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의 부조(扶助)
미국에선 총에 맞아
죽는 사람이 많을까요?
자기 집 계단에서
발을 헛디뎌 죽는 사람이 많을까요?
집 계단 사고로 죽는 사람이
(훨씬) 더 많습니다.
ㅡ 김경일 교수 ㅡ
죽음은 먼듯 가까이에서 인생들을 지켜본다. 멀어진 듯하다가도 이내 턱밑까지 다가와, 호흡 한숨의 의미를 더듬게 한다.
부조(扶助) : 1. 잔칫집이나 상가(喪家) 따위에 돈이나 물건을 보내어 도와줌. 또는 돈이나 물건. 2. 남을 거들어서 도와주는 일.
조카 진국이가 몇 주전 카톡을 주었다.
"이모.. 혹시 돈 좀 있어?(미안)"
사업실패 후 세금추징이니 대출금 연체, 건보 미납 등 셀 수 없는 사태를 가족 모두가 함께 헤쳐 나왔던 지난 1년여간이 속삭포처럼 아니 덜컹덜컹 기찻길 쇳소리로 감정을 예민하게 자극했다.
"무슨 일 또 터졌어? (이번엔) 얼마 필요한 거야?"
몇 초 후에 돌아올 답톡을 기다리지 못하고 냉큼 핸드폰을 들어 통화 버튼을 눌렀다. 무슨 일인가 재차 묻는 내게 조카가 말했다.
"그게.. 아는 친구가 죽어서 장례식 가야 하는데 (부조할) 돈이 없어서.."
"아니, 왜? 젊은 애가 왜? 병이야, 사고야?"
이 대목에서 내 질문은 정직하지 않았다.
'혹시... 또 자살?'
조카가 몇 년간 살았던, 안양 평○의 모 오피스텔은 작년말과 올해만 3명이 자살했다 한다. 아니 그보다 더 많을지도 모른다. 그 지역에서는 이름만 대면 아는 유명한 오피스텔 빌딩, 집주인들은 집값 떨어질까 봐 서로 모의라도 한듯 쉬쉬했고, 세입자들 역시 뭔지 모를 세력에 빨려 들어 침묵의 편을 들고 있다. 주변 상인들도 혹여 입소문 잘못 나서 손님 끊어질까 봐 모르는 척 일제히 함구하고 있다 한다. 자살한 사람들 대부분이 청년이거나 젊은 자영업자라고 했다.
조카는 애써 담담하게 말하는 것 같았다. 내가 우회해 던진 질문을 알기라도 한 듯 말이다
"내 친구와 동업했던 친구로, 몇 번 밥도 먹었던 사이인데, 친구가 여자친구랑 제주도로 여행 갔다 온 사이에 그만 자살한 것 같아.."
그 친구는 진국이 친구와 식당 동업하면서 함께 자취도 했던 것 같다. 진국이의 말에 의하면, 그 청년은 누구보다 건실하고 착하며 부지런하고 성실했다고 한다. 친구의 권유로 동업을 하는 입장에서, 그 자신 투자금을 대줄 형편은 안 되기에 더 열심히 일했던 것 같다. 식당을 운영하며 초반에는 손님도 붐비고 성황리에 스타트를 했다 한다. 돈 버는 족족 한 달에 얼마씩 어머니께 생활비도 갖다 드렸고, 짬짬이 헬스장에 가서 운동도 하는 청년이었다. 그래 이건 약물 과다복용의 사고일지 모른다고 했다. 어쩜 모두가 그렇게 믿고 싶은 것인지도 모른다.
한국, 6월의 폭염
뜨거워서 엉키고, 그 열감에 감정엔 교란이 일어나며, 급기야 육체마저 일상성을 상실하는 순간이 있다. 차리리 뜨겁지 않았다면 조바심도, 애달픈 감정도, 쫓기듯 두려운 미래의 추격도 심상히 여길 것이었다. 그래 이 지겹게 뜨거운 날씨가, 이 기분이 문제인 거다, 스스로 애먼 날씨를 곱씹었다. 조카 진국이는 부조를 잘 했을지, 괜한 오지랖이다 싶다가도, 이 아련히 저며오는 뜨거운 삶이 서글프다. 이름 모를 청년의 부고에 며칠을 눈물 그렁거리는 상념에 빠져들었다.
'그토록 열심히 살지만 않았어도 덜 억울하련만. 그토록 치열했다면 좀 더 희망을 견뎌보질 그랬을까.'
혼잣말을 도드라지게 하는, 이놈의 날씨에게 모든 책임을 물으며 20분 거리 대낮 인도를 오랜만에 걸었다. 봉천동에 살 땐 버스 정거장에서 우리 집까지 걸어서 족히 15분에서 20분은 걸렸었다. 등하굣길 여름의 뜨거운 열기는 혼을 빼놓을 지경이었으나 힘들다 대놓고 말하진 않았다. 모두가 동일한 고통을 겪는다는 사실은 은밀한 위로이며 조심스러운 희망이었다.
허나 나이 들어갈수록 이 위로와 희망은 위태롭게 질척거렸다. 입안에서 빠질 듯 빠지지 않고 흔들리는 성가신 이처럼, 애매한 정의와 애매한 평등은 뻰치로 빼버리고 싶은 희망 고문이고, 꿈을 녹슬게 하며 위로를 무력하게 한다.
명쾌하게 답을 논할 수 없는 세상은 종종 사소한 순간 나를 덮치곤 했었다. 새것인 친구의 문제집에서, 나보다 성적이 낮은 친구들의 국영수 학원 등록증이나 나보다 성적이 좋은 친구들의 고액 과외 소식으로 말이다. 성가셨다. 내 세계를 되짚게 만드는 주변의 생동감이 성가셔서, 쉬는 시간 운동장 수돗가에서 더위 탓을 하며 찬물을 연신 얼굴에 쏟아부었다.
은밀한 위로, 조심스러운 희망이 내 뒤통수를 치는 것 같았다. 성가시게 좇았다니는 여름의 폭염처럼, 인생의 기본값이 사람마다 다르다는 사실은 서서히 나의 의식에 가시처럼 불편감을 주었다.
'까짓 거, 걔네들은 쉬는 시간에 잡담하잖아. 걔네들 보다 (내) 머리가 좋아지면 되잖아'
중학교 1학년때부터 유독 파김치, 양파를 좋아했다. 누가 전해준 효험 좋은 민간요법인지 몰라도 파와 양파가 머리를 좋아지게 한다는 것, 그 하나에 학원등록이나 고액과외에 도전장을 내밀고 싶었다. 된장찌개든, 김치든, 모든 반찬에 들어간 파와 양파를 열심히 먹었다. 어느 날은 서러움에 은밀히 기도했다.
'솔로몬처럼 지혜와 총명을 주세요. 머리 똑똑하게 해 주세요'
민감요법이 효험이 있었을까, 초등학교 졸업 때 5등 하던 성적은 이내 중학교 때는 내내 반 2등까지 치고 올라갔다. 은밀한 위로, 조심스러운 희망. 나는 조금은 안도했고 또 조금은 여전히 흔들리는 이 같은 미래를 불안하게 감내해야 했다
수십억 자산가 아버지를 두어 사업을 실패하고도 유유히 여자친구와 에메랄드 빛 바다를 흠씬 맡으러 떠난 청년. 그는 실패에 굴하지 않고 벌써부터 다음 사업을 구상하고 있었다. 같은 시간, 식당을 접으며 통장잔고가 바닥 났을 한 젊은이는, 연체가 찍힌 수북한 세금 고지서와 이번달도 못 드리고 넘어가야 할 어머니의 생활이 걱정이었을 것이다. 흔들리는 이 같은 현실에, 지난하게 달려온 뜨거움은 맥을 잃고 말았던 것일까. 친구가 다시 도전하자는 장사도 실패할 것 같은 두려움, 취직이 어려운 본인의 스펙, 그 무엇이 맥을 잃은 뜨거움에 찬물을 끼얹었던 것일까.
