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진건 작가님은 124년 전에 태어나 작가활동을 하셨던 분입니다. 그것을 감안해서 보신다면 우리나라 문학사에서 그 위상을 높이 평가하는 이유를 공감하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오늘 서두글은 단편소설 1장을 써봤습니다. 지구상 빙하가 모두 녹아 부동산 부자들이 벼락거지가 되는 주제로 다소 황당한 내용을 작가의 창조적 자유를 기대어 써보았어요. 살짝 코믹버젼으로 가려다 애매해 졌습니다. 시간에 쫓겨 졸속이나 작가의 '현실감과 상상력'을 고민하며 해학적으로 접근했는데요, 2장의 전개는 브런치 작가님의 상상력에 바통을 넘겨 봅니다.
지구상의 빙하가 모두 녹으면 해수면은 최대 60m 이상 상승할 수 있다고 합니다. 10억 명이 사는 세계의 해안 도시는 모두 물에 잠긴다고 합니다. 지난 30년 동안 우리나라 해수면은 세계 평균의 2배인 9.1cm나 상승했습니다. 해외에선, 이미 해안도시들이 이를 대비해 대규모 땅을 사서 이전이 완료한 나라도 있고 이전을 계획하고 있는 나라들도 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도 이에 대비해 세계 최초의 해상 도시가 부산에 세워질 계획입니다. 그래 작가로서 시대의 중차대한 주제에 조심스럽게 다가가 봅니다.
제목 : 똑재자의 환각도시
환각(幻覺) : 감각 기관을 자극하는 외부 자극이 없는데도 마치 어떤 사물이 있는 것처럼 지각함. 또는 그런 지각. 환시(幻視), 환청(幻聽), 환후(幻嗅), 환미(幻味) 따위가 있다.
2070년 지구상 모든 빙하가 녹아 바닷가나 강 주변에 인접한 도시들이 물속으로 사라졌다. 한때 대한민국의 자존심이었던 서울을 비롯 주요 도시들이 상당수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역세권, 한강뷰를 자랑하던 이들은 이젠 어리석은 선조인양 초등학교 사회 교과서에 실리기 시작했다.
국가 주요기관을 주무르고 있는, 똑재자의 후손들은 그런 오명을 의식했는지 옛 도시 '강남'의 지명을 '물남'으로 변경해, 뒤늦게 해상도시로 탈바꿈해 집값을 다시 한번 올리려고 발버둥 치고 있다.
< 1장 파랗게 사라진 물남도시>
북극, 가장 높은 곳을 열망하는 인간에게 이 미지의 상층부는 신비이며 한번 즈음 깨뜨려 보고 싶은 도전의 허들이었다.
북극이라는, 지구 최상단부에 오른 사람들은 첫발을 내딛으며 정복을 외쳐댔다. 허나자연은 정복을 섣불리 논하는 인류에게 거센 저항으로 존재감을 드러냈다. 북극을 여행하면 종종 맞닥뜨리는 물 위를 떠내려가는 얼음덩이인 유빙(流氷)이 그것이다. 정복을 외치는 인간은 유빙을 피하려 허둥대기 일쑤였고, 그러다 더 큰 암초를 만나 그곳에서 최후를 맞기도 했다.
해상도시가 일상화된 2070년, 북극은 이젠 유빙이나 암초가 아니라 거대한 몸뚱이로 인간들의 정복전쟁에 철퇴를 가했다.동화 <해님과 바람>속 나그네는 이제 해님이 저지른 만행을 현실에서격렬하게 만나게 되었다. 북극은 해님의 힘을 빌어 스스로를 내려놓으므로 지구를 물바다로 만들어 버렸던 것이다. 급기야 북극은 물론 남극의 모든 빙하가 녹은 것이다.
'똑똑하고 재물에 눈이 밝으며 불의하고 불법하게 돈을 잘 모은 사람들'이란 의미의 '똑재자'들의 기원은 수백년 아니 수천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려시대, 조선시대의 간신이니 탐관오리가 연상되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다. 근현대사만 국한해서 보자면 그들은 친일파나 천민자본주의자에 국한 될 것 같지만, 우아하고 명석하고 후덕한 사람들도 남몰래 이 똑재자의 배에 승선하곤 했다.
2024년 당시 빙하가 녹는다는 소식은 그저 일부 학자나 정부, 열혈 환경단체만이 맹신하는 신화 같았다. 그해 5월까지, 미국에 600건이 넘는 토네이도가 발생하고, 중국에 100년 만의 홍수가 범람하며, 인도와 필리핀은 체감온도 50도의 폭염, 아프리카의 폭우과 홍수에도 사람들은 그러다 말 자연현상이라 여기며 무관심 했다. 아니 먹고 사는 일만큼 급할 것까진 없었다.
2070년 빙하가 모두 녹아버린 지금, 사람들의 인심은 흉흉해졌고 언어는 더욱 난폭해져만 갔다. 과거 재벌 내지는 신흥부자였던 사람들이나 지도상 모든 지명엔 여지없이 '쌍자음'을 붙이는 게 유행이자 관행이 되었다.
50년 전 탄소배출을 부추긴 기득권층은 동시에 빙하가 녹는 것을 막아줄 재력과 재능이 있었다. 그들이 외면한 빙하는 역설적으로 지구상 가장 잘 사는 도시들 위주로 물벼락을 안겨주었다.
2070년을 살아가는 그들의 후손들은 그들의 실책을 수업시간에 배울 때면 입에서 욕지거리가 나오곤 했다. 그들의 이름과 모든 도시명에 '쌍자음'을 붙이는 일, 그것은 과거의 영화를 그리워하는 마음임과 동시에, 똑재자들이 허망하게 망쳐버린 찬란했던 도시에 대해 분개하는 욕지거리인 것이다.
*천민 자본주의(賤民資本主義, 영어: pariah capitalism, 독일어: pariakapitalismus)는 독일의 사회학자 막스 베버(독일어 M. Weber)가 처음으로 사용한 전근대 사회에 있었던 비합리적이고 비인간적인 폐쇄적 자본주의 또는 그 소비 및 생산 문화를 뜻한다. 오늘날의 '천민 자본주의'의 의미는 건전한 자본주의 문화를 만들어내지 못하고 폐쇄적이고 퇴폐적인 자본주의 문화를 만드는 정치, 사회, 경제, 문화적 현상 또는 그러한 제도적 상황을 일컫는다.
가령 김영감을 낌영감이라 부를 때, 그것은 책망이며 실소이며 위트인 것이다. 낌영감은 자신의 성씨를 쌍기억으로 부르는세상에 이젠 불쾌하지도 서운하지도 않다. 미래를 읽지 못했던, 우둔한 자신을 웃게 해 주는 애칭으로 겸허히 받기에 이르렀다.
낌영감이 깡원도로 옮겨와 산지도 언 5년이 되어간다. 덥수룩한 수염과 찬가래를 찧어 올리듯 내뱉은 기침소리에서 패색 짙은 말년의 삶이 읽힌다. 인생이 허무한 거야 모르는 바 아니지만,허무를 현실에게 맞닥뜨리는 순간은 찰나의 희미한 조각일 때가 있다. 낌영감이 기침을 모로 내쉬며 전동휠체어에 의지해 자기집 마당을 가로지를 때였다. 마당 후미진 구석에서 반짝이는 물건을 발견했다. 에메랄드 빛이 도는 옥빛의 물건은 구슬이었다. 100년전 부터인가 유행했다던 구슬치기 놀이에 쓰였던그 구슬이었다. 그것은 낌영감이 50년 전 손바닥을 지압하기 위해 만지작 거리던 그 지압 구슬과도 비슷했다. 오래된 구식 한옥인 이 집은 인적이 드문 곳이다. 썰악산 초입부에 자리 잡은 이 집은 뷰가 좋고 공기도 맑다. 그날따라 청명한 듯 파란 하늘에 떠다니는 뭉게구름을 보자니 태연히 숨겨놓은 설움과 탄식이 비집고 나오려 했다. 낌영감은 눈물샘 입구를 단퇴하여 막아버리듯 깊은 한숨으로 태연한 산책을 가장하는 데 성공했다. 옥구술의 빛깔을 다시 한번 지긋이 바라보자니 2024년 어느 해 아침 풍경이 눈에 아른거렸다.
세상의 불평등이 당연했고 그 톱니바퀴를 밀어내던 그 시절의 아침은 평온했다.
그 옛날 한강은 물빛이 좋아 '물강'이라는 이름으로 변경했다. 이름이 바뀌어도 120년전 6.25전쟁때 피난으로 얼룩진 강은또한번 글로벌 물난리에 탄식을 쏟아내는 듯하다.
2070년 수중도시로 변해 이젠 간헐적으로 물거품만 피어오르는 도시. 그 도시의 괴담은 오래전부터 회자되고 있었다.
