서
안데스산맥을 걸어서 빠져나와 그 친구도 결국 격추당해 죽음을 피할 수 없었네.. 나도 그럴까?
생택쥐페리의 편지
그렇게 생텍쥐페리의 죽음이 잊혀갈 때쯤 1998년 4월 마르세유 남동쪽 바다에서 한 어부가 던진 그물에 우연히 생텍쥐페리의 팔찌를 건져 올리게 되며 그의 행보가 밝혀졌고
생펙쥐페리 이름이 새겨진 팔찌
2008년에는 2차 세계대전 때 독일 공군 조종사로 있었던 사람이 프랑스의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자신이 생텍쥐페리가 타고 있던 비행기를 격추했다며 고백하며 충격을 주었습니다.
내가 그 비행기를 쏴 격추 시켰다.
비행기 안의 사람이 누구인지는 보지 못했다. 그는 내가 좋아하는 작가였다. 만일 생텍쥐페리라는 것을 알았다면 쏘지 않았을 것이다. 호르스트 리페르트의 인터뷰 중자신이 원하는 비행을 마지막으로 그는 사라 졌습니다.
자신이 쓴 '어린왕자'처럼 자신의 별을 찾아간 건 아닐까요? 작가이자 조종사인 생테쥐페리의 삶에서 어린 왕자를 생각하니 그 이야기 자체가 자신의 이야기가 아니었는지 생각해 봅니다.
생텍쥐페리와 콘수엘로 순신
어린 시절 죽었던 자신의 동생 이야기로 마지막 장면을 만들었고
자신의 아내의 모습을 장미로 이야기했으며 자신이 직접 그린 어린왕자의 금색의 짧은 곱슬의 머리 스타일은 아내 콘수엘로의 모습이라고 한다.
작가의 삶을 보며 어린 왕자를 읽으니 무언가 더욱 와 닳는 이야기가 되는 것 같아요.
벨쿠르 광장에 있는 어린 왕자와 생텍쥐페리 동상
어린 왕자 [ The Little Prince ]
우주적 동경과 인간적 진실의 신화
목차
"아이는 어른의 아버지" 혹은 "생명의 아름다운 약속"
밖으로부터의 성찰
그토록 이상한 어른들의 세계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보이지 않는 심연에서의 책임과 배려
더 생각해 볼 문제들
추천할 만한 텍스트
"아이는 어른의 아버지" 혹은 "생명의 아름다운 약속"
「무지개」라는 시에서 "아이는 어른의 아버지"라고 노래한 이는 영국의 시인 워즈워스였다. 신약성서 『마태복음』에도 "너희가 생각을 바꾸어 어린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는 말씀이 있다. 오스카 와일드는 "어린애의 몸은 신의 몸과 같다"고 말한 바 있으며, 생텍쥐페리(Antoine de Saint-Exupéry) 는 『인간의 대지』에서 "일종의 황금 과실"과도 같은 어린이는 "생명의 아름다운 약속"이라고 적는다. 피카소는 "어린이들은 모두가 예술가"라고 말한 바 있으며, 아미엘 같은 이는 "어린아이들의 존재는 이 땅 위에서 가장 빛나는 혜택"이라고 예찬했다.
신문학 초기에 육당 최남선은 「해에게서 소년에게」라는 시에서 "저 세상 저 사람 모다 미우나/그중에 똑 하나 사랑하는 일 있으니/담 크고 순진한 소년배들이/재롱처럼 귀엽게 나의 품에 와서 안김이로다" 하고 노래한 바 있다. 어린이의 아버지로 불리는 방정환에게 어린이는 가없는 예찬의 대상이다.1) 어린이는, 바슐라르의 표현대로, 크게 보고 아름답게 본다. 그래서 피카소가 그랬듯이 예술가가 되고, 방정환이 신뢰했듯이 시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동화의 세계에서나 서정시의 세계에서 어린이의 이미지는 대개 그러하다.