그날, 한 젊은이가 수를 헤아리지 않고 입에 넣고 넣은 약은, 오늘만 견디기 위함이었을까, 내일을 뺀치로 빼버리고 싶은 오래 견뎌온 서러움과 절망 때문이었을까. 그에겐 민간요법이 없었는지, 있다 해도 효험이 시답지 않았는지. 왜 세상엔 좀 더 다양하고 많은 희망의 민간요법이 없는 건지.
유례를 찾기 힘든 6월의 폭염을 머리에 얹고 태양이 작열하는 인도를 걸으며 견디고 또 견디었다. 40년 넘게 매해 견뎌왔듯이 인생의 폭염을 의지적으로 견디었다. 일부로 버티었다. 결연하게 뜨거운 공기를 헤집듯 걸었다. 이 폭염에도 잔디를 정리하는 할아버지들의 공공근로에 그만 마음이 덜커덕 멈췄다. 여전히 견디는 삶, 장수하시는 할아버지들은 필연 효험 있는 민간요법을 많이 갖고 계신 게 분명하다.
중학교 1학년 때, 아버지가 공사판에서 일하시다 발을 헛디뎌 3층에서 떨어져 허망하게 돌아가셨다. 그 시절에도 내겐 민간요법이 있었다. 책이 그랬다.
그 무렵부터였을까. 집 책꽂이에 닳아진 듯 멀쩡한 책들이 눈에 들어왔던 것은 말이다. 9평 집에 어울리지 않게 꾸역꾸역 구획 지어진 궁상맞은 공간, 책상 그리고 책장. 싸구려 책장엔 동네 누구네 집에서 얻어왔을 책들이 적막하게 꽂혀 있었다. 그 활자의 세계에서, 위인이라 이름하는 사람들이 내 생애에 들어왔다. 다행이었다. 그들도 치이고 아프고 무너지고 슬펐다는 것이, 동시에 그들이 완전히 고꾸라지지 않고 견디고 도전하고 투쟁하며 성장하고 성숙해 갔다는 것이.
그들은 왠지 새벽을 닮은 것 같았다. 동트기 전이 가장 어둡다던, 그 새벽을 견디고 또 견디었던 강인했던 남자 그리고 여자, 바로 그들. 누군가의 생애를 글로 채운 그 공간에서, 내 좌절을 일렀고 나의 고통을 통곡했고 무너질 것 같은 나를 붙들어 매 두었다. 지독히 고독한 나와 놀아 달라고 나 좀 붙잡아 달라고 절규했다. 책 속으로 뛰어든 그 순간은 탄식을 내어놓는 시간이었다. 세상 어디에도 기댈 수도, 목 놓아 울 수 없는, 그런 내 자아가 마음 놓고 무장 해제되는 공간. 책과의 교감은 현실을 도피할 수 있는, 현실의 냉혹함을 처단할 수 있는, 그 현실을 딛고 일어서는 응집된 용기의 발판이었다.
그 책 속의 내 동무들은 대부분 새벽을 사랑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새벽은, 내가 그들처럼 이기고 견디는 삶의 활로를 찾아내는 보물지도 같았다. 그렇게 30년 넘게 새벽을 더듬어 살았나 보다. 새벽은 이내 재기, 도전, 승리, 다시로 삶의 국면마다 나와 함께 했다.
*출처 : 청년 클레어의 03화 [연재 3] 퇴직 후 브런치 책방에서
진국이와 얼마 전 다른 용건으로 통화하다, 그 장례식 이야기가 나왔다. 같은 또래 동창인 친구들이 함께 조문을 갔고, 모두가 살기 빠듯하지만 1인당 30만 원씩 부조금을 모아서 전달드렸다 한다. 그날도 죽은 청년의 어머니는 아들 친구들을 곁에 두고 혼절 하셨다 한다.
또래 청년을 부조하고서, 조카는 아마도 돈이 조금 더 부족해 전화한 눈치였다. 눈이 침침해 안과에 갔더니 눈다래끼에, 눈병이 났다 한다.
"이모, 미안.. 이럴 줄 알았다면 내 형편에 부조를 30만 원씩 할게 아니고 20만 원만 할걸 그랬나 봐"
그날 조카에겐 50만 원을 주며, 그 젊은이의 어머니를 마음에 그리며, 30만 원은 부조하라고 했던 건 나였다.
조카는 저번달 5월에, 그간 살던 오피스텔에서 나와 주요 가전제품을 나와 짝꿍에게 되팔아 넘기고, 조카의 엄마집 곧 내 넷째 언니 집으로 다시 들어갔다. 이삿날 은행 전세보증금을 갚아야 했는데, 돈이 없어 한 달간 말미를 부탁한 듯했다. 조카가 사업실패 후 다시 시작한 일들이, 아직은 서툴러 매달 성과에 따라 월급은 300~500만 원대라, 자동차 담보대출과 미상환 전세보증금, 카드론을 갚고 나며 아직은 빠듯한 처지였다.
6월 초, 그 은행 전세보증금 상환 독촉은 이내 월급 압류 통지로 날라들었다. 때마침 내 짝꿍의 미국주식이 값을 회복해 일부 팔았고, 짜투리 땅값 1억 도 세금 제하고 통장에 들어왔던 터라, 5월에도 짝꿍의 도움으로 목돈 수백만 원을 이미 대주었던 터였다.
조카가 안과에 갔던 날, 눈다래끼와 눈병 외에도 안압이 높아 녹내장도 의심된다며, 추가 검사를 제안받은 상황이었다. 조카의 통장잔고는 거이 바닥을 치고 있을 것이 뻔히 보였다. 조카가 부조를 20만 원만 할걸 그랬다는 말에는 이런 그간의 서사가 있었던 것이다.
조카의 처지(참고글: 포레스트 운남의 잭팟(0) 이모, 죽고 싶어요)가 딱하기에 이번에도 통 크게 입을 떼려는데, 오랜 전 '흔들리는 이'의 전설이 아련한 질척임으로 스쳐 지나갔다. 이내 그 불편감을 무시한 채 대답했다. 혹여 월급 압류를 감안 생활비 몇백만 원을 송금해야겠구나 순식간에 셈을 하면서 말이다.
"아들 친구들 앞에서 혼절하신, 그 어머니를 생각하니 아..."
나는 말을 잇지 못 하고 단발적인 탄식이 새어 나오는 것을 다음 말로 급하게 숨겼다.
"30만 원 (부조)하길 잘 했지. 홀로 남은 어머니 빨리 추스리시면 좋겠다. 내가 이따 추가로 송금해 줄께. 눈 안 좋은데 일 욕심내지 말고 당분간 차 운전하지 말고."
진국이가 부조할 형편이 안 되는 자신을 서러워하지 않길 바랬다. 부조는 본디 사자(死者)를 위한 것이 아니라 살아남은 자들을 위함임을, 내가 살아야 할 이유를, 그 슬픔을 위로하며 되려 얻어가는 것이라고 말이다. 혼절을 거듭했다는 젊은이의 어머니, 그 어려운 마음을 조심스레 마음에 담길 바랬다.
며칠 전 나의 오빠이자 진국이의 큰삼촌인 운남오빠도 진국이와 통화했나 보다. 그 자신도 20대에 죽으려고 3일 굶고 관악산 꼭대기에 올라갔던 사연을 나누며(참고글: 2. 박완서 '나목' feat불운테크, 포레스트 운남의 잭팟(1)), 그럼에도 견디고 살아내면 좋은 날 있을 거라고 오래된 전설 같은 희망을 다져주었던 듯싶다.
뜨거우니 젊음이다. 때로 뜨겁기에 서러울 땐 가만히 꺼내보자. 내가 이기었던, 은밀한 위로와 조심스러운 희망들을, 뜨거워서 되려 쓰디쓴 인생을 맛깔스럽게 만들어주는 파와 양파의 레시피를 말이다.