때는 1960년대 초반, 똑재자들과 독재권력이 결탁해 물남시의 부동산 거물들과 광범위한 접촉이 있었다. 당시 물남시는 홍수 다발지역으로 침수피해가 많았다. 물남시압꾸정이란 동네는 침수피해가 심해 누구도 거들떠 보지 않았다. 똑재자들은 그 도시의 땅들을 헐값에 사들이기 시작했고 작게는 만평에서 수백만 평까지 땅을 사들였다. 그리고 이 헐값으로 사들인 땅들을 똑재자와 그들의 하수인들이 나눠 가졌다. 이제 그들은 이 헐값으로 사들인 땅을 비싸게 팔 궁리를 했다. 정재계에 로비를 했고 그들의 현금 투하는 효과를 냈다.
1966년 1월 착공해 1969년 12월에 완공한 제3 물강대교(옛 한남대교)는 본격적인 물남지역 개발시대를 여는 신호탄이었다. 홍수때 마다 침수다발 지역으로 천덕꾸러기 신세였던 그 땅들에, 다리는 물론 상하수도 시설 등 도시 인프라들을 국고를 쏟아붓듯 투자해 세련되게 건설하고, 흙땅은 아스팔트와 시멘트로 잘 포장 했다. 재벌들의 본사를 강제로 물남 지역으로 유치하고 심지어 학군을 높이려고 빨 학군이라 지칭될 학교들도 강제로 이주시켰다.
1970년 5000만 원 하던 아파트는,1990년대에는 5억하더니 급기야 2024년에는 50억을 호가하는 글로벌 도시로 변하였다. 그 부의 폭발적 세포분열의 최대 수혜는 똑재자들의 자손과 그들의 로비를 받은 부역자들과 주변인들에게 가장 먼저 돌아갔다. 물남지역의 부동산 폭등 소문을 들은 전국 원근 각처의 유지들은 집과 논밭을 팔아 순발력있게 물남 노른자위에 자리 잡았고, 6.25전쟁 전후 해외로 갔던 해외동포들중 재력가들도 속속 물남으로 집결했다.
이내, 이 도시를 건설하기 위해 동원된 육체노동자들과 상인들 그리고 물남의 가난한 원주민들이 혼재해, 빈부격차의 결이 명확하게 날 세워지는 도시로 변모해 갔다.
그들 똑똑하고 재물에 눈이 밝은, '똑재자' 아버지들은 그들의 아들, 딸들에게 교육했다.
"인생은 마케팅이고 프레임이며 해석이야. 거짓정보, 가짜뉴스를 잘 퍼뜨려야 해. 부동산을 드나드는 일반인들로부터 시작해야 효과가 있단다. 사람들은 거짓과 가짜에 잘 기만 당하고 환각에 잘 빠져들거든. 그걸 잘 활용해야 해. 할 수 있지?"
똑재자들의 후손들은 조부모와 부모님께 배운 방법을 응용했다. 그들은 마케팅을 퍼뜨렸다. 물강옆에 아파트는 홍수의 위험에 취약해 사실 좋은 물건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은 부동산업자들을 동원하고 유명 연예인들을 동원해서 소문을 퍼뜨렸다.
"성공하는 사람들의 꿈! 물강뷰와 함께 하세요"
어떤 이들은 유동인구가 많은 전철역을 마케팅한다. 전철역은 공해가 심한 지역으로 아이들이나 노약자들 건강에 좋지 않다. 게다가 외국에서는 석회굴과 지하철, 지하시설이 있는 근처에 싱크홀 현상이 일어난다는 학술보고가 있는데, 그런 정보를 잠재울 마케팅이 필요했다. 그래서 마케팅 콘셉트를 잡았다. 바로 '역세권'이다.
"출퇴근이 편해요. 주요 인프라가 있는 곳으로 생활이 좋습니다. 전철역 근처가 앞으로는 대세입니다. 역세권에 있는 집을 사야 해요"
그런데 그들은 안다. 땅 밑으로 전철이 지나가고 심지어 한 전철역에 전철이 2개, 3개 들어갈수록 싱크홀과 지반약화로 인해 위험이 커질 수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똑재자들의 후손과 부동산 투기꾼들은 의기 투합해서, 한술 더 떠 그냥 역세권보다 트리플역세권이 더 좋다고 대대적인 마케팅 홍보를 시작했다.
"트리플 역세권이 최고입니다. 다양한 지역으로의 출퇴근이 용이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이 지역의 아파트와 집들을 선호합니다"
그리곤 지반약화나 싱크홀 이슈는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진다.
똑재자들이 설계한 도시 물남시. 그 도시는 불의와 불법, 이권으로 얼룩져 돈에서 돈으로 부유하고 있었다. 신이 그 도시의 오래된 불의를 징벌하기로 한 듯이 기후온난화로 인한 해수면의 상승은 가속도가 붙더니 급기야 2070년 북극이 다 녹아버렸다.
한때 물남시 옆 동네인 잠씰의 롯떼월드따워는 부의 상징이었으나 물로 도시 대부분이 사라진 후론 롯떼월드따워도 폐쇄조치 후 흉물로 남았다. 건물도 오래된 데다가 수면에 저층이 오랫동안 잠겨서 건물 지반이 약화된 데다가, 기가 센 입주자들끼리 30년 넘는 법정분쟁으로 재건축 시기를 놓쳐 이젠 휴지조각이 되었다.
물남시의 많은 고층 건물이 그러하듯 건물 입구가 봉쇄된 건물은 엘리베이터로 움직일 수 없었다. 물에 전기가 노출되면 위험하기에 1층까지 물에 잠긴 모든 고층 건물은 엘리베이터를 사용할 수 없게 됐고 그 때문에 100억이던 아파트들은 1억이 되어도 안 팔린다. 50년 전 부동산 벼락부자를 외치던 물남시는 이젠 '부동사 벼락거지'가 속출하는 폐허도시가 되었다.
물남시에 살던 모든 사람들이 벼락거지가 된 것은 아니었다. 예나 지금이나 고급정보는 산다는 사람들끼리 사전에 통용되기 마련이다. 그들 중 정재계나 학계와 연이 닿은 사람들은 해수면 상승이 이슈가 되던 시절인 2024년부터, 한반도 동쪽의 고지대에 허름한 단독주택을 사서 전세를 놓기 시작했다. 해수면 상승이니 북극 빙하가 다 녹는다는 말은 도저히 믿을 수 없지만 깡원도 아파트는 물남의 5%도 안 되는 가격이면 살 수 있었던 시절이었다. 반신반의하며 대비책을 세워 놓은 것이다.
낌영감은 과거그 물남시의 부동산 갑부로 유명했던 사람이었다. 깡원도 고지대에 허름한 마당이 있는 단독주택을 거닐며 청명한 하늘을 쳐다보았다. 50년 전이었던 2024년 깡원도에 갔다 아내와 노후에 살려고 샀던 집이었다. 당시 60세였던 자신이 110세까지 살 줄은 몰랐고 대대손손 물려줄 수 있을 줄 알았던 수백억짜리 빌딩 수십 동과 물남 아파트수십 채가 물에 가라앉아 버릴 줄은 몰랐다.
인생이 허망했다. 아파트와 빌딩들을 걸신 들린듯사들이려고 열심히 정재계에 로비했던 일상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물강뷰니 역세권, 숲세권이니 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마케팅의 산물인지 알면서도 퍼뜨린 장본인으로서, 하늘의 징벌로 죄값을 치르는 것 같아 한탄이 나왔다.
그나마 한반도에 물이 잠기지 않는 도시들 조차 전철역 주변으로는 오랜 홍수로 지반이 습하고 약해져 싱크홀이 가속화 되었다. 그 주변에 소유했던 빌딩이나 아파트들도 휴지조각이 되었다.
전국적으로, 전철역은 붕괴된 지역이 너무도 많아, 전철역 주변은 웅덩이로 변해 모두 접근금지 팻말이 붙었다. 물남시는 도시 전체가 물에 가라앉았던 터라 간혹 붕괴된 전철역 주변으로 그 옛날 자판기 기기들이 처량하게 떠다는 모습을 보기도 한다. 흡사 전쟁을 방불했다.
낌영감은 생각했다. 다시 태어난다면 지구상빙하가 모두 녹아도 물에 잠기지 않을 곳, 거기에땅을 사서 집 짓고 기부하며 소박하게 살다 가리라고 말이다.죽어서 가져갈 것 하나 없는 인생, 뭣이 그리 중헌지도 모르고 살았던 세월에 회한이 한없이 밀려왔다.
낌영감은 노을이 가득한 오후 호상으로 눈을 감기 전 한 맺힌 유언을 남겼다. 100억짜리 빌딩들과 아파트 수십 채를 날린 회한이 쓰러져가는 눈가 옆으로 눈물이 되어 흘러내렸다.