이와 같은 어린이의 본성을 가장 극적으로 드러낸 작품으로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The Little Prince)』를 꼽는다 해도 별 이의가 없을 것이다. 확실히 『어린 왕자』는 어린이의 영혼과 눈으로 인간과 세상과 우주를 성찰한 탁월한 작품이다. 어른을 위한 동화라서 어린이가 읽기에는 다소 어렵겠지만, 어른들이 이 작품을 읽는다면 잃어버린 자신의 동심을 동경하면서 시종 공감하고 반성적 상념에 젖어들게 된다. 『어린 왕자』를 심층 분석한 오이겐 드레버만은 『본질적인 것은 보이지 않는다』에서 이 작품의 전반적 성격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2)
『어린 왕자』가 우리에게 이렇게도 깊은 위안과 공감을 주는 까닭은 잃어버린 어린 시절의 영원한 꿈 때문일까? 물론 그렇다. 그러나 그것만은 아니다. 여기에 덧붙여지는 것으로서, 이 작품은 어른들의 광기에 물든 강압적 세계로부터 예술적, 풍자적으로 인간을 해방시켜 주기 때문이요, 현실세계의 숨 막히는 사막 속에서 우리가 비로소 숨을 돌릴 수 있도록 해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사랑의 조건이 없는 성실성에 대한 믿음을 『어린 왕자』가 어느 정도 되살려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간이 서로 노력과 책임의 세계를 약속하며 또 구현해 보인다. 그것은 죽음 속에서도 깨지지 않는 사랑의 결합을, 우정과 연대의 숭고한 노래를 매혹적인 소박함과 아름다움의 이미지로 보여준다.
밖으로부터의 성찰
『어린 왕자』는 비행기 기관 고장으로 사하라 사막에 불시착한 비행사가 소혹성 B612호에서 왔다는 어린 왕자를 만나, 그와 나눈 이야기와 행동을 기록한 작품이다. 비행사는 어린 시절 코끼리를 삼키고 있는 보아 뱀 그림을 그려서 어른들에게 보여준 적이 있다. 그러나 어른들은 그 그림에서 보아 뱀을 보지 못한 채 모자 형상만을 볼 따름이었다. 어린이에 비해 어른들이 얼마나 본질적인 것을 잘 보지 못하는가를 일찌감치 체험했던 것이다.
그 어린이가 그림에 대한 꿈을 접고 이제 비행사 어른이 되어 있다. 양 한 마리만 그려달라는 어린 왕자의 부탁을 받고 그림을 그려주는 과정에서 비행사는 자신도 어느덧 어린 시절 자기 그림을 제대로 보아주지 못했던 어른들과 닮아 있음을 절감하면서 반성하게 된다. 그렇게 어린 왕자를 알아가게 된다. 이야기는 소혹성에서 어린 왕자의 생활, 지구에 오기 전까지 어린 왕자의 별 여행기, 지구에서의 여정을 담고 있으며, 1년 만에 어린 왕자가 죽어 사라지는 것으로 전개된다.
일차적으로 『어린 왕자』는 지구 바깥에서 온 어린 왕자의 독특한 시선과 행동으로 독자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하다. 바깥의 시선과 사유를 통해서 지구 안에서 살아가는 어른들의 삶에 대한 반성적 성찰을 유도하고 있는 텍스트이다. 일상적인 삶의 억압과 의무, 경쟁적 현실에서 살아남기 등 여러모로 어른들은 어린 시절에 꾸었던 순정한 꿈과는 다르게 소외된 삶을 억지로 살아가는 경우가 많다. 꿈의 근원으로부터 멀어진 채 고립과 소외의 늪에서 때때로 진실하지 않은 방법으로 자기 삶뿐만 아니라 남들의 삶도 일그러뜨릴 수 있다. 진정한 인간관계가 아득해질 뿐만 아니라 개개인은 존재 가치로부터 멀어지기 일쑤이다.
그러기에 삶의 진정한 가치를 갈구하는 개인들은 영혼의 별자리를 동경하게 되고, 그러면서 프루스트가 그랬듯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방황하고 탐색하게 마련이다. 그러니까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는 잃어버린 시간, 잃어버린 공간, 잃어버린 존재를 찾아서 진정한 인간 영혼의 성장을 모색한 소설이라 할 수 있다.