우울감 등 말하기 어려운 고민이 있거나 주변에 이런 어려움을 겪는 가족·지인이 있을 경우 자살예방 상담전화 ☎1393, 정신건강 상담전화 ☎1577-0199, 희망의 전화 ☎129, 생명의 전화 ☎1588-9191, 청소년 전화 ☎1388, 청소년 모바일 상담 ‘다 들어줄 개’ 어플, 카카오톡 등에서 24시간 전문가의 상담을 받을 수 있습니다.
청년 최인훈의 등단
2017년 2월 81세의 원로 작가 최인훈은 입학 65년 만에 서울대학교 법대 졸업장을 받았다. 1936년 함경북도 회령에서 태어나 6·25 전쟁 중 월남한 그는 전쟁 후 혼란한 현실 속에서 법학 공부에 회의를 느끼고 휴학계를 낸 채 복학하지 않았다. 최인훈은 대학 대신 선택한 7년간의 군 복무 생활이 자신에게는 도리어 참된 대학 생활과도 같았다고 회고한 적이 있다. 군 복무 중에 집필한 <그레이 구락부 전말기>, <라울전>을 작가 안수길이 추천하면서 문단에 등단하게 된 최인훈은 삶의 방향을 정하지 못한 젊은 세대의 우울과 방황을 작품에 담아낸다.
4·19 혁명과 <광장>
1960년 11월, 25세의 최인훈이 발표한 <광장>은 한국 문단에 큰 충격을 주었다. 분단 이후 우리 문학계에서 남쪽과 북쪽을,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를 동시에 비판하는 작품은 <광장>이 최초였다. 6·25 전쟁 당시 남과 북의 포로 군인 70여 명이 복귀를 거부하고 인도행 배를 탄 일이 실제 있었는데, 최인훈은 이 사건을 <광장>의 모티프로 삼았다. 이 모티프 속에 작가는 문학적 상상력으로 ‘이명준’이라는 문제적 주인공을 창작해 넣었다. 두 사상 중 어느 것도 택하지 않고 중립국을 선택하는 ‘이명준’의 행동은 당시 한국 사회를 쥐고 있던 이데올로기의 문제를 직접 뒤흔든 것이었다.
1960년 4월 최인훈은 광주에서 직업 군인으로 훈련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4·19 혁명의 과정을 신문 기사와 풍문으로 전해 들었다. 하지만 청년 최인훈에게 4·19 혁명은 결정적인 사건이었고, 곧 <광장>이 태어나는 밑거름이 된다. 그는 <광장>의 구상을 언제부터 가지고 있었는지는 생각나지 않지만, 4·19 혁명을 통해 잠깐이나마 형성된 자유의 공간과 1945년에서 1950년까지 북한에서 생활했던 경험이 있었기에 <광장>을 쓸 수 있었다고 말한다.
<광장>을 발표하고 두세 달 지나 전방에서 근무하던 최인훈은 육군본부의 호출을 받는다. 당시 참모총장이 <광장>을 쓴 군인이 누구인지 알아보라고 지시했기 때문이었다. 그때 호출을 받았음에도 어떠한 정신적 압박도 받지 않고 무사히 넘어간 것은 역시 4·19 혁명의 여파 덕분이었다고 최인훈은 회상한다.
시대에 따라 응답하는 <광장>
<광장>은 처음 발표된 1960년부터 2015년까지 10번의 개작을 거친다. 작품의 분량도 늘어나고 작품의 구조는 물론 내용까지 많은 수정을 거쳤다. 최인훈은 처음 <광장>을 쓸 때는 4·19 혁명 직후 너무 생생한 사건을 역사에 증언한다는 느낌이었지만, 자신의 정신력이 있는 한, 한 글자라도 좋은 모습으로 개정해서 후대 독자들에게 보내고 싶다는 마음으로 <광장>을 개정한다고 밝혔다.
문학으로 소통하는 지식인
최인훈은 <광장> 이후에도 끊임없이 현 시대 속 지식인의 고뇌, 방황을 작품으로 형상화했다. 정치, 역사, 철학, 종교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작품 속에 풀어놓고 세태를 다각적으로 분석하려 했다. 이러한 지식인의 면모가 두드러지는 소설 외에도 <둥둥 낙랑둥>, <달아 달아 밝은 달아> 등의 희곡도 다수 발표했다.
최인훈[ 崔仁勳 ]
출생 - 사망 : 1936. 4. 13. ~ 2018. 7. 23.
출생지 : 국내 함경북도 회령
데뷔 : 1959. 자유문학지에 「GREY 구락부 전말기」, 「라울전」이 안수길에 의해 추천됨
가족관계
아버지 : 최국성(崔國星)
어머니 : 김경숙(金敬淑)
최인훈은 한국 근대정신사 최고의 봉우리 중 하나에 서 있다고 평가받는다.
1936년 4월 13일 함북 회령 출생. 목재상이었던 아버지 최국성(崔國星)과 어머니 김경숙(金敬淑) 사이에 장남으로 출생.
원산중학을 거쳐 원산고등학교 재학 중 한국전쟁을 만나, 그해 12월 해군함정 LST 편으로 전 가족이 월남했다. 목포고를 거쳐 서울대 법대 4학년을 중퇴하고(1957), 1958년 군에 입대하여 6년간 군생활을 하다가 1963년 제대했다. 제대 후 소설가, 희곡작가로 왕성한 작품 활동을 펼쳤다. 1973년 미국 아이오와대학 작가 프로그램에 참석하기 위하여 미국에 건너가 3년간 머물다가 귀국한 후, 1977년부터 서울예전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군복무 중이던 1959년, 『자유문학』지에 「GREY 구락부 전말기」, 「라울전」이 안수길에 의해 추천됨으로써 문단에 등단하였다.
다음 해 중편 「광장」(1960)을 발표함으로써 문명을 확고히 하고, 이후 「회색인」(1963~1964), 「서유기」(1966),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1969~1972), 「태풍」(1973)으로 이어지는 5대 장편과 「가면고」(1960), 「구운몽」(1962), 「열하일기」(1962) 등의 중편, 「우상의 집」(1960), 「웃음소리」(1966), 「국도의 끝」(1966) 등의 단편, 그리고 「크리스마스 캐럴」(1963~1966), 「총독의 소리」(1967~1976), 「주석의 소리」(1969) 연작 등 허다한 문제작들을 줄기차게 발표함으로써 1960년대 전 기간과 1970년대의 일부 기간을 합해서 질적‧양적인 면에서 독보적인 업적을 남김으로써 김현‧김윤식의 『한국문학사』(1973)에서 ‘전후 최대의 작가’라는 평가를 얻었다.
1970년대 후반기는 나중 『옛날 옛적에 훠어이 훠이』(1979)로 묶이게 되는 일련의 희곡 작업에 몰입하는 시기이거니와, 이때까지의 소설, 희곡, 수필, 문학론 등 모든 양식의 글들이 모여 문학과 지성사에서 12권의 『최인훈전집』(1979)이 간행되었다. 10여 년간의 문학적 휴지기를 거친 후에, 1994년 세계사적 냉전체제의 종식에 즈음한 자전적 회상록의 장편소설 「화두」를 발간함으로써 여전히 현역 작가의 반열에 서 있음을 스스로 입증하였다. 그의 문학적 특징은 흔히 ‘관념 작가’라는 말로 표상된다. 그 관념은 그러나 현실과의 길항 속에서 끊임없는 접점의 불꽃을 일으키고 있다는 점에서 한갓된 미망의 관념과는 구별되는 것이며, 이 점에서 그의 관념의 불꽃이 일으키는 파장은 현실의 전체성을 향해 나아가는 경계 없는 대양의 파문과 같은 것이다.