"후손들아! 너희들 시대에도 필연적으로 똑재자들은 활보할 것이다. 모두가 매료되어 몰려갈 때, 한번 정도 질문을 해보아라. 그게 진정하늘의 뜻과 인간들에게정말 '진실'이 맞는가?라고 말이다."
해수면 60m 상승시 서울 포함 중부지방 시뮬레이션 지도 (출처: Flood Maps (firetree.net))
19세기 프랑스 문학예술의 흐름이 낭만주의가 주도하던 전반기에서 중반기로 접어들면서 서서히 사실주의의 주도로 변하게 된 이유 혹은 배경에 관해 기술하시오. 또 19세기 사실주의 문학의 주요 특징 및 경향에 관해 기술하고, 《마담 보바리》를 통해 드러나는 플로베르의 사실주의의 특징을 스탕달의 《적과 흑》과의 비교를 통해서 밝혀 보시오.
<답변 발췌>
19세기 프랑스 문학예술의 풍경은 마치 한 편의 드라마와 같습니다. 이 시기는 격변의 시대로,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변화가 문학과 예술의 흐름에 깊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낭만주의가 주도하던 19세기 전반기에서 중반기로 넘어오면서, 사실주의로의 이동은 단순히 문학적 스타일의 변화를 넘어선 시대적 요구와 반영이었습니다.
낭만주의에서 사실주의로의 전환은 여러 요인에 의해 촉진되었습니다.
첫째로, 산업혁명으로 인한 도시화와 사회 구조의 변화는 사람들에게 현실적인 문제에 더 많은 관심을 갖게 했습니다.
둘째로, 1848년 혁명을 포함한 여러 정치적 사건들은 사회적 불평등과 계급 갈등에 대한 인식을 높였습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문학가들은 사회적 현실을 더 정확하게 반영하고자 하는 욕구를 갖게 되었고, 이는 사실주의 문학의 발전으로 이어졌습니다.
사실주의 문학의 주요 특징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려는 노력에 있습니다. 사실주의 작가들은 일상적인 삶의 디테일을 세밀하게 묘사하고, 사회적 문제를 직시했습니다. 이들은 인간의 복잡한 심리를 탐구하고, 일반적인 사람들의 삶을 그들의 문학의 중심에 두었습니다. 이러한 경향은 특히 플로베르의 《마담 보바리》와 스탕달의 《적과 흑》에서 두드러집니다.
《마담 보바리》는 중산층 여성의 일탈과 좌절을 통해 당시 사회의 위선과 제한을 날카롭게 비판합니다. 플로베르는 사실주의적 기법을 사용하여 인물들의 내면 심리와 사회적 상황을 세밀하게 그려냅니다. 이 작품은 현실에 대한 집착과 이상과의 괴리를 통해 인간의 본성과 사회적 제약을 탐구합니다.
반면, 스탕달의 《적과 흑》은 젊은 남성 줄리앙 소렐의 야망과 사회적 상승을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스탕달은 줄리앙의 내면적 갈등과 외부 세계와의 충돌을 통해 당대 프랑스 사회의 계급 문제와 이중성을 드러냅니다. 스탕달 역시 사실주의적 기법을 사용하지만, 그의 접근은 인간의 야망과 사회적 동기에 더 중점을 둡니다.
《마담 보바리》와 《적과 흑》 사이의 비교를 통해, 우리는 19세기 사실주의 문학이 인간 심리의 복잡성과 사회적 현실의 다면성을 어떻게 포착했는지 볼 수 있습니다. 두 작품 모두 개인의 내면 세계와 사회적 조건 사이의 긴장을 탐구하며, 당시 문학이 당면한 현실과 이상 사이의 괴리를 어떻게 표현했는지 보여줍니다.
이러한 분석을 통해 우리는 19세기 프랑스 문학이 어떻게 낭만주의에서 사실주의로 전환되었는지, 그리고 이 변화가 당시의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맥락 속에서 어떠한 의미를 가지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실주의는 단지 문학적 형식의 변화를 넘어서, 당시 사람들의 삶과 사고방식에 깊은 영향을 미친 문화적 전환점이었습니다.
포동포동한 몸에 작은 키, 걸음걸이는 씨암탉 같았던 현진건은 살결이 희고 맑은 예쁘장한 미남이었다고 한다. 그는 1900년 경상북도 대구에서 우체국장을 지내던 현경운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비교적 유복한 편이었으며, 고향의 서당에서 한문을 배우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가 12세 되던 해인 1912년 일본에서 중학교를 다녔고, 1917년 동경에서 학교를 졸업하고, 이듬해 1918년에는 독립운동을 하던 형을 찾아 상해로 가서 호강대학 독일어과에 입학하기도 한다. 이 시절 그는 독일어 수업을 받으며 독일의 문학 작품을 우리말로 옮기는 일을 하게 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사촌 형 현정건을 만나 항일 의지를 키우게 된다. 현정건의 모습은 그의 소설 <적도>에 생생하게 나타나 있다. 그리고 영화 <밀정>에 나오는 연계순은 기생 출신인 의열단원 현계옥을 모델로 한 것인데 사촌 형 현정건의 연인이기도 하다.
실제 행동으로 애국 운동을 실천한 작가
1919년에 귀국한 현진건은 1920년 9월 《개벽》에 독일의 단편 <석북화>를 번역 발표하고, 같은 해 11월에 <희생화>를 창작 발표하였다. 현진건은 체호프의 작품을 좋아했고, 그에게 큰 영향을 받았다. 그래서 ‘한국의 체호프’라는 격찬을 받기도 하였다. 또한, 단편 소설뿐 아니라 장편 소설과 수필도 썼는데, 특히 <백두산기행>은 당대의 명문으로 꼽힌다. 한편, 현진건은 언론에도 관심을 가져 1920년 《조선일보》에 들어갔다가 퇴사하고 최남선이 경영하던 잡지사 등을 거쳐 《동아일보》에서 근무하였다. 《동아일보》 사회부장으로 재직하던 1936년 8월 9일 제11회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손기정이 1등을 하고, 남승룡이 3위를 하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는 신문에 손기정의 가슴에 붙은 일장기를 지운 사진을 실었다. 이 사건으로 《동아일보》는 무기 정간을 당한다. 현진건은 손기정 선수의 마라톤 우승과 관련된 일장기 말소 사건에 연루되어 1년간 옥고를 치른 다음 언론계를 떠나게 된다.
사실주의의 기틀을 마련한 작가
1937년 《동아일보》를 사직한 현진건은 소설 창작에 전념하였으며, 빈궁 속에서도 친일 문학에 가담하지 않았다. 그는 생계를 유지하려고 양계 사업과 미두 사업을 벌였으나 모두 실패하고 곤궁한 생활을 하게 된다. 그때까지 남긴 작품이 중 단편 20편과 장편 4편 그리고 번역 소설 8편이다. 빈곤에 시달리던 그는 1943년, 딸을 월탄 박종화의 아들과 결혼시키고 두 달 후인 1943년 음력 3월 21일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난다. 그는 김동인, 염상섭과 함께 근대 문학 초기에 단편 소설 양식을 개척하고 사실주의 문학의 기틀을 마련한 작가로 평가받았다.
ㅡ <교과서가 사랑한 작가 110> 중 ㅡ
현진건 집터는 지하철 3호선 3번 출구로 나와 1020, 7022, 7212번 버스를 타고 부암동 주민센터 앞에 하차, 무계원이 있는 골목으로 들어가면 표석을 만날 수 있다.
현진건[ 玄鎭健 ]
출생 - 사망 : 1900년 8월 9일 ~ 1943년 4월 25이
출생지 : 국내 대구광역시
데뷔 : 1920. 개벽에 단편 「희생화」를 발표
이명 : (호) 빙허(憑虛)
가족관계 : (형) 현정건(玄鼎健)
현진건의 소설은 체험소설, 현실고발소설, 역사소설 3가지 창작과정을 보여준다.
호는 빙허(憑虛). 1900년 8월 9일(음력) 대구 출생. 서당에서 한문을 수학하다가, 1912년 일본의 세이조중학(成城中學)에 입학하여 1917년에 졸업하였다.