그토록 이상한 어른들의 세계
이 소설에서 화자는 어린 왕자가 "당신은 마치 어른 같은 말을 하는군!" 하고 말할 때마다 부끄러움을 느낀다. 그렇다면 부끄러움의 대상이 되는 어른의 세계, 다시 말해 본질적인 것을 잃어버린 어른들의 삶의 실상은 어떠한가. 어린 왕자는 자신이 알고 있는 어느 별의 검붉은 얼굴을 한 신사 이야기를 한다.
그 분은 아무도 사랑한 일도 없었고, 일상 하고 있는 일이란 덧셈뿐이야. 그리고 그는 날이면 날마다 당신처럼 '나는 중요한 일로 바쁘단 말이야'라고 입버릇처럼 되풀이하고 또 되풀이하지. 그리고는 그 말이 무슨 자랑인 양 뽐내기만 하거든.
이 신사처럼 어른들은 늘 덧셈을 하느라 바쁘다. 덧셈이란 무엇일까. 사랑이 결여된 욕망의 덧셈일 수 있다. 권력, 명예, 재산 등을 보태려는 욕망의 덧셈 말이다. 뿐만 아니다. 어린 왕자가 자신의 소혹성을 떠나 여행했다는 몇몇 별들에서 만난 어른들의 이야기들에서 어른들의 세계는 비판적 성찰의 대상이 된다.
첫 번째 별에는 왕이 살고 있었다. 모든 존재를 자기 신하로 삼고 싶어 하는 권력의 화신이다. 금지와 허용, 지배와 명령을 통해 모든 존재들이 자기에게 복종하도록 하려 한다. 두 번째 별에는 허영심이 많은 독단자가 살고 있었다. 그는 자신을 칭찬하고 찬미하는 말 이외에는 들을 줄 몰랐다. 세 번째 별에서는 술고래를 만났다. 부끄러운 것을 잊으려고 술을 마시고 또 술을 마시는 것이 부끄러워 술을 마신다는 무기력한 술꾼을 어린 왕자는 이해할 수 없어한다. 네 번째 별에서 만난 실업가는 숫자만 세고 있었다.
하늘의 별마저 소유하고 싶어 안달인 그는 소유의 욕망에 사로잡힌 어른의 상징이다. 가장 작은 별인 다섯 번째 별에서 가로등을 켜는 사람은 맹목적이고 부조리한 어른의 표상으로 비쳤다. 여섯 번째 별에서 만난 지리학자는 허황된 지식분자로 보였다. 이런 별들을 거쳐 지리학자의 권유로 어린 왕자는 일곱 번째 별로 지구를 택한다.
지구는 "111명의 왕(분명히 흑인 왕까지 넣어서)과 7천 명의 지리학자, 90만 명의 실업가, 750만 명의 술고래, 3억 천백만 명의 젠 체하는 사람들, 즉 모두 합해서 약 20억의 어른들이 살고" 있는 커다란 별이었다. 이런 어른의 생태는 인간다움의 본성에서 멀어진 세계다. 어린 왕자가 보기에는 참으로 이상한 세계다. 일상적으로 늘 되풀이되는 현상을 놓고 이상한 세계라고 얘기함으로써 본질적 반성을 촉구하는 셈이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어린 왕자가 파악한 이상한 어른들의 세계에서 개인들은 자신의 존재값을 입증하지도 못하고, 타인과의 진정한 관계도 맺기 어렵다. 타인에 대한 진정한 사랑이나 배려가 거세된 자기 욕망으로 인해 고독과 불안은 깊어만 간다. 세계의 의미는 감소되고 꿈은 한없이 추락한다. 그렇다면 이런 무의미한 일상에서 우리는 어떻게 의미를 추구하고 새로운 삶의 지평을 열어나갈 수 있을 것인가. 의미로 충만한 진정한 삶을 위한 지상의 척도는 어디에 있는가. 『어린 왕자』에서 여우와 어린 왕자 사이의 대화 부분이 주목되는 것은 이런 맥락에서이다.
여우가 보기에 "인간들은 이미 길들인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모른다. "그들은 지금 아무것도 알 틈이 없어요. 그들은 이미 만들어 놓은 물건이나 상점에서 사지요. 그러나 우정을 파는 상점은 없으니 인간들은 친구가 없어요" 하고 여우는 진단한다. 교환가치가 횡행하는 자본주의 현실에서 진정한 인간관계가 차단되어 있음을 예리하게 지적하고 있는 대목이다. 특히 '우정을 파는 상점'이 없다는 통찰은 비범하다. 일상적인 의무와 눈앞의 이익에 눈이 먼 나머지 새로운 창조적 가치를 발견하고 추구하는 것에도 인간들은 게으르다.
