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시인
만주 명동촌의 문학 청년
윤동주는 1917년 12월 30일 만주 명동촌에서 태어났고, 1945년 2월 16일 일본 규슈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숨졌다. 윤동주의 국적은 한 번도 조선인 적이 없었다. 일제가 조선을 점령 중이던 시기에 만주에서 태어났고 일제가 패망하기 직전에 일본에서 죽었다. 명동촌은 조선인들이 모여 살던 만주 북간도 지역으로, 1910~20년대 북간도 지역의 종교, 교육, 독립운동의 중심지였다.
명동소학교 시절부터 윤동주는 문학적 소양을 보였다. 학교 신문에 동시를 발표하기도 했고, 고종사촌이자 동창인 송몽규와 함께 《새 명동》이라는 월간 잡지를 펴내기도 했다. 윤동주는 1935년 평양의 숭실중학교에 다니던 시절 더욱 문학에 전념하였고, 특히 백석의 시집 《사슴》을 손수 베껴 들고 다닐 정도로 좋아했다고 한다. 신사 참배 거부 문제로 숭실중학교가 폐교되자 윤동주는 만주 용정으로 돌아와 일본인 학교에 편입했는데, 이 시절 《가톨릭 소년》에 〈병아리〉, 〈오줌싸개 지도〉 등의 동시를 발표한다.
우물 밖으로 나가다
윤동주는 의과대학 진학을 소망했던 아버지의 고집을 꺾고 1938년 고종사촌 송몽규와 함께 연희전문 문과에 입학한다. 대학 시절 윤동주는 신중하고 과묵한 성품으로 독서에만 몰두했다. 특히 정지용, 김영랑, 백석, 이상, 서정주의 시를 좋아했고, 발레리, 지드, 보들레르, 프랑시스 잠, 릴케 등에 심취해 있었다고 한다. 졸업반이던 1941년에는 진학과 시국에 대한 불안과 고민, 가정에 대한 걱정 등으로 무척 괴로워하며 지냈는데, 4학년 여름 방학을 맞아 고향에 돌아가 쓴 시 〈또 다른 고향〉에 그의 불안한 내면 의식이 잘 드러난다. 산책은 그의 중요한 일과이자 취미였는데, 같이 하숙 생활을 했던 후배이자 국문학자인 정병욱에 의하면, 그는 늘 학교의 숲과 서강의 들판과 창내벌(지금의 창천동)을 걸으며 깊은 사색에 잠기곤 했다고 한다. 현재 윤동주가 산책했던 인왕산 자락에는 ‘시인의 언덕’이 조성되어 있다.
윤동주는 1942년 송몽규와 함께 일본 유학길에 오른다. 식민지 나라인 일본으로의 유학을 결정하면서, 현실과 타협할 수밖에 없었던 자신에 대한 참회의 마음을 〈참회록〉에 담기도 했다. 릿쿄대학 영문과와 도시샤대학 영문과에서 수학하면서 그는 시 창작에 몰두한다. 이때 쓴 작품이 〈쉽게 씌어진 시〉이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세상에 나오기까지
윤동주가 남긴 단 한 권의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는 원래 윤동주가 연희전문학교 졸업 기념으로 자신이 쓴 시 중 19편을 골라 출판하려던 것이었다. 그러나 일제 검열의 통과 여부를 염려한 연희전문 교수 이양하의 만류로 출간을 보류하고, 자필로 3부를 만들어 이양하에게 한 부, 후배 정병욱에게 한 부를 주고 나머지 한 부는 자신이 간직했다고 한다. 정병욱은 1943년 학병으로 전장에 끌려 나가게 되자, 윤동주의 시집을 어머니에게 맡기면서 들키지 말고 잘 보관해 줄 것과, 윤동주나 자신이 돌아오지 못할 경우 연희전문의 선생들을 찾아가 출판을 의논해 줄 것을 신신당부하고 떠났다고 한다. 정병욱의 어머니는 마루 널빤지를 뜯어 그 아래 항아리를 묻고 지푸라기로 건조 상태가 유지되도록 한 뒤 집안의 소중한 물건들과 함께 이를 보관하였다. 해방 뒤 1948년, 정병욱은 마침내 이 시집을 다른 유고 작품들과 함께 출간할 수 있었다
ㅡ <교과서가 사랑한 작가 110> 중에서 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