이에 앞서 1915년에 이상화‧백기만‧이상백 등과 함께 동인지 『거화(巨火)』를 발간했다. 1918년 상해에 있는 둘째 형 정건(鼎健)을 찾아가 호강대학에서 수학하였다. 1921년 조선일보사에 입사한 것을 계기로 『동명』, 『시대일보』를 거쳐, 1936년 일장기말소사건으로 1년간 투옥될 때까지 『동아일보』 기자로 활동하였다. 1943년 4월 25일 사망하였다. 1920년 『개벽』에 단편 「희생화」를 발표하여 혹평을 들었으나, 이듬해 자전적 소설 「빈처」를 발표함으로써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같은 해 『백조』 동인으로 참가하여 활동하였다. 대표작으로는 단편 「빈처」(1921), 「술 권하는 사회」(1921), 「타락자」(1922), 「할머니의 죽음」(1923), 「운수좋은 날」(1924), 「불」(1925), 「B사감과 러브레타」(1925), 「사립정신병원장」(1926), 「고향」(1926)과 장편 「적도」(1933~1934), 「무영탑」(1938~1939) 등을 꼽을 수 있다. 『타락자』(1922), 『지새는 안개』(1925), 『조선의 얼골』(1926), 『현진건 단편선』(1941) 등의 단편집과 『적도』(1939), 『무영탑』 등 장편소설을 출간했다.
이외에 『악마와 가치』(1924), 『첫날 밤』(1925) 등의 번역집과 『단군성적순례(檀君聖跡巡禮)』(1948)라는 기행문이 출간되었다. 현진건의 소설은 창작과정으로 보아 3단계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첫 단계는 1920년대 초 체험소설이 중심이 되었던 시기이다. 「빈처」, 「술 권하는 사회」, 「타락자」 등이 이에 해당하는데, 1인칭소설로서 작가의 자전적 요소가 많은 작품들이다. 둘째 단계는 「할머니의 죽음」, 「운수좋은 날」, 「불」, 「사립정신병원장」, 「고향」 등의 현실고발소설이 씌어졌던 시기이다. 대체로 3인칭 소설로 되어 있고, 완전한 허구 속의 인물들로 이루어져 있다.
당시의 현실을 아이러니적 수법에 의하여 고발한 소설들이다. 셋째 단계는 역사소설을 집필한 시기이다. 「적도」, 「무영탑」, 「흑치상지」 등의 역사장편소설을 통하여 민족혼을 표현하려고 시도하였다.
현진건의 집안인 연주 현씨는 역관(譯官) 등의 잡과(雜科) 출신을 많이 배출한 중인(中人) 집안에 해당한다. 현진건의 6대조로 왜역(倭譯) 즉 일본어 통역관이었던 태형(泰衡)부터 한역(漢譯) 즉 중국어 통역관이었던 5대조 상복(商福), 몽역(蒙譯) 즉 몽골어 통역관이었던 시석(時錫)에 이르기까지 모두 역관으로서 활약하였으며(각자의 처가도 또한 역관 집안이었다) 증조부 경민(敬敏)도 왜역으로 동래(東萊)에서 오랫동안 머물렀다. 황현의 《매천야록》에는 현진건의 숙부인 현양운이 조민회의 후임으로 주왜공사(住倭公使)가 된 사실을 기록하면서, 영운의 가계를 그의 할아버지(즉 현진건의 증조할아버지)가 왜역으로 오랫동안 동래에 머무르다가 현지 기생과의 사이에서 현양운의 아버지를 얻었고, 현양운 자신도 그 아버지가 첩에게서 본 자식이었다고 적고 있다.
현진건의 할아버지 학표(學杓)는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내장원경(內藏院卿)직을 지냈고, 다시 경운(炅運)·철운(轍運)·영운(映運)·양운(暘運)·붕운(鵬運)의 다섯 아들을 두었다. 그 중 경운이 바로 현진건의 아버지이며, 봉호가 정3품 통정대부(通政大夫)까지 올라 의정부외부의 통신원 국장과 전보사장을 지냈다. 그의 집안은 계몽사상가이자 독립운동가였으나 후에 친일파로 변절하게 되는 윤치호, 독립운동가 겸 정치인으로 내무장관, 서울시장을 지낸 윤치영, 4대 대통령 윤보선 집안과 이중으로 혼반관계를 형성하였다.
생애
출생
광무 4년(서기1900년) 대구부(大邱府)에서 현경운(玄擎運)과 어머니 완산 이씨(完山 李氏) 정효(貞孝)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곳은 당시 대구부 명치정(明治町) 2정목(町目), 지금의 대구광역시 중구 계산동 2가의 속칭 '뽕나무골'이라 불리던 마을이었다. 어머니는 1910년에 일찍 세상을 떠났다. 그의 위로는 홍건(鴻健), 석건(奭健), 정건(鼎健)의 세 형이 있었는데, 맏형 홍건은 대한 제국의 육군 참령과 외국어학교(外國語學校) 부교관(副敎官)을 지냈고 칭경시예식사무위원(稱慶時禮式事務委員)을 잠시 맡기도 했다. 석건은 일본 메이지 대학(明治大學) 법학과를 졸업하고 변호사로 근무했으며, 정건은 훗날 중국으로 건너가 독립운동에 나섰다.
유년기와 수학
1906년부터 마을에서 한학(漢學)을 배우던 그는 1908년, 당숙이자 양아버지인 현보운(玄普運)이 세운 대구노동학교[13]에 들어가 신학문을 배우기 시작했다.
국권 피탈 뒤인 1915년, 15세의 나이로 당시 경주 향리의 부호인 진사 이길우(李吉宇)의 딸 순득(順得)과 혼인하여 대구부 수정(竪町) 255번지(지금의 대구광역시 중구 인교동)에 있던 처가에서 신혼생활을 하였다. 그 해 11월에 보성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가 2학년 재학 중인 이듬해 7월에 자퇴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세이소쿠 영어학교(正則英語學敎)에 입학하였다.
동인지 발간
1917년 다시 귀국하였는데, 이때 대구에서 백기만(白基萬) · 이상화(李相和) 등과 습작 동인지 『거화(炬火)』를 발간하였다. 이것이 그가 처음으로 시작한 '문학'이었다(다만 본격적인 동인지는 아니고 작문지 정도의 수준이었다고[14]). 4월에 현진건은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의 5년제 세이조 중학교(成城中學校)에 3학년으로 편입하였다. 1918년 3월에 다시 귀국하였는데[15], 얼마간 대구에 머물다가 집안 몰래 형 정건이 있던 중국상하이(上海)로 건너 가서 후장 대학(扈江大學) 독일어 전문부에 입학한다.[16] 조선에서 일어난 3.1 운동의 여파가 상하이에까지 커져 상하이에서도 만세운동이 벌어지고,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가 수립되던 해인 1919년 다시 귀국하여, 당시 육군 공병 영관을 지낸 당숙 현보운(玄普運)의 양자로 들어가게 되면서 서울로 상경, 지금의 종로구 관훈동 52번지에서 살았는데, 현보운은 1919년에 사망하고 그가 호주가 되었다. 12월에 첫딸 경숙(慶淑)이 태어났으나 이듬해에 죽고 만다.
개벽지 동인 활동
1920년, 현진건은 양아버지 현보운의 동생 희운(僖運)의 소개로 11월, 문예지 『개벽(開闢)』에 「희생화(犧牲花)」를 개재하면서 처음으로 문단에 이름을 올리는데, 이보다 앞서 현진건은 『개벽』에 번역소설 「행복」(아르치바세프 원작)과 「석죽화」(쿠르트 뮌체르 원작)를 발표하고 있었다. 그의 자전적 성격도 동시에 가진 것으로 알려진 「희생화」는, 그러나 당시 문예평론가 황석우(黃錫禹)로부터 "소설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하등 예술의 형식을 갖추지 못한 무명 산문"[17]이라는 혹평을 받은 작품이었다.
처음 「희생화」를 발표하던 때부터 현진건은 이미 '빙허'라는 아호를 스스로 지어 쓰고 있었는데, 대체로 그가 혼인을 올리던 1915년에서 학교를 자퇴하고 일본으로 건너간 1916년 사이부터 쓰기 시작한 것으로 자신은 회고하고 있다. 다소 허무주의적 표현이 없지 않지만 '허공(虛空)에 의지한다'는 이 말이 자신의 심경을 가장 적절하게 표현한 말이었고, 고대 중국 송(宋)의 문인 소식(蘇軾)의 《적벽부(赤壁賦)》의 구절 가운데 "넓기도 하구나, 허공에 의지하여 바람을 타고서(浩浩乎! 憑虛御風而)..."란 구절에서 느낀 바가 있어 그대로 '빙허'를 자신의 아호로 정하게 되었다고 한다.[18]1920년 11월에 현진건은 조선일보사에 입사하였다.
1921년 1월에 현진건은 다시 『개벽』에 단편소설 「빈처」를 발표하였는데, 이것이 문단의 호평을 받아[19] 11월에는 다시 『개벽』에 단편 「술 권하는 사회」를 발표하였고, 1922년1월부터 4월까지 『개벽』에 중편소설 「타락자」를 발표하였다. 작품 술 권하는 사회에서 그는 사회의 부조리함을 알면서도 저항하지 못하는 나약한 지식인상을 풍자하였다.