이미 길들인 것 이외에 아무것도 모른다고 한 여우의 말은 그런 뜻이다. 왜 그런가. 보이는 것에 비해 보이지 않는 것의 중요성을 제대로 헤아리는 마음의 눈을 지니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여우는 말한다. "마음으로 보지 않으면 잘 보이지 않는다는 거예요. 매우 중요한 건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보이지 않는 심연에서 인간과 삶의 진실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눈앞에 보이는 이익에 눈이 멀어 있기 때문이다. 어린 왕자는 그것을 이해할 수 없어 한다. 어린 왕자에게 영혼의 교사 역할을 하는 여우가 보기에도 마찬가지다.
보이지 않는 심연에서의 책임과 배려
어린 왕자는 자신의 소혹성에서 장미를 길들이다 속상해서 떠나왔다. 장미는 때때로 아무렇게나 말하고 요구했다. 때로 거짓말을 하다가 부끄러워서 얼버무리기도 했다. 어린 왕자는 자기가 길들인 장미지만, 장미의 이런저런 태도 때문에 장미에게 공감하거나 동정하지 않았다. 그래서 장미를 떠나왔던 것이다. 그런데 어린 왕자는 그것을 후회한다.
사실 나는 아무것도 이해할 줄 몰랐어. 꽃이 하는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판단했어야 했는데. 꽃은 나에게 향기를 뿜어 주었고 눈부신 아름다움을 보여 주었는데. ··· 그 불쌍한 말 뒤엔 따뜻한 마음이 숨어 있는 걸 눈치 챘어야 했는데.
그러면서 "하긴 난 꽃을 사랑하기엔 너무 어렸어" 라고 말하기도 한다. 장미가 겉으로 드러낸 말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장미의 심연을 보았어야 했다는 어린 왕자의 반성적 사유는 매우 도저하다. 그렇지 않은가. 세상의 많은 인간관계는 바로 이런 지점에서 그릇되지 않던가. 세상의 많은 다툼과 시기, 미움과 결별이 이런 심연의 눈 혹은 심연의 사유 내지 심연의 배려의 결여에서 비롯되지 않았던가 말이다. 이렇게 반성적 사유를 길어 올릴 줄 아는 어린 왕자에게 여우는 책임의 윤리를 거듭 강조한다. "당신은 당신이 길들인 것에 대해서는 끝까지 책임을 져야 하는 거예요. 당신의 장미에게 당신은 책임이 있어요."
책임과 배려를 위해서는 보이지 않는 심연을 성찰할 수 있는 심안을 지녀야 한다. 화자는 이 점을 거듭 강조한다. "집이건 별이건, 사막이건 그들을 아름답게 하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거야!" 그렇다. 어린 왕자도 그랬었다.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거야."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우리는 심연의 심안을 회복해야 한다. 우리가 본래 지니고 있던 것이되, 일상적이고 세속적인 삶에서 잃어버린 것, 바로 어린 왕자는 눈을 회복해야 하는 것이다. 그 눈의 회복을 위해 우리는 부단히 탐구해야 함을 작가는 아울러 강조한다.
"어린 왕자는 한 번 묻기 시작하면 답을 얻을 때까지 묻지 않고는 못 견디는 성미였다." 같은 부분에서 명료하듯, 묻고 또 물어야 한다. 정녕 인간적인 것의 상실과 회복과 관한 우주적 드라마를 『어린 왕자』는 연출해 보인다. 그런 면에서 이 작품은 오래된 미래의 진실과 통하는 신화다. 그 신화를 통해 인간은 본원적인 삶을 새롭게 꿈꿀 수 있는 가능성을 열게 된다. 꿈은 진실한 존재 정립의 가능성과 아울러 고정 관념과 인습의 틀을 넘어선 역동적 창조성의 밑거름이 된다. 『어린 왕자』를 통해 우주적 동경과 인간적 진실의 신화를 넉넉하게 가늠해 보고 새롭게 꿈꿀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할 것이다.