「광장」, 「회색인」, 「서유기」,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등에 주목하여, 그의 관념적 사유의 진폭은 흔히 우리의 분단 현실에 초점이 맞추어진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하지만 그의 사유의 진폭은 기실 한국 문화사 전체와 20세기 세계사의 진폭, 그리고 인간 존재의 본질 규명을 둘러싼 존재와 사회, 역사, 문명 전반을 아우르는, 마치 종합철학의 포괄성에 상응하는 것 같은, 어떤 사색의 여정에 부합하는 것이다. 스스로의 관념의 스승으로 헤겔을 운위 하는 데서 엿볼 수 있듯이, 그의 문학 자체가 기실은 거대한 사유운동의 아들로 태어난 것을 주목해야 할 터이거니와, 한국 근대정신사의 높이를 스스로의 문학이 대변하고 있다는 듯이 사유하는 작가의 오만도 이로 보면 전혀 난센스만은 아니라는 점에 동조할 수 있다. 한국 근대정신사 최고의 봉우리 중 하나에 이 작가의 문학이 서 있는 것이다.
학력사항
원산중학교
원산고등학교
목포고등학교
서울대학교 - 법학(중퇴)
경력사항
1973년 ~ 미국 아이오와대학 작가프로그램
1977년 ~ 서울예전 교수
작품목록
GREY 구락부의 전말기
라울 전
그레이구락부전말기
구월의 달리아
우상의 집
가면고
광장
수(囚)
광장
구운몽
열하일기
칠월의 아이들
크리스마스 캐럴
회색의 의자
금오신화
회색인
속 크리스마스 캐럴
웃음소리
정오
크리스마스 캐럴 3
놀부편
크리스마스 캐럴 4
국도의 끝
서유기
크리스마스캐롤 5
웃음소리
춘향뎐
총독의 소리
만가
총독의 소리
총독의 소리 2
공명
총독의 소리 3
주석의 소리
온달
온달
옹고집뎐
열반의 배
열반의 배-온달 2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2
두만강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2[재수록]
낙타섬까지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3
하늘의 다리
문학을 찾아서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3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4
갈대의 사계
무서움
서유기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태풍
광장
총독의 소리 4
옛날 옛적 훠어이 훠이
옛날 옛적에 훠어이 훠이
최인훈 전집
봄이 오면 산에 들에
역사와 상상력
둥둥 낙랑둥
달아 달아 밝은 달아
전사(戰史)에서
왕자와 탈
하늘의 다리
한스와 그레텔
느릅나무가 있는 풍경
한스와 그레텔
한스와 그레텔
달과 소년병
놀부뎐
문학과 이데올로기
광장/회색인/웃음소리
하늘의 다리
광장/태풍
달과 소년병
웃음소리
남들의 지붕 밑에서
화두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최인훈 [崔仁勳] (한국현대문학대사전, 2004. 2. 25., 권영민)
생애 상세 정보
1936년 4월 13일 함경북도 회령군에서 4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실제 출생년도는 1934년이라고 한다.) 아버지 최국성(崔國星)은 목재 상인이었으며, 집안은 제법 부유한 편이었다. 해방 이후 소련군이 북에 진주하게 되었을 때 그의 아버지는 부르주아로 지목되었고, 결국 다른 지방으로의 이주를 결심한다. 그는 1947년 아버지를 따라 함경남도 원산시로 이주했으며, 자전소설인 <화두>의 내용에 따르면 원산에서 학교를 다닐 때의 경험이 후에 소설가가 되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참고로 원산중학교에 입학할 때 월반을 해 바로 2학년부터 시작했다.
원산고등학교 재학 도중 6.25 전쟁이 발발하자 철수하는 국군을 따라 월남했으며, 피난민 수용소에서 1달가량을 지내다가 친척이 있는 전라남도 목포로 이주함과 동시에 목포고등학교로 전학했다. 목포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 법대에 입학하지만, 사법시험은 거의 준비하지 않고 문학 공부에 몰두한다. 이때 시를 써서 추천을 받은 일이 있었는데, 후에 그의 작품인 <광장>이나 <구운몽> 등에서 시나 노래가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시인으로서의 재능도 없지는 않았던 듯하다. <구운몽>에 등장하는 '해전'이라는 시는 따로 연구한 논문도 더러 있으며, 최인훈 자신이 그에 대한 해석을 쓰기도 했다.
자세한 이유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마지막 학기를 앞두고 1957년에 서울대학교를 중퇴하고 장교로 임관하여 군 복무를 했다. 군에서는 제법 오래 있었는데, 통역장교로 7년간 근무하면서 1959년부터 문학 활동을 한다. 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장편소설 <광장> 역시 1960년작이다.
1959년에 <그레이 구락부 전말기>를 발표하면서 등단했으며, 같은 해 <라울전>이 추천을 받아 정식으로 소설가가 된다. 그리고 1960년에는 <가면고>를 발표했으며, 대표작인 장편소설 <광장>이 10월에 발표된다. 평론가 김현은 '1960년이 정치사적으로 4.19의 해라면 문학사적으로는 광장의 해다'라고 언급할 만큼 <광장>이 당시 문학계에 가져다준 충격은 대단했다. 이전까지 재능 있는 젊은 작가 정도였던 최인훈은 이 작품 하나만으로 유명 소설가의 반열에 오르게 된다.
이후 <구운몽>, <회색인>, <서유기>, <태풍>, <크리스마스 캐럴>, <가면고>, <총독의 소리> 등을 발표했으며, 미국으로 떠나 극작가로 활동한다.
극작가로서의 최인훈은 <광장>의 대중적인 유명세에 힘 입어 잘 알려지지 않았으나, 최인훈은 70년대 이후에 소설 절필을 선언하고 희곡을 쓰는 데만 작가로서의 역량을 전념하였다. 본인 스스로도 소설가가 아니라 극작가로 남고 싶다고 말하였으며, 소설을 쓸 때는 창작의 희열을 느끼지 못하였는데, 희곡을 쓸 때는 지구를 뚫고 우주를 솟구치는 듯한 희열을 경험하였다고 말할 정도였다. 공식적으로 최인훈이 발표한 희곡은 총 일곱 작품인데, 한국의 신화를 바탕으로 한 작품들과 그렇지 않은 작품들로 나뉜다. '온달 설화'를 바탕으로 한 <어디서 무엇이 되어 만나랴>, '낙랑공주와 호동왕자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둥둥 낙랑둥>, '아기장수 설화'를 바탕으로 한 <옛날 옛적에 훠어이 훠이>, 심청전을 다크 하게 재해석한 <달아 달아 밝은 달아> 등의 희곡 등이 유명하다.
<달아 달아 밝은 달아>는 심청이를 모티브로 한 희곡이며 희곡 속 심청이는 매춘부가 되기 싫어서 배에서 바다로 뛰어내리다가 실패하며, 매춘굴 '용궁'에서 조선인 김서방을 만나 고국으로 돌아오는 배를 어렵사리 타지만, 왜국 해적들에게 납치되어 윤간을 당하는 등 고난을 겪고 할머니가 되어 조선으로 겨우 돌아오게 된다는 충격적인 서사를 담고 있다. 희곡의 결말에서 늙고 병든 심청이는 자신의 인생 담을 동화처럼 들려주기 위해 우리가 아는 심청전의 내용을 읊어 주지만, 동네 아이들은 그 이야기를 믿지 않고 '청청 미친 청'이라는 노래를 부르며 심청이를 조롱한다는 비참한 결말로 끝을 맺는다.