이 전해부터 휘문고등학교 출신의 젊은 문인인 박종화(朴鍾和) · 나빈(羅彬) · 홍사용(洪思容) · 이상화 · 박영희(朴英熙) 등과 함께 잡지 『백조(白潮)』의 동인이 되어, 『개벽』과 『백조』 두 잡지 사이를 오가며 『백조』 1호지에 수필 「영춘류(迎春柳)」, 2호지에 단편소설 「유린」을 발표하고, 또 기행문 「몽롱한 기억」을 기고하면서, 7월에 『개벽』에 다시 번안소설 「고향」(치리코프 원작)과 「가을의 하룻밤」(고르키 원작)을 각각 발표하였다.
동명사에서 동아일보까지
동명사 입사
1922년 9월에 현진건은 조선일보사를 그만두고[20]최남선(崔南善)이 만든 동명사(東明社)에 들어간다. 그 다소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창간 당시부터 민족적 색채가 농후했고, 역사지향적 성격을 추구하며 「조선통속역사강화」(최남선 저) · 「조선과거의 혁명운동」(문일평 저) 등 유독 국학(國學) 관련 논문이 자주 연재되었던 「동명」에서의 경험은 훗날 「고도순례 경주」, 「단군성적 순례」 등의 민족의식이 농후한 작품을 쓰는데 큰 영향을 끼쳤다고 할 수 있다.[21] 그리고 11월 13일에 그의 첫 창작집 『타락자』가 조선도서주식회사에서 발간된다.
1923년 2월부터 10월까지 현진건은 『개벽』에 중편 「지새는 안개」를 발표하고, 9월에는 그의 동인지 『백조』에 단편 「할머니의 죽음」을 발표하였다. 「지새는 안개」는 당시의 문인 염상섭(廉想攝)이 "살아있는 춘화도"라 평하고 있을 정도로 정밀하고 세련된 묘사를 보이고 있는 것으로 평가되었다. 또한 최남선이 주재한 동인지 『동명(東明)』의 편집동인으로 참여하여, 번안소설 「나들이」를 기고하는 한편으로 1924년 3월 31일에 창간된 「시대일보」(동명사의 후신)에 입사하였다(이때 그의 부인은 병치레로 대구의 친정으로 가 있었고 현진건만 홀로 서울에 남아 있었다[22]). 1924년 1월에는 단편 「까막잡기」를 『개벽』 , 2월에 「그립은 흘긴 눈」을 잡지 『폐허이후』에서 발표하고, 이어 다시 6월에 단편 「운수 좋은 날」을 『개벽』에 발표한다. 또한 4월 2일부터 5일까지 「시대일보」 지면에 소설 「발(簾)」을 연재했다.
작가로서의 일인일당(一人一黨)주의
1925년 1월, 현진건은 『개벽』에 단편 「불」을 발표하였다. 이때 그는 「시대일보」의 사회부장이 되었으나 「시대일보」가 폐간되면서 동아일보사로 전직하여야 했다. 3월 1일자 『개벽』 제57호에는 이때의 현진건의 근황에 대해 "근래에 빙허(憑虛) 군은 신문사 일도 뜻대로 되지 않으므로 더 많은 독서와 연구에 노력하겠다 한다. 늘 군은 조선의 평론계가 아무 보잘 것 없는 것을 매우 분개해서 앞으로는 논문도 쓰실 작정이라고. 고마운 일이며 즐거운 일이며 마음히 든든해지는 일이다."라고 짤막하게 소개하고 있다.[23] 그리고 박문서관에서 그의 중편 「지새는 안개」가 단행본으로 간행되었다. 또한 2월에 단편 「B사감과 러브레터」를 『조선문단』에 발표하고[24], 4월과 5월에는 수필 「목도리의 복면」과 「설 때의 유쾌와 낳을 때의 고통」을 각각 기고하였다. 7월에는 「조선문단과 나」라는 기고에서 작가는 삼삼오오 짝을 짓고 당을 나누어 서로 갈라서서 싸우는 존재가 아니라 작가 하나하나가 독립적인 개체라는 "일인일당(一人一黨)주의'라는 용어를 써가며, 계급주의 문학을 옹호하는 카프의 주장에 맞서 내용적 가치와 계급적 가치란 별개임을 주장하였다. 또한 『조선문단』에서 만든 조선문단합평회의 정기회원으로서, 10월에는 『조선문단』 신추문예(新秋文藝)에 응모한 작품들의 심사를 맡아 처음으로 평론을 싣기도 했다.
1926년 1월에 현진건은 『개벽』에 평론 「조선혼(朝鮮魂)과 현대정신의 파악」을 기고하였다. 이 평론은 오늘날 현진건이 가진 '민족주의' 성향을 강하게 드러낸 것으로 평가받는다.[25] 2월에는 『조선문단』에 수필 「무명 영웅」을 기고하고, 11월에는 『개벽』에 단편 「사립정신병원장」을 기고하였다. 또한 이 해 3월에 단편집 『조선의 얼골』이 출판사 글벗집에서 간행되었다.
1927년 1월부터 3월까지 『조선문단』에 중편 「해 뜨는 지평선」을 기고하였다. 같은 해 1월 2일자 「동아일보」는 현진건을 "산뜻한 표현의 미를 가진 단편작가"로, "표현에 노력을 빼앗긴 반면에 그 내용적 가치가 너무도 희박하다"고 하면서도 단편집 『조선의 얼굴』에서 보여준 그의 새로운 모습을 향한 노력을 높이 사면서, "그의 자연주의는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고 있으며 그의 제재 방면도 분명히 향토로, 민중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긍정적인 평가로 끝맺고 있다. 1928년에는 드디어 「동아일보」 입사 3년만에 사회부장이 되었다(~1936년). 사회부장 시절의 현진건에 대해 당시 "대장을 놓고 제목을 붙이는데, 편집 칠팔명이 모여선 중에 붉은 잉크를 붓에 덤뻑 찍기만 하면 민각을 누연치 않고 진주 같은 제목명을 이곳저곳에 낙필 성장으로 비치듯 떨어져서, 선후배들로 하여금 그 귀재에 혀를 둘러 감탄케 할 지경"이라는 명성이 나돌았다고 한다.[26] 그러나 이 해 1월, 상하이에서 한인청년회를 조직하고 독립운동을 전개하던 형 현정건이 체포되어 본국으로 이송되어 복역하였다.[27]
1929년 7월 8일부터 12일까지 신라(新羅)의 고도였던 경주(慶州)를 답사하고, 그 기행문 「고도순례 경주」를 7월 18일부터 8월 19일까지 「동아일보」에 연재하였다(이 고도기행은 당초 경주뿐 아니라 공주(公州)와 부여(扶餘), 평양(平壤)까지도 계획에 넣고 있었던 것 같지만 경주 이후로 고도기행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또한 『문예공론』 7월호에 단편 「신문지와 철창」을 기고하였으며, 12월에는 『신소설』에 「정조와 약가(藥價)」를 발표하였다.
비극의 30년대
형 현정건의 죽음과 복역
1930년 2월과 12월에는 장편 「웃는 포사」를 『신소설』과 『해방』에 연재하다 4회만에 중단하고, 1931년 10월에 단편 「서투른 도적」을 『삼천리』에, 11월에는 『신동아』에 「연애의 청산」을 발표하였다. 1932년 7월 8일부터 23일까지 단군(檀君)의 전승이 남아있는 안주(安州), 묘향산(妙香山), 평양, 황해도(黃海島), 강화도(江華島) 등지를 답사하고 그 기행문 「단군 성적(聖跡) 순례」를 7월 29일부터 『동아일보』에 연재하였다(~11.9). 그러나 이 해, 3년의 옥살이를 마치고 6월 10일에 출소한 형 현정건은 현진건이 『동아일보』지면에 장편소설 「적도(赤道)」를 연재하기 시작한지 열흘 뒤인 12월 30일에 옥살이의 후유증으로 숨을 거두고, 이듬해 형수(현정건의 부인) 윤덕경(尹德卿)도 자결하는 등 현진건에게 개인사적 비극이 잇따랐다(「적도」는 1934년 6월 17일에 완결되었다).