더 생각해 볼 문제들
1. 『어린 왕자』에서 작가는 여섯 살 때 코끼리를 통째로 꿀꺽 삼켜버리는 그림을 보고 밀림 속의 모험에 대해 여러 가지로 깊이 생각하다가 자신의 그림 1호를 그린다. 그런데 어른들은 그 그림에서 모자를 읽어낸다. 자기가 그린 그림은 모자가 아니었다. 코끼리를 통째로 삼킨 보아 뱀이 그것을 소화시키고 있는 그림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어른들이 그것을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에 어린 시절의 작가는 다시 그림 2호를 그려야 했다. "어른들에게는 항상 설명을 해주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말이다. 작가의 그림 1호와 2호의 차이는 무엇인가? 그리고 각각의 그림들에 대한 어른들의 반응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2. 비행기 기관 고장으로 사막에 불시착한 지 8일째 되는 날, 물이 떨어진 작가는 어린 왕자와 함께 사막에서 물을 찾는다. 그런데 그들이 찾은 우물은 사하라 사막에 있는 샘 같지 않다. 사하라 사막의 샘은 고작 모래 속에 뚫린 구멍일 뿐인데, 그들이 발견한 샘은 마을에 있는 우물 같았다. 도르래도, 물통도, 끈도 다 준비되어 있다. 어린 왕자가 도르래를 움직이자 "오랜 바람을 잊었던 바람개비처럼 도르래는" 소리를 내며 돌아간다. 그 소리를 들으며 어린 왕자는 "이 우물이 잠에서 깨어난 노래를 부르고 있어" 하고 환호한다. 이 장면의 상징적 의미는 무엇일까?
3. 『어린 왕자』의 에필로그에서 작가는 어린 왕자가 지상에 나타났다가 사라진 곳을 "가장 사랑스럽고 가장 슬픈 풍경"으로 그린다. 그런 다음 이렇게 마무리한다.
이 그림을 자세히 봐두었다가 여러분이 언젠가 아프리카 사막을 여행하다 이곳을 보게 되면 즉시 알아볼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만약에 이곳에 당도하게 되거든 급히 지나쳐버리지 말고 바로 저 별 아래에서 잠시 기다려 보라. 그러다가 꼬마 신사가 나타나서 웃거든, 그리고 그의 머리카락이 황금빛이고 그가 당신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거든, 당신은 그가 누구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만약 이런 일이 일어나거든 나에게 한 마디 기별해서 나를 기쁘게 해 주기 바란다. 그가 돌아왔다고 말이다.
이런 결말은 여러 생각거리를 독자에게 제공한다. 왜 작가는 굳이 어린 왕자가 출현했던 사건을 실재했던 사건이라는 느낌이 들게 하려는 것일까? 왜 작가는 어린 왕자가 다시 나타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어린 왕자가 다시 나타난다면 그것은 어떤 의미일까? 예수 재림 신화와는 어떤 관련이 있을까? 그렇게 잠시 왔다가 자기 별로 돌아간, 그리고 다시 돌아올지도 모를 어린 왕자는 무한 경쟁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올 수 있을까? 결국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등등. 이런 질문들에 대해 생각해 보고 그 밖에도 다른 가능한 질문 목록들을 만들어 보자.
추천할 만한 텍스트
『생 떽쥐빼리의 어린 왕자와 그 작품 세계』, 김정숙·박동준 지음, 한양대학교 출판부, 2000.
『장미와 이카루스의 비밀』 오이겐 드레버만 지음, 고원 옮김, 지식산업사, 1998.