이 작품은 아름다운 고전을 폭력적인 방식으로 왜곡하였고 너무 성적인 부분이 많다는 비난에 직면하였던 바 있다. 작가 최인훈 본인은 전혀 그럴 의도는 없었으며 , 심청이가 스스로 몸을 팔았다는 설화가 과연 사실인지, 오히려 그 설화는 유교의 효 이데올로기에 의해서 자식이 본인의 인생을 다 바쳐 부모 봉양할 것을 강요하고 정당화하는 텍스트였던 것이 아닌지를 현대 한국인 스스로가 돌아봐야 한다며 답변을 하였는데, 이처럼 최인훈은 70년대 이후에도 <광장> 못지않게 더 고차원의 방식으로 한국인의 내면을 해부하는 텍스트를 희곡의 영역에서 쓰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최인훈의 희곡을 당시 1960-1970년대 대한민국 희곡계에서 퍼지고 있던 "전통의 현대화"에 부합하는 작업으로 치부하는 것은 매우 얄팍한 해석이라고 볼 수 있다.
미국에 머무는 기간 동안 소설은 단 한 작품도 발표하지 않은 대신 <광장>을 공들여 개작했으며, 세련된 순우리말을 사용한 작품으로 탈바꿈시켜 돌아온다. 본인은 이때 미국으로 떠나 생활한 것을 일종의 도피였다고 생각하는 듯한데, 이후의 인터뷰 내용 등을 보면 독재 정권하에서 대한민국이 신음하고 있을 때 미국에서 자유롭게 살았다는 것을 지식인으로서의 책무를 다하지 못한 것으로 여기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다른 한 편으로는 한국의 정치적인 상황을 소재로 소설을 쓰는 것이 예술적으로 현실의 표피만을 건드리는 것이라고 느껴 자신의 소설 작품에 대한 작가로서의 회의를 경험하였고, 보다 원형적이고 본질적인 창작 활동을 하는 길을 고민하다가 신화를 소재로 한 희곡 작업으로 예술적 진로를 선택하였다고 말하기도 하였다. 단순히 독재 정권으로부터의 도피라고 최인훈의 행보를 바라보는 것은 운동권 사관에 젖은 편협한 해석이다.
1977년에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학과 교수로 정식 임용되어 2001년 5월까지 재직했다.
비교적 최근인 1994년에는 자전 소설인 <화두>를 발표했다. 최인훈이 한국사의 굵직굵직한 사건들에 대해 느꼈던 감정들과 그 흐름을 따라 살았던 삶, 그리고 자기 작품들의 주제의식과 창작동기를 밝히고 있는 작품이다. 2012년에는 <바다의 편지>라는 선집을 내놓았다.
생전에 일상 생활이 거의 베일에 싸여 있는 사람이었다. 평소에 어떻게 지내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들리지 않고, 예전에는 강의라도 나갔지만 정년퇴임 후에는 그마저도 무소식이었다. 특히 최인훈의 가족 같은 경우는 언론에 공개된 적이 아예 없다시피 한 수준이었다.
2018년 6월에 대장암 말기 판정을 받아 투병 중이라는 사실이 알려졌다. 암 발견이 늦어서 전신으로 암세포가 퍼졌으며, 상당히 위중했다고 한다. 그 뒤 2018년 7월 23일 오전에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타계했으며, 장례는 문학인장으로 치러졌다. 묘지는 경기도 고양시의 공원묘지인 자하연 일산에 있다.
타계 후 금관문화훈장이 추서 되었다.
작품 세계와 특징
그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 한다면, 이데올로기와 같은 무거운 주제를 다루면서도 언제나 사랑을 강조한다는 것이다. 사랑은 최후에는 승리한다는 Boy Meets Girl 식의 전개가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고, 대체로 현실의 힘겨운 상황 앞에서 사랑이라는 위대한 이상을 좇아 투신한다는 전개가 많은 편이다.
다만 이 사랑이라는 주제에서 아쉬운 부분은, 이명준이나 <회색인>의 주인공인 독고준 등이 가진 연애관이나 여성관이 60년대 지식인이 가질 법한 관점이다 보니 요즘 보기에는 고전적이거나 심지어는 마초스럽다고 느껴지기까지 한다는 것이다. 이는 최인훈이 속한 세대를 감안하면 어쩔 수 없는 면이기는 하지만, 사랑의 숭고함을 이야기하는 작품에서 주인공의 여성관이 이렇다는 것은 조금 묘한 부분이 있다. 더군다나 최인훈이 소위 진보적인 작가라는 점 때문에 더욱 그렇다.
<광장> 때문에 이데올로기의 대립을 다룬 작가로 유명하지만, 사실 이데올로기의 대립이 전면적인 주제로서 부각되는 작품은 <광장> 뿐이라 해도 좋다. 최인훈 자신은 이데올로기보다는 민족의 현실에 관심이 많은 작가라고 볼 수 있다. 이데올로기의 대립은 우리 민족의 역사적 상황의 하나로서 그의 관심을 끌었을 따름이다. 실제로도, 최인훈은 <태풍>처럼 연장된 식민시기를 배경으로 하는 거의 대체역사소설에 가까운 작품을 쓰기도 했다. <광장> 역시 이데올로기의 대립이 드러나기는 하지만, 이데올로기의 허위성을 폭로하고 그보다 더 본질적인 개인과 집단의 관계 문제와 삶의 실존적 문제를 다루는 소설에 가깝다. 이명준의 삶은 국가주의에 대한 혐오에서 출발해 국가를 넘어서는 비전을 찾으려는 인식론적 모험이며, 이데올로기는 어디까지나 그 배경이 되는 요소일 뿐이다.
고전 문학이나 다른 문학 작품들을 패러디한 작품이 많으며, 대표적으로 <구운몽>, <서유기>, <크리스마스 캐럴> 등이 있다. 또 실험적인 기법을 자주 사용하며, 앞에서 언급된 <구운몽> 같은 경우는 꿈과 현실이 모호한 특유의 환상소설적인 기법으로 현실 문제를 비판하여 시대를 앞서 간 작품이라는 평가를 듣고 있다. 보르헤스가 떴을 때는 평론가들이 극찬을 했는데 최인훈은 실험적 기법 때문에 욕만 들어먹었다. 욕만 들어 먹은 건 아니다. 좋은 평가도 많이 받았지만 하필이면 발표 시기가 딱.......
대중적으로 소설가로 잘 알려져 있기는 하지만, 의외로 희곡 분야에서도 중요한 사람이다. 소설 창작에 한계를 느껴 오직 희곡으로만 표현할 수 있는 내용을 표현하기 위해서' 희곡 창작을 시작했다고 하며, 기본적으로 무대에서 상연되는 연극의 대본으로서의 희곡이 아닌 순수한 문학으로서의 희곡에 접근하고자 한 작가로 알려져 있으나, 2009년에 본인의 희곡을 무대에 올렸다. 소설에서 패러디 기법을 많이 사용했던 것처럼, 희곡 역시 심청전이나 온달전 등 고전 작품을 패러디한 작품들을 썼으며, 이를 미국에서 무대에 올리기도 했다. 2003 수능에서는 최인훈의 희곡 중 하나인 "둥둥 낙랑둥"이 허를 찌르면서 출제됐다. 제목만 보아도 무언가가 생각한다.
말년에는 작품 활동이 뜸한데, <바다의 편지>라는 에세이 겸 소설집 이후로는 별 다른 소식이 없다. 사실 한국 문단 자체가 나이 많은 기성 문인이 신작을 발표하기에는 눈치가 보이는 환경이다. 더군다나 사상가로서도 인정을 받는 사람인 만큼, 별다른 목적 의식 없이 여러 글들을 써서 내지도 않을 것이다. 이런 점들을 고려해 보면, 오히려 활발히 활동하는 편이라고 해야 할지도 모른다. 본인의 희곡을 을무대에 올린 2009년에는 "창작하는 사람들에게 은퇴란 없다"라 말했다.
전술했듯이 1977년부터 2001년까지 서울예술대학의 교수로 재직했으며, 이후로는 은퇴한 뒤 명예교수 직함을 썼다.
주요 작품 분류
1. 소설
광장 (1960): 최인훈의 최대 대표작.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나 모의평가 및 수능에도 등장했다.