일장기 말소사건과 동아일보사 사직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일본 대표로 출전해 1등을 차지한 조선인 선수 손기정(孫基禎)의 유니폼에 그려진 일장기를 지워버린 채 신문에 실은 사건으로(일장기 말소 사건) 현진건은 기소되어 1년간 복역해야 했으며, 이듬해 출옥하면서 동아일보사를 사직하고 관훈동에서 서대문구 부암동 325-5번지로 이사하여 그곳에서 땅을 빌려 양계 사업을 시작한 한편, 1938년 7월 20일부터 다시 「동아일보」지면에 장편역사소설 「무영탑(無影塔)」을 연재한다.(~ 1939년 2월 7일) 1939년7월에 「동아일보」 학예부장으로 복직되었으며, 같은 해 10월 25일부터 「동아일보」에 역사소설 「흑치상지(黑齒常之)」 연재를 시작하는데, 이 와중에 문예지 「문장」과 가진 인터뷰에서 현진건은 당시의 소설들에 대해서 "(자신이 처음 글을 쓰던 때에 비해) 문장이라든가 소설 만드는 기술은 가히 괄목할 만큼 진보.... 그러나 구상의 도약이 드뭅니다"라며 "동경(東京) 문단의 말기적인 신변잡기 같은 것에 안주하려는 경향"에 대해 경계하고, 또한 현재가 여러 면에서 세계적인 문학의 빈곤시대가 아닌가 싶다며 "문은 실상 기(氣)이며 기가 없으면 아무리 진주같다 해도 곧 사회"라는 견해를 피력했다. 그리고 12월에는 같은 잡지에 또 한 번 「역사소설의 제(諸)문제」라는 글을 기고하여 역사소설이라는 것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였다.
"나는 역사소설이 작품으로 나타나기까지 작자의 태도를 대별하여 두 가지 경로를 밟는다고 생각합니다.
그 하나는 작자가 허심탄회로 역사를 탐독완미하다가 우연히 심금을 울리는 사실을 발견하고 작품을 빚어내는 경우입니다. 이런 경우는 사실 자체가 주제를 제공하고 작자의 감회를 자아내는 것이니 순수한 역사소설이 대개는 이 경로를 밟지 않는가 생각합니다. 예하면 스코트의 제(諸) 작품 아나톨 프랑스의 「신들은 주린다」라든가 우리 문단에도 춘원의 「단종애사」, 상허의 「황진이」 같은 작품이 그 좋은 예라고 하겠습니다.
또 하나는 작자가 주제는 벌써 작정이 되었으나 현대에 취재하기도 거북한 점이 있다든지 또는 현대로는 그 주제를 살려낼 진실성을 다칠 염려가 있다든지 하는 경우에 그 주제에 적당한 사실을 찾아 대어 얽어놓은 경우입니다. 쉔키비치의 「쿠오 바디스」, 아나톨 프랑스의 「타이스」,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 춘원의 「이차돈의 사(死)」 같은 작품은 다 이런 경로를 밟은 작품이라고 봅니다.
제1의 경우라고 해서 대작(大作) 신품(神品)이 없는 것이 아니지만 제2의 경우에야말로 웅편(雄編) 걸저(傑著)가 더 많지 않은가 합니다. 그가 작품마다 그 구별이 뚜렷한 것이니 아니오 서로 혼합되고 착종하는 경우도 적지 않겠지요."
사실을 위한 소설이 아니오 소설을 위한 사실인 이상 그 창작가는 제2의 경우를 더욱 중시하여야 될 줄 믿습니다. 이미 주제를 작정한 다음에 그 소재를 취하는데 현재와 과거를 가릴 필요가 없는 줄 압니다. 작품상에는 현재라고 더 현실적이오 과거라고 비현실적이란 관념은 도무지 성립이 되지 않는 줄 압니다. 더구나 제2의 경우에는 그 과거가 현재에 가지지 못한, 구하지 못한 진실성을 띄었기 때문에 더 현실적이라고 믿습니다. 현재의 사실에서 취재한 것보담 더 맥이 뛰고 피가 흐르는 현실감을 줄 수 있다고 믿습니다. 주어야 될 줄 믿습니다. 이렇게만 된다면 비현실적이라는 등 도피적이라는 둥 하는 비난의 화살은 저절로 그 과녁을 잃을 것입니다.
그가 『동아일보』에 연재하던 「흑치상지」는 총독부의 검열과 탄압으로 불과 58회만에 강제 중단되었고, 이어 그의 작품집인 「조선의 얼골」까지 총독부에 의해 '금서'로 지정되어 판매가 금지된다.
말년
원고료에 양계만으로는 생계를 해결할 수 없었던 현진건은 돈을 벌 수 있다는 친구의 유혹에 넘어가(방인근은 "박씨 성을 가진 친구의 꼬임에" 넘어갔다고 했다) 기미(期米) 사업을 시작하지만, 1940년에 당시 명동에 있던 증권회사에 미두를 투자했다가 그것이 모두 실패하면서[31] 양계장이나 다른 재산, 부암동에 있던 집도 처분하고 신설동 고려대학교 정문 앞의 조그만 초가집(지금의 동대문구제기동 137번지 61호)으로 이사해야 했다. 이 실패로 현진건은 더욱 술에 빠져 살게 되었고 결국 '혈압' 때문에 쓰러져 눕게 되었다(이 해에 현진건의 단편소설과 역사소설 「무영탑」이 박문서관에서 「현진건 단편집」과 「무영탑」으로 발간되었다). 현진건은 『동아일보』 기자였던 양재하가 만든 친일잡지인 『춘추』 4월호에 소설 「선화공주」를 연재하지만 9월호에서 중단하였다(미완).
1943년에 지병이었던 폐결핵과 장결핵으로 경성부 제기동의 자택에서 숨을 거둔다. 향년 44세.(공교롭게도 현진건의 동향이자 문우였던 시인 이상화도 같은 날 위암으로 대구에서 별세하였다.
사후
현진건이 사망한 뒤에 그의 친아버지 현경운도 대구에서 사망하였고, 부인 이순득도 대구의 친정에서 사망하였다.
숙부 영운(映運)은 아내 분남(粉男)이 이토 히로부미의 양녀가 된 것을 계기로 크게 출세하여, 장관급인 대한 제국 군령부 참장, 주일특명전권공사, 원수부 검사총장, 참모부 제1국장, 농상공부 협판 등의 고위직을 거친 구한말의 전형적인 친일관료였다. 이러한 그의 벼락출세가 영운의 형제들의 관직 진출에 음으로 양으로 크게 도움을 주었을 것으로 보인다. 부친 경운은 지위가 정3품 통정대부까지 올랐고 의정부 외부의 통신원 국장과 전보사장을 거쳐 1895년 대구부 전보사의 주사로 취임하기도 했다.[32] 숙부 철운은 안동관찰부 주사 겸 용궁군수를 지냈다. 숙부 양운은 관립영어학교 출신으로 궁내부 예식원주사에 태복시 기사 등을 지내고 원산과 동래에서 영어교사로 일했으며 대한체육회 창설 멤버로 알려져 있다.
숙부 붕운은 태복시 주사를 지냈다. 부친 경운의 첫 부인이자 현진건의 친어머니인 완산 이씨 정효(貞孝)는 진건을 비롯한 네 명의 아들을 낳은 뒤 막내 진건의 나이 열 살 때인 1910년 6월 13일에 죽고, 경운은 정선(旌善) 전씨를 후처로 맞아들여 또 한 명의 아들을 두었다. 진건의 큰형 홍건(鴻健)은 러시아 사관학교 출신으로 대한 제국의 육군 참령을 지냈다. 한때 러시아 대사관에서 통역을 맡기도 했으며, 《각사등록》과 《승정원일기》 등의 문헌에 따르면 광무 6년(1902년)에 외국어학교(外國語學校) 부교관(副敎官)과[33] 칭경시(稱慶寺)의 예식사무위원(禮式事務委員)을 잠시 맡기도 했다[34] 말년의 행적은 잘 알려지지 않았으며 미(美)·소(蘇) 공동위원회 시절에 납북되었다는 설도 있다.[35] 둘째 형 석건(奭健)은 일본 메이지 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고 대구에서 변호사로 근무했으며, 아우 정건이 독립운동 혐의로 체포되어 재판을 받을 때 변호를 맡기도 했다. 셋째 형 정건(鼎健)은 사회주의 독립운동가로 유명하다.
이들 형제는 현진건이 5촌 당숙 현보운(1875년 - 1919년)의 양자로 입양되어 들어간 뒤 법적으로는 친형제에서 6촌 형제로 바뀌었다. 관립 일어학교 출신의 보운은 1896년) 8월 3일에 외국어학교의 교관(敎官)이 되었고, 1899년에는 궁내부 번역관, 1900년 12월 24일에는 예식원 참리관으로 임명되어 봉직하다가 러일전쟁이 일어난 1903년 11월 11일에 주일공사관 이등참서관이 되었고, 1904년 일본 보병대 수원(隨員)으로 일본으로부터 즈이호오 4등 훈장을 받기도 했다. 1905년에는 군부 군무국 포병과로 옮겨 정위가 되었다.
장인은 이길우(李吉雨)로 진사로 당시 향리에서 부호였다고 한다.
두 살 연상의 아내 이순득에게서 얻은 두 딸 경숙(卿淑)과 애경(愛卿)은 각각 어린 나이에 죽고, 셋째 딸 화수(和壽)는 그의 문우 박종화의 장남 돈수(敦洙)에게 시집가서 1남 4녀를 낳았다. 고려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인 박동건은 바로 화수의 아들이다.