각주
1) "어린이 나라에 세 가지 예술이 있다. 어린이들은 아무리 엄격한 현실이라도, 그것을 이야기로 본다. 그래서, 평범한 일도 어린이의 세상에서는 그것이 예술화하여 찬란한 미와 흥미를 더하여 가지고 어린이 머릿속에 다시 전개된다. 그래, 항상 이 세상 모든 것을 아름답게 본다. 어린이들은 또 실제에서 경험하지 못한 일을 이야기하는 가운데서 훌륭히 경험한다. 어머니와 할머니 무릎에 앉아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을 때, 그는 아주 이야기에 동화해 버려서, 이야기 세상 속에 들어가서 이야기에 따라 왕자도 되고 고아도 되고 또 나비도 되고, 새도 된다. 그렇다고 해서 어린이들은 자기의 행복을 더 늘려가고 기쁨을 더 늘려가는 것이다. 어린이는 모두 시인이다. 본 것, 느낀 것을 그대로 노래하는 시인이다. 고운 마음을 가지고, 아름답게 보고 느낀 그것이 아름다운 말로 흘러나올 때, 나오는 모두가 시가 되고, 노래가 된다. 여름날 무성한 나무숲이 바람에 흔들리는 것을 보고, 바람의 어머니가 아들을 보내어 나무를 흔든다 하는 것도 그대로 시요, 오색이 찬란한 무지개를 보고 하느님 따님이 오르내리는 다리라고 하는 것도 그대로 시다."(방정환, 「어린이 예찬」 중에서)
2) 이 책은 우리나라에서 『장미와 이카루스의 비밀』로 출간되었다. 드레버만은 독일의 파더본 가톨릭 신학대학에서 철학·신학·정신분석학에 대한 강의와 연구를 했다. 대표작으로는 『정신분석학과 윤리신학』, 『심층심리학과 성서해석』, 『누이야, 나 좀 들어갈게: 그림동화의 심층분석』 등이 있다.
<어린 왕자>의 표지출처: 세계문학사 작은 사전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어린 왕자 [The Little Prince] - 우주적 동경과 인간적 진실의 신화 (서양의 고전을 읽는다, 2006. 5. 22., 강대진, 김수용, 김연경, 김욱동, 김주언, 김주연, 박상진, 신정현, 안삼환, 우찬제, 이명섭, 이병훈, 전영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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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주에 민선미 작가님의 책 <기다림은 희망을 낳고>가 출간된다고 합니다. 오래 인고의 시간을 견뎌온 마음이 결실을 맺게 되어 기쁘네요. 저도 지인 주려고 책 주문했습니다. 많이 많이 축하해 주세요 :)
민선미 (에세이스트) 민들레 홀씨처럼 세상의 만물을 보고, 듣고, 내 언어로 사유하여 나눕니다. 난임을 겪는 부부에게 위로와 용기를 낼 수 있도록, 포기하지 않으면 꼭 성공할 수 있다고 희망을 전합니다. 문장 수집가 이야기 매거진, [브런치북]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 난임부부로 견뎌온 날들 매거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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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최근 6개 글에서 말씀 나눠주신 작가님들이세요.
알콩달콩대디 늦깎이 결혼 후 쌍둥이인 알콩이 달콩이를 낳아 아내와 함께 육아를 하고 있는 평범한 직장인 아빠입니다. 첫 육아의 경험과 시행착오, 개인적인 노하우 등을 공유하고자 합니다.
○시즌1_교과서에 실린 작가 110명○
*아래는 '가나다순'이고 선호도가 높은 작가님들을 우선순위로 소개해 드릴께요
강은교
고정희
공선옥
곽재구
기형도
길재
김광규
김광섭
김기택
김만중
김소월
김소진
김수영
김승옥
김시습
김영랑
김용택
7. 김유정
김종삼
김춘수
11. 나태주
나희덕
류시화
문정희
문태준
3. 박경리
박두진
박목월
2. 박완서
박인로
박재삼
박지원
박태원
백무산
백석
13. 생텍쥐페리
서유미
서정주
성삼문
성석제
송순
신경림
신동엽
신석정
신영복
심훈
안도현
9. 양귀자
염상섭
오정희
유치진
유치환
1. 윤동주
윤선도
윤오영
윤흥길
이강백
이규보
이근삼
이문구
이상
이상화
이성부
이순원
이양하
이용악
이육사
이청준
이태준
이호철
이황
이효석
임철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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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몽주
5. 정약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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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용
정철
정현종
12. 정호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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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섭
차범석
채만식
충담사
천양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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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일남
최치원
프란츠 카프카
피천득
하근찬
한강
한용운
함민복
허균
헤르만 헤세
현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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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석중
황동규
8. 황석영
황순원
황인숙
황진이
황현
○시즌2_추천 작가&외국 작가○
*하단은 브런치 작가들님께서 신청해 주신 작가님들입니다
조정래
공지영
이해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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