구운몽 (1962)
회색인 (1963~1964)
서유기 (1966)
태풍 (1973~1974)
크리스마스 캐럴 (1963~1966) 매우 난해한 소설. 이상의 날개를 오마주한 5편은 2023학년도 9월 모의평가에 출제되었다.
가면고 (1960)
하늘의 다리 (1970)
두만강 (1970)
웃음소리 (1966)
총독의 소리 (1967~1976)
유토피아의 꿈
문학과 이데올로기
길에 관한 명상
달과 소년병 (1984)
화두 (1994) 제6회 이산문학상 수상작.
바다의 편지 (2003)
2. 희곡
어디서 무엇이 되어 만나랴 (1970) - 평강공주와 바보 온달의 설화, 2011학년도 9월 모의평가 출제.
옛날 옛적에 훠어이 훠이 (1976) - 최인훈이 1976년 미국 체류 중에 쓴 작품이다. 워싱턴 근처 작은 도시의 서점 창고에서 우연히 아기장수 설화를 발견하고는 최인훈은 무엇엔가 사로 잡힌 듯 며칠 밤 잠을 이루지 못했고, 그 후 귀신에 홀린 듯이 써 내려간 작품이라고 한다.
둥둥 낙랑둥 (1978) - 호동왕자와 낙랑공주 설화로, 낙랑공주가 쌍둥이라는 설정인데, 내용이 막장 드라마 뺨칠 정도다. 2003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 출제.
달아 달아 밝은 달아 (1978)
여담
딸(최윤경)이 2019년 아버지와의 추억을 회고한 책 <회색인의 자장가>를 출간하였다.
아들(최윤구)이 최인훈 연구소라는 유튜브 채널을 운영하고 있다.
가정에서 과하게 진지한 성향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딸의 회고에 따르면 어린 시절엔 유치하다는 이유로 뽀뽀뽀도 못 보게 했다고 한다. 링크 최인훈이 원했던 것은 문학 토론이었던 것. 요즈음 관점으로 보면 아이의 눈높이를 고려하지 않았다고 비판할 만한 부분이지만, 그렇다고 가부장적인 아버지는 아니었으며, 절대로 술에 취해 흐트러진 모습을 보여 준 적이 없는 성실한 아버지였다고 한다.
광장[ 廣場 ]
최인훈의 중편소설로, 전후 소설 중 최초로 분단의 문제를 객관적인 시선으로 다루고 있다. 특히 남과 북의 이데올로기와 정치체제를 모두 비판함으로써 분단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주인공 이명준이 남과 북을 오가면서 양 사회의 문제점들을 직접 확인하게 되고, 결국은 중립국을 택한다는 결론은 당시 자신들의 이데올로기만이 정당하다고 주장하던 남과 북의 과잉된 이데올로기에 경종을 울리게 한다.
작품해설
1960년 11월 『새벽』에 발표된 최인훈의 대표작.
원래 6백 장 정도의 중편 분량이었으나, 이후 단행본 출간과 수차례의 개작 과정에서 8백 장 규모로 정착되었다. 특히 이 작품은 최초 발표 이후 대략 6차에 걸쳐 개작을 거친 것으로 유명하다. 개작을 통한 변모 과정을 밝히는 것이 곧 하나의 문학사적 의미망 구축에 해당할 정도로 그것은 유례없는 개작의 역사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발표 당시에는 “사월이 가져온 새 공화국에 사는 작가의 보람”이라는 작가의 감격 어린 표백에서 알 수 있듯이 분단 이후 남한 체제가 노정한 자본주의적 현실 모순에 비판의 과녁이 놓여진, 다시 말하면 내부 체제 비판이라는 앙가주망적 동력학을 가진 작품으로 파악될 수 있다.
그런데 단행본 출간 과정에서 그 비판적 에너지가 보다 확충되면서 분단 후의 양쪽 체제에 대한 동시적이고 균형 잡힌 비판 쪽으로 비판적 합리주의의 태도가 견인됨으로써, 오늘날과 같은 좌‧우 이데올로기에 대한 전면적 비판의 관념형 소설로 굳어지게 된 것이다.
단행본 출간 과정에서 대개 확정된 현재의 「광장」 판본은 그 후 거듭된 중간(重刊)과 일역(日譯), 그리고 개판(改版) 등의 계기를 거치면서 조금씩 수정되었다. 보다 전면적으로 1976년 전집판을 간행하면서 한자어 어투를 순 고유어로 대체하고자 한 작업이 주목된다. 한글세대로서의 자각을 의미하는 이 문체상의 변혁과 ‘사랑’의 의미에 대한 강조로서 현재의 판본은 일단 완성되기에 이른다. 1980년대 말 가로 쓰기로의 판형 개판에서 또 한 번 간략한 손질을 입는데, 이때까지의 판본에서 ‘코뮤니즘’으로 지칭돼 왔던 것을 ‘스탈리니즘’으로 개칭한 것이 그 손질의 내용이다.
1980년대 후반 이후 소련 공산주의가 보인 자체의 갱신 움직임에 자극되어 공산주의를 보다 역사적으로 파악하려는 인식의 소산으로 보이거니와, 동유럽 체제의 완전 붕괴라는 20세기말 세계사의 최대 격변 현실과 맞물려 「광장」의 문제의식은, 「화두」에까지 연결된다고 할 수 있다. 오늘의 시점에서 「광장」을 다시 평가할 때도 그 문학사적 의미망은 분단 이데올로기의 해체와 비판이라는 각도에서 크게 벗어날 수 없다.
「광장」 이후 수많은 분단 소설들이 지어졌으며, 또 어느 면에서 이 작품의 성과를 넘어선 소설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하더라도 비판적 사실주의의 각도에서 이 작품만큼 전면적으로, 그리고 순수하게 이데올로기 비판의 성격을 지닌 작품은 그리 많지 않다. ‘이명준’이라는, 우리 소설사에 드문 관념적 지식인을 주인공으로 창조한 것도 예사로이 무시될 수 있는 일은 아니며, 무엇보다 이러한 지평 확대로 말미암아 4‧19 혁명 이후 1960년대 소설사가 전후소설의 관념 부피를 벗어나 내면 공간의 비약을 이룩하게 되었다는 사실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분단 시대를 관통하는 최인훈 문학의 원점이라는 점, 현실 반영의 리얼리즘이라는 각도에서 살펴볼 때, 그동안 실제로 확인된 한국전쟁 후의 수많은 제 삼국행 전쟁포로들의 존재가, 이 작품의 역사 비판이 결코 허구적 몽상의 소산만이 아니었음을 입증하고 있다.
줄거리(사이버 문학광장 제공)
바다는 크레파스보다 진한 푸르고 육중한 비늘을 무겁게 뒤채면서 숨 쉬고 있었다. 석방 포로 이명준은 옆얼굴이 말쑥한 선장을 쳐다보다가 왼쪽 창으로 눈길을 옮겨 바다를 내다보았다. 석방 포로를 실은 3천 톤급 인도 배 타고르 호는 동지나해의 공기를 헤치며 중립국을 향해 미끄러져 가고 있었다. 이명준은 철저한 공산주의자 이형도의 아들이다. 이형도는 박헌영과 더불어 남로당을 조직해서 활동하다가 이북으로 갔다. 그는 친구의 집에서 기숙하며, 대학 철학과에 적을 두고 있었다.
비록 아버지가 월북하기는 했으나 이명준은 이데올로기에 대해 무관심했고, 은행 지점장의 딸인 윤애와 교제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데올로기로 대치되어 있는 남북 상황은 이명준을 그대로 내버려 두지 않았다. 이북에서 요직을 차지하고 있는 그의 아버지가 평양 방송을 통해 자주 비방하고 공격하는 방송을 하게 되자, 이명준은 사찰계 취조실에 불려 가서 고문을 당하게 되었다.
이명준이 철학과를 다닌다고 하자 취조관은 "그래 철학과면 마르크스 철학도 알겠군?" 하며 명준의 얼굴에 주먹질을 했다. 이런 일이 있은 후 명준은 세상이 싫어졌고 자포자기하는 심정이 되고 말았다. 이명준은 인천에 있는 여자 친구 윤애를 찾아가 그녀의 집에 묵으면서 바닷가를 배회하곤 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어느 뱃사람의 주선으로 이상적인 사회를 기대하며 북으로 갔다. 이명준의 부친은 이북에서 선전 책임자로 있었다. 아버지는 새 장가를 들었고, 정원이 있는 아담한 적산 가옥에 살고 있었다. 이명준은 아버지의 추천으로 노동신문 편집부 기자가 되었다.
그러나 거기에서 이명준이 본 것은 위선과 독선이요 치사한 아첨과 비굴뿐이었다. 그는 아버지에게 자신의 감정을 폭발시켰다. "이게 무슨 인민의 공화국입니까? 이게 무슨 인민의 소비에트입니까? 이게 무슨 인민의 나라입니까? 제가 남한을 탈출한 건 이런 사회로 오려던 게 아닙니다. " 이명준이 볼 때 북한에는 혁명은 없고 혁명의 화석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그곳은 이데올로기에 의해서 개인의 자유가 구속되고 광장만이 존재할 뿐 인간의 개성적인 삶은 보장되지 않는 곳이었다. 그런 어느 날 이명준은 자원해서 노동 현장으로 나갔다.
그는 거기서 실족하여 부상을 당하게 되고, 입원해 있는 동안 국립 극장의 일급 무용수인 은혜를 알게 되었다. 병원에서 퇴원하자 명준은 취재 명령을 받고 중국의 집단 농장으로 가지만, 거기서 그가 발견한 것은 일종의 타성과 무기력뿐이었다. 명준은 그것을 그대로 기사화 했다고 해서 당의 비판을 받게 되었다. 그런 가운데도 명준과 은혜의 사랑은 무르익어 갔다.
그러나 그녀는 명준을 보지 못했다. 어느 날 밤 그녀는 명준을 찾아가겠노라 해 놓고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그리고 이튿날 저녁 신문에서 명준은 은혜 일행이 그날 모스크바로 떠난 사실을 알았다.
마침내 6.25가 터졌다. 명준은 군관 신분으로 서울에 와서 우익 사상범을 다루던 중 옛날 자기 집의 생활을 보살펴 준 바 있는 태식을 만났다. 태식은 소형 사진기를 가지고 공산군의 군사 시설을 찍은 혐의로 체포되어 있었다. 명준은 태식을 면회하러 온 윤애를 만나게 되었다. 윤애는 뜻밖에도 태식과 결혼해 있었다. 명준은 윤애에게 "오늘밤은 여기서 자고 내일 아침에 돌아가." 하고 명했다.
그 후 명준은 자원해서 낙동강 전선에 나갔다. 이 낙동강 전선에서 그는 뜻밖에 간호병으로 와 있는 은혜를 만나게 되었다. 그들은 동굴에서 밀회를 즐겼다. 은혜는 "죽기 전에 열심히 만나요, 네?" 하고 속삭였다. 그날 밤 명준은 두 시간 가까이 기다렸으나 은혜는 나타나지 않았다. 낙동강에 물이 아니라 피가 흘렀다는 전투가 그날 있은 것이다. 유엔군의 포격과 폭격에 은혜는 죽었고, 명준은 포로가 되었던 것이다.
명준은 북쪽에 밀실이 없었던 것처럼 남쪽에도 삶을 꾸릴 광장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포로가 된 명준은 정전이 되자 제3국을 택하였다. 송환 등록이 시작되었을 무렵 그는 갈팡질팡했었다. 제3국을 택할 수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명준은 그것이 바로 자기를 위해 마련된 조항이라고 생각했다. 믿음 없이 예배하는 것이 고통스럽듯이 신념 없이 정치의 광장에 서는 것도 두렵다.
북과 남 양측의 설득자들은 서로 제 나라를 택하라고 권유했지만, 명준은 끝내 남한도 북한도 택하지 않았다. 중립국으로 가는 인도 선박 타고르 호에 올라탔고, 평소 익힌 영어 덕으로 통역 일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동안에 친해진 선장과 스스럼없는 이야기를 주고받는 사이가 되었다. 이명준은 제3국을 향해 가는 배의 갑판 위에서 심한 고독을 느꼈다. 그는 바다를 푸른 광장이라고 생각했다. 그날 밤 명준이 탄 배에 한 명의 실종자가 생겼다. 그 실종자는 '미스터 리'라고 했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광장 (한국현대문학대사전, 2004. 2. 25., 권영민)
[네이버 지식백과] 광장 [廣場] (Basic 고교생을 위한 문학 용어사전, 2006. 11. 5., 구인환)
한국문학 '광장' 열었던 전후 최대의 작가 최인훈
(2018.07.23. 오후 2:54)
최인훈 작가. 한국일보 자료사진
23일 별세한 최인훈 작가는 소설 '광장' 등으로 한국문학사에서 전후 최대의 작가로 평가받는다.
1936년 함경북도 회령 출생인 최인훈 작가는 고등학교 재학 중 한국전쟁이 발발해 월남했다. 1959년 ‘자유문학’에 단편 ‘그레이 구락부 전말기’와 ‘라울전(傳)’을 투고해 안수길(1911~1977)의 추천으로 등단했다.
발표 직후부터 문단 안팎에 파장을 가져온 중편소설 '광장'을 비롯해, '회색인'(1963), '서유기'(1966), '총독의 소리'(1967~1968) 연작, '화두'(1994),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태풍', '크리스마스 캐럴/가면고', '하늘의 다리/두만강', '우상의 집' 등 소설과 희곡집 '옛날 옛적에 훠어이 훠이', 산문집 '유토피아의 꿈', '문학과 이데올로기', '길에 관한 명상' 등을 냈다.
최인훈 전집 개정판
1994년 러시아 여행 후 20세기 세계사의 격변 속에 맞물려온 한반도의 운명, 그 역정을 고독하게 종단한 한 개인의 이야기이자 보편적인 20세기인의 삶과 고뇌를 담아낸 장편소설 '화두'(민음사)를 발표했다. 그는 '화두'를 발표하며 "내가 쓰고 싶은 것은 다 썼다"라고 밝히기도 했다.
최인훈 작가. 한국일보 자료사진
2017년 2월 24일 오후 열린 서울대 졸업식에서 최인훈 작가가 명예졸업증서를 수여받고 있다. 류효진 기자
2010년 1월 소설가 최인훈-평론가 김치수 대담. 4ㆍ19세대인 두 원로 문인이 ‘4ㆍ19의 현재적 의미’를 주제로 대담하고 있다. 류효진기자
93 한국일보 신춘문예 소설부문 심사를 하고 있는 최인훈, 박완서, 이제하 씨(왼쪽부터). 한국일보 자료사진
2009년 7월 2일 오후 명동예술극장에서 열린 연극 '어디서 무엇이 되어 만나랴' 기자간담회에서 배우 정동환(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박정자, 서주희, 김수현, 한태숙 연출가, 최인훈 작가가 포토타임을 갖고 있다. 연합뉴스
작가 최인훈 딸 최윤경님 인터뷰
(2019-09-08 10:00:02)
너는 즐겁고 재미있는 글 쓰라던 아버지
‘광장’의 작가 최인훈이 세상을 떠난 지 7월 23일로 꼭 1년이 됐다. 최인훈은 생전에 한국 현대사와 정치 현실을 깊이 있게 성찰한 작품들로 평단과 독자의 큰 사랑을 받았다. 20대 초반 등단해 평생을 작가로 활동했지만 일상생활은 거의 알려진 바가 없다. 그의 삶을 가까이서 지켜본 딸 최윤경 씨를 만나 대작가의 숨은 면모에 대해 들었다.
고 최인훈(1936~2018)은 작품으로 기억되는 소설가다. ‘광장’ ‘회색인’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작가 개인은 평생 대중의 주목 밖에 머물렀다. 무표정한 얼굴과 정제된 언어 표현. 종종 언론에 등장할 때 최인훈이 보인 모습은 한결같았다. 그는 생전에 이렇게 말했다.
“나는 기본적으로 이 사회에서 살고 있으니까 시민으로서 최소한의 의무를 지키고, 그다음에 에너지가 좀 남아 있어 시작한 일이 예술가·과학자·연구자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자식 앞에서도 술에 취해 흐트러진 모습을 보인 적 없을 만큼 단정한 삶을 살았다. 그러나 건조하고 딱딱한 사람은 아니었다고 한다. 딸 최윤경(45) 씨가 가진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이렇다.
“추운 겨울 학교에서 돌아오면 아버지는 내 두 손을 잡고 안방으로 데려가 아랫목에 깔아 두는 이불 아래 나를 묻어두곤 했다. 이불속으로 손을 넣어 꽁꽁 언 손과 발을 냉기가 가실 때까지 주물러줬고, 부지런히 비벼서 열을 낸 손바닥을 차가운 이마나 뺨에 대 따뜻하게 녹여줬다. 나는 거기서 눈을 감고 두 시간이고 세 시간이고 아주 푹 잤다.”
따뜻함과 세심함, 지력과 올곧음
대작가는 종종 딸에게 “아빠 손 한번 잡아봐라” 하기도 했다. 꽉 손을 잡으면 “힘이 이것밖에 안 되냐. 더 씩씩해야지” 하며 “Girls, be ambitious(소녀야, 야망을 가져라)”라고 말하곤 했다. 지난해 7월 23일,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 최 씨는 기억 속에 남은 이 ‘아빠’의 모습들을 떠올릴 때마다 눈물이 났다고 고백했다. 평생 작가를 아빠라고 부르며 살았다는 그는 “장례식장에서 유족 대표 인사를 하며 처음 ‘아버지’라는 단어를 썼다. 그 순간 ‘이제 완전히 다른 시간이 시작되는구나’ 싶어 마음이 아팠다”고도했다.
인터뷰를 하면서 최 씨는 몇 번 무심코 ‘아빠’라는 단어를 입 밖에 냈다. 그러고는 곧 “제가 아직도 이런다”며 수줍게 웃다 살짝 목이 메었다. 큰 눈 가득 고인 눈물을 참느라 잠시 숨을 고르는 일도 있었다. 그에게 아버지의 부재는 현재진행형의 고통으로 보였다. 최 씨는 “나는 아버지가 좋았다. 아버지의 따뜻함과 세심함, 지력과 올곧음이 두루 좋았다”라고 했다.
최 씨는 20대 중반 결혼해 가정을 꾸렸고, 두 딸을 낳아 키웠다. 그러면서도 아버지와 끈끈한 유대관계를 이어갔다. 서로의 집에 자주 오갔고, 전화통화도 많이 했다. 대작가는 딸을 만나면 늘 가볍게 안아주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때로는 “몸이 차갑다, 얼른 녹여라” “살 좀 쪄야겠다, 왜 이리 말랐느냐” 같은 가벼운 걱정을 곁들였다. 그렇게 따스히 자신을 감싸주던 아버지의 손길을, 최 씨는 지금도 선명히 기억한다. 그는 말했다.
“처음엔 그런 순간이 영영 잊히지 않을 줄 알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어도 우리 둘이 나눈 추억은 계속 내 안에 있을 거라고 믿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니 달라지더라. 기억이 아무 경고도 없이 사라져 갔다.”
최 씨가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이라도 빨리, 더 많이 써둬야겠다”라고 마음먹은 이유다. 그는 2월 무렵부터 본격적으로 펜을 잡았고, 아버지 1주기를 맞아 그간 쓴 글을 모은 책 ‘회색인의 자장가’를 펴냈다. 이 책에는 작가 최인훈을 평가하거나 그의 작품 세계를 조명하는 내용이 하나도 없다. 오직 최인훈의 딸만 알고 전할 수 있는 ‘사적인’ 이야기가 가득하다. 최 씨는 이 책을 쓰는 동안 “아버지의 딸이라는 지위와 체험을 한껏 남용했다”며 웃음 지었다. 예술고등학교에서 회화를 전공하는 최 씨의 딸, 즉 최인훈의 손녀가 삽화를 그려 의미를 더했다.
최 씨에 따르면 최인훈은 글과 그림의 어우러짐을 좋아했다. 최 씨에게 “네가 나중에 만화가가 돼도 좋겠다”라고 한 일도 있다. 최 씨는 “내가 어릴 때는 아직 만화에 대한 편견이 적잖던 시절이다. 그러나 아버지에겐 그런 게 전혀 없었다”라고 회상했다.
“네 생각이 옳다”최인훈은 권위의식도 없는 아버지였다. 그는 자식들에게 “내 아버지 세대 때는 ‘가장은 권위를 지켜야 한다’고 믿는 사람이 많았다. 내 생각은 다르다. 가족이랑 잘 지내는 게 좋은 아버지”라고 말하곤 했다. 실제로도 그렇게 행동했다. 최인훈의 집에서 집안일은 “엄마 몫”이 아니라 “누구든 먼저 보는 사람이 하는 것”이었다. 최 씨는 “아버지는 청소, 설거지 같은 일을 거리낌 없이 하셨다”라고 전했다.
가족 앞에서 자존심을 내세우는 법도 없었다. 최인훈은 글을 쓰면 아내와 딸·아들 등 전체 식구에게 돌려 읽히며 의견을 구했다. 소설 ‘화두’를 쓸 때는 매일 새 원고가 가족들 손에 ‘배달’됐다. 최 씨는 “아침에 일어나면 아버지가 전날 밤 쓴 원고를 들고 나오시길 기다렸다. 마치 연재소설을 읽는 느낌이었다”라고 회고했다.
최인훈은 당시 이미 온 세상이 알아주는 소설가였다. 하지만 가족들이 내놓는 작은 의견도 무심히 지나치는 법이 없었다.
“내가 초등학생 무렵에는 아버지 희곡을 무대에 올리는 일이 많았다. 아버지가 연극 팸플릿에 들어갈 글을 자주 쓰셨다. 그것들도 역시 식구들에게 읽어보도록 했다. 하루는 내가 ‘아빠, 이 문장 조사 ‘도’를 ‘만’으로 고치는 게 어때요?’ 하니 바로 그 자리에서 고쳐주셨다. ‘아빠 이 글에서는 이 단락을 맨 앞으로 보내는 게 좋겠어요’ 했더니 정말 맨 앞으로 옮겨주신 일도 있다.”
최인훈은 자녀들과 “과하다 싶을 만큼”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는 아버지이기도 했다. ‘회색인의 자장가’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봄에는 마당에서 봄꽃을 살피고 와서 책을 읽는 아버지가, 여름에는 부채질을 하며 소파에서 책 읽는 아버지가, 가을에는 인삼차를 마시며 책 읽는 아버지가, 겨울에는 서재의 이불 안에서 엎드려 책 읽는 아버지가 있었다.”
어린 시절 최 씨 눈에 비친 풍경은 늘 이랬다. 최인훈은 외출을 꺼렸고, 교편을 잡고 있던 서울예대에 강의하러 갈 때를 제외하고는 집에서 책을 읽거나 글을 쓰는 일이 많았다. 이렇게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낸 덕에 “아버지가 했던 말, 아버지의 표정, 아버지의 정서, 아버지의 논리”는 고스란히 최 씨 삶의 한 부분이 됐다.
최 씨는 “그런 아버지가 세상의 오해를 사는 걸 보면 답답할 때도 있었다”라고 했다.
“내가 아주 어릴 때부터 우리 집엔 아버지 제자들이 많이 드나들었다. 그분들이 가끔 내 손을 잡고 주방 같은 데로 데려가서 몰래 