현진건은 현홍건, 현석견, 현정건의 동생이다. 4형제의 아버지 현경운은 외부(현 외교부) 통신원 국장을 거쳐 대구전보사 사장을 역임했다. 현경운은 4형제 모두를 러시아, 중국, 일본 등지에 유학시켰다. 1910년대에 아들 넷을 모두 외국 유학을 보냈으니 그만하면 상류층 집안이었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1921년 「빈처」가 발표된 이래 지금까지 100년이 넘도록 현진건의 작품에는 ‘자전적 소설’이라는 규정이 별명처럼 따라다니고 있다. ‘자전적 소설’이라는 개념은 현진건이 자신의 실제 삶을 소설화했다는 뜻이다. 현진건은 19세 이래 서울에 거주했는데 그 당시 이미 집에 전기와 수도가 들어왔고, 가정부까지 있었다. 그는 대단한 와가의 주인이었고, 처가는 대구에서 손가락에 꼽히는 거부였다. 본인은 현직 조선일보 또는 동아일보 기자에다 문단의 스타였다. 그런데 어떻게 ‘빈처’의 가난한 작가 지망생 부부와 현진건 부부가 동일시될 수 있나?
이 책은 100년 동안 현진건에 대해 잘못 분석한 평가들을 바로잡기 위해 쓰였다. 그릇 분류된 현진건 소설의 3단계론, 역시 그릇 해석된 민족주의 경향 작품 집필 시기 등을 사실대로 바로잡는 데 집필과 발간의 목적을 두었다. 게다가 한국 사회는 일장기 말소 의거를 일으켜 투옥과 고문을 당한 국가 인정 독립유공자 현진건을 너무나 푸대접하고 있다. 친일파를 기리는 문학관도 한둘이 아닌데 현진건문학관은 없다. 생가도 고택도 남아 있거나 복원되어 있지 않고, 심지어 무덤조차 없다. 서울 부암동 고택터 앞과 대구 두류공원 문학비에는 현진건이 일장기말소의거 관련 독립유공자라는 역사적 사실에 대해 일언반구 언급이 없다. 이 책이 쓰인 데에는 그런 잘못을 지적하고, 현진건을 제대로 현창하자는 결의를 다지려는 뜻도 있다.
책 속으로
? 장덕순은 ‘한국문학사’에서 현진건을 “한국의 모파상”이라고 했다. 김윤식과 김현은 공저 ‘한국문학사’에서 “한국 단편소설의 아버지”라고 했다. 김우종은 ‘한국현대소설사’에서 “한국 근대소설의 개척자”라 했다. 조연현은 ‘한국현대소설사’에서 “한국 근대 사실주의 문학의 선구자”라 했다. 이재선은 ‘한국현대소설사’에서 “근대적 사실주의 문학의 머릿돌을 놓은 작가”라 했다. 뿐만 아니라 현진건은 국가가 인정하는 독립유공자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진건은 문학관고, 생가도 고택도 심지어 무덤도 남아 있지 않다. 우리의 정신사가 의심되는 대목이다. 현진건을 올바르게 알고, 제대로 기리는 현창이 필요하다. 이 책이 그 과제를 이루어내는 데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 본문 중에서)
출판사 리뷰
2021년은 ‘빈처’ 발표 100주년이 되는 기념비적 연도입니다. 하지만 ‘한국 단편소설의 아버지’라는 평판을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진건을 추모해 진행된 국가 혹은 지방자치단체 주도 기림 행사는 없었습니다. 이를 너무나 안타깝게 생각한 이 책의 저자는 현진건 타계일인 4월 23일 추모 문학제를 시행했고, 8월 13일에는 일장기 말소 의거 세미나도 열었습니다. 그리고 현진건을 주인공으로 한 장편소설 ‘일장기를 지워라 1, 2’와 현진건 단편들을 2021년 버전으로 재창작한 연작 장편 ‘조선의 얼골 한국의 얼굴 1, 2’, 그리고 현진건 평전 겸 소설세계 해설서 ‘현진건 100년의 오해’를 발간했습니다. 3종 5권의 책이 밑거름이 되어 현진건 선생을 제대로 현창하는 사회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빈처(貧妻)
작품해설
1921년 1월 『개벽』 7호에 발표된 현진건의 단편소설. 희생화(犧牲花)」 이후 두 번째 작품이지만 실질적인 문단 등단작이다.
처녀작 「희생화」가 있으나 현진건은 이 소설로 그의 소설가로서의 위치를 확고히 하였다. 작가수업을 하고 있는 가난한 청년의 이야기로서 1인칭소설이다. ‘나’는 언젠가는 훌륭한 문사가 되리라는 희망을 가지고, 오로지 독서와 습작에 전념하고 있는 청년이다. 따라서 아무 벌이도 없이 아내가 시집올 때 가지고 온 옷가지를 전당 잡혀서 근근히 생계를 이어 가고 있는 형편이다.
가까운 친척인 은행원 T는 나의 집에 자주 내왕하는 편인데, 그의 아내가 양산을 샀다면서 들렀다. 나의 아내는 부러워하다가 그가 가고 난 뒤 “당신도 살 도리를 좀 하세요”라고 말한다. 이 말에 속이 상한 나는 아내를 예술가의 처로서 자격이 없다고 나무란다. 장인의 생일이라는 통지가 와서 부부가 같이 나섰지만, 부잣집 처가에 온 사람들이 모두 나를 비웃는 것 같아서 술에 취해서 집에 돌아온다. 처형은 돈은 많지만, 남편이 불성실하여 내외의 불화가 심했다.
그에 비하여 가난은 하지만 화합하는 우리 부부가 행복하다고 자위한다. 그러나 나는 언젠가는 출세를 해서 물질로도 아내에게 잘 해주고 싶은 생각이 내심 간절하다. 이 작품은 현진건의 자전적 요소가 강한 소설이다. 그러나 주인공 ‘나’ 뒤에는 비판적인 안목을 지닌 작가 현진건이 도사리고 있다. 이 사회에서 살아가려면 물질생활을 절대로 도외시할 수 없다는 사실, 바로 그 생활에 얽매이다 보면 결코 훌륭한 예술인이 될 수 없으며, 예술에 전념하는 사람에게도 나의 아내와 같이 생활인이 뒷받침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 등 이 소설은 생활인과 예술인과의 갈등을 그려나갔다는 점에서 특징적이다.
줄거리
아내가 옷장을 열고는 모보단 저고리를 찾다가 눈에 띄지 않는지
"그것이 어째 없을까?" 하고 망연자실한다.
'나'는 책상머리에 앉아 책장을 뒤적이며 그 말뜻을 되새겨본다.
이태 동안 돈 한푼도 벌지 못했기에 가구 집기며 옷들은 전당포나 고물상에 맡겨 끼니를 끓여왔다. 변변한 옷가지로 하나 남은 모본단 저고리도 아침거리를 장만하기 위해 찾았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그건 이미 전당포에 잡혔던 걸 아내는 잊고 있었던 것이다.
'나'의 생계가 이 지경이 되었으므로 집안 대소가와는 발을 끊고 살아왔다. 문학가가 되어보겠다고 책상 앞에 붙어사는 꼴을 친척들이 아니꼽게 생각했던 까닭이다.
그런 참에, 친척이 되는 '나'와 동년배의 T가 찾아왔다. 그만은 성격이 활달한데다 공손한 몸가짐으로 매사에 성실한 위인이어서 '나'의 집과 자주 교류한다.
'나'와 그를 두고 친척들은 곧잘 비교해서 말했다.
"T는 돈을 알고 위인이 진실해서 돈푼이나 모일 것이야! 그러나 K('나')는 아무짝에도 못쓸 놈이야. 그 잘난 언문 섞어서 무어라고 끼적거려놓고 제 주제에 무슨 조선에 유명한 문학가가 된다니! 시러베아들놈!"
그는 자기 처의 양산을 하나 샀다고 구경을 시킨다. 아내는 선망하는 빛이 역력했다. 그가 돌아간 뒤, 아내가
"당신도 살 도리를 좀 하세요"라고 어렵게 입을 떼자 '나'는 역정을 낸다. 그렇지만 내심으론, 아내가 참을 만큼 참다가 저런 말을 하려니 싶었다. 빗소리가 스산하게 들려온다.
'나'는 열 여섯 살 때 두 살 위의 아내와 결혼했다. 그 뒤, 지식을 구한답시고 지나 땅과 일본으로 전전하다 거들충이가 되어 집으로 돌아왔더랬다.
처가 덕으로 집채는 장만했지만 돈이 안 되는 창작에 매달리느라 아내가 친정에서 군소리를 하며 겨우겨우 생계를 이어왔던 것이다. '나'는 그녀의 인내와 다소곳함을 모르는 바 아니어서 측은히 여긴다.
이튿날, 안국동의 처가에서 장인의 생신날을 알리며 오라는 전갈이 왔다. 아내는 당목옷을 입고 허술한 청록당혜를 신은 차림으로 '내' 뒤를 따라 나섰다. 처가 대문의 문턱은 높다.
중문을 지나니 처형이 반갑게 인사한다. 인천에 사는데, 남편이 돈을 잘 버는 걸로 알려졌다. 부티가 철철 흐르는 차림새지만 분 바른 눈 위에 퍼런 멍자국이 나 있는 걸로 보아 남편이 또 주먹질을 하며 어지간히 속깨나 썩이는 모양이다.
두 자매의 얼굴 생김새는 아주 닮았지만 얼굴빛은 판이했다. '하나는 이글이글 만발한 꽃 같고, 하나는 시들시들 마른 낙엽 같다. 아내를 형이라고, 처형을 아우라 하였으면 아무라도 속을 것이다.'
그날 '나'는 음식에는 숟가락도 대지 않고 잘하지도 못하는 술만 여러 잔 마셨다.
취기가 돌아 어질어질했다. 장모가 걱정해서 인력거를 불러 귀가시켜주었다. 나는 그 돈으로 책이나 한 권 샀으면 하는 생각을 갖는다.
돌아와 잠에서 깨어보니 아내는 맛있는 반찬을 차려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고기며 생선 따위를 친정에서 챙겨왔던가 보았다. '내'가 밥상을 물리자 그제야 아내는 숟갈을 든다.
이틀 뒤, 저녁 무렵에 처형이 찾아왔다. 남편한테 돈 백 원을 우려내어 옷감과 신을 사던 참에 아우가 청록당혜를 신었던 초라한 꼴이 생각나 한 켤레를 더 사왔다는 것이다. 아내는 신문지에 싸인 그 신발을 얼른 끌러보지 못한다. '나'의 심기를 염려한 탓이다.
처형이 돌아간 뒤에 신을 신어보고는 여간 기뻐하지 않는다. 핼쓱한 뺨에 꽃물기가 감돈다. '나'는 그 모양이 너무나 애처로워 평생 처음으로 듣기 좋은 말을 했다.
"나도 어서 출세를 하여 비단신 한 켤레쯤은 사주게 되었으면 좋으련만."
아내는 감동하여 그렇게 될 줄을 믿고 있다며 격려한다. '나'는 아내의 마음 씀씀이가 고마워, 두 팔로 덥석 아내의 허리를 잡아 가슴에 끌어당기고는 뜨거운 입술을 포갠다.
기생에서 최초 여성 독립의열단 단원으로 기록된 현계옥 열사는 2016년 개봉한 영화 '밀정'에서 한지민이 맡았던 '연계순' 역할의 모티브가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계옥(1896~?)은 경남 밀양에서 1남 3녀 중 장녀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악공이었으며, 어머니는 관기로 추정된다. 이들 남매는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아버지는 장녀인 계옥에게 어려서부터 글과 노래 그리고 춤을 가르쳤다. 먹고 살기 위해서 관기로 만들고자 했다. 하지만 1897년부터 관기 제도가 혁파되면서 관기가 될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가족들 모두 경북 달성으로 이사했다. 현계옥의 아버지로서는 나름대로 돌파구를 찾으려는 시도였다. 그곳에서 현계옥의 재주는 금방 소문났고, 기생들의 조합인 대구기생조합에 들어가게 됐다. 당시 17세였다. 대구기생조합은 관기 제도가 폐지되면서 기생들이 생계 수단으로 만든 사적 활동 단체였다. 일종의 사적 활동이지만 이전의 신분을 재생산했다. 또 다른 차별과 소외의 시대였다.
최고 기생의 기구한 운명이 시작되다
소리, 산조, 춤, 가야금 등 풍류 가무에 뛰어났을 뿐 아니라 한문에 조예가 깊은 현계옥은 대구에서 독보적인 존재였다. 당연히 풍류객들의 인기를 독차지하던 명기였다. 요즘 말로 ‘인싸(무리에 잘 섞여 노는 사람)’였던 것이다. 그런 그의 운명이 전환점을 맞이했다. 노동야학 교사였던 현정건(1893~1932)을 만나면서다. 현정건은 ‘운수 좋은 날’, ‘빈처’, ‘술 권하는 사회’로 유명한 작가 현진건의 형으로, 일본과 중국 등에서 유학한 인텔리였다.
교사와 야학생의 관계로 시작된 이들은 금방 사랑에 빠졌다. 현정건 집안의 반대에 부딪힌 건 예상한 일이었다. 그리고 현정건의 결혼이 급속히 진행됐다. 현정건은 1910년 경남 양산의 만석꾼 토호 집안의 윤덕경(1895~1933)과 혼인했다. 윤덕경은 경주부호 최준과 함께 손꼽히는 민족자본가 집안의 딸이었다. 윤덕경의 큰오빠 윤현태는 백산상회 창립자였고, 작은오빠 윤현진(임시정부 재정 차장)은 현정건과 절친한 사이였다. 그런데 결혼 3일 만에 현정건은 윤현진과 함께 상해로 떠났다. 집안의 강제 결혼에 대한 반발이었다. 이 때문에 부부관계는 평생 서먹할 수밖에 없었다. 이들 세 사람의 기구한 운명이 시작된 것이다.
1913년 현정건은 국내에 들어와 현계옥을 만나 사랑을 새롭게 이어갔다. 현계옥의 집에서 조금 떨어진 영산못에서 만남을 가졌다. 현계옥이 ‘오빠’라고 부르면 현정건이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했다는데, 이것은 교사와 학생 사이를 연상시켰기 때문이란다.
현정건이 상해로 돌아간 뒤에도 서로 편지를 열렬히 주고받으며 사랑을 꽃피웠다. 현계옥에게는 현정건 외에 누구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래서 자기를 데려가 달라고 했으나 현정건은 조금 더 기다리라는 답만 했다. 그리고 다음 해인 1914년, 현계옥은 서울로 올라갔다. 서울에서도 현계옥은 ‘인싸’였다. 그의 노랫소리는 웅장하면서도 거침이 없었고, 때로는 가슴을 후벼 파는 애절함과 뭉클함도 있었다. 가야금 연주는 어찌 그리 절묘한지, 다물어지지 않는 입에 손을 갖다 댈 수밖에 없었다. 승무는 왜 이렇게 경건한지, 세상의 모든 소음을 고요하게 만드는 적막한 산사의 한 마리 나빌레라. 여기에 한문을 알고 글도 잘 쓰니 그 누가 대적할 수 있겠는가.
그는 스물두 살인 1917년에 한강 남쪽 기생들을 모아 기생조합인 한남권번을 만들었다. 이때 그와 같이 한남권번을 만들었던 이가 바로 사회주의자로 유명한 정칠성이었다.1) 현계옥과 정칠성은 경성 제일의 기생으로 쌍벽을 이뤘다.
사상기생으로의 전환
이때부터 현계옥은 사상기생으로 바뀌어 갔다. 이에 따라 경찰의 취조와 고문 끝에 7일간의 구류에 처하는 등 감시의 대상이 됐다. 또, 동료들과 함께 승마를 배웠는데 종로경찰서에서는 이마저도 금지했다. 그가 승마를 배운 것은 앞으로의 활동을 위한 준비였다. 혁명가로서의 꿈은 아닐지라도 정칠성과의 사상적 교류가 중요한 전환점이 됐다.
<매일신보> 1918년 3월 5일 자 [출처: 국립중앙도서관 고신문 디지털컬렉션]
1919년 2월 현정건이 독립자금을 모으려고 국내로 잠입했다. 오랜만에 현정건과 해후한 현계옥은 그에게 연인의 관계로 머물지 말고 동지의 관계로 발전시켜나가자고 제안했다. 민족해방운동의 당당한 주체로서 자신의 역할을 시작하겠다는 결연한 의지였다. 그리고 그들은 함께 중국으로 떠나기로 했다. 이들은 갖은 우여곡절을 겪으며 경성을 빠져나가 만주에서 활동하다가 1920년 상해로 옮겨갔다.
상해에서 현계옥은 현인권으로 개명했다. 독립운동을 하면서 개명이나 차명은 일반적인데, 이름을 ‘인권’으로 하는 것은 신기하기도 하지만 무모하기도 하다. 처음에 그는 기생 출신이라는 편견과 왜곡 때문에 독립운동가들에게 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하지만 음악회 출연 등 공개적인 활동을 하면서 자금을 모으는 일에 앞장섰다. 그의 진정성이 드러났고 결국 운동가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지게 됐다. 이것은 그에게 시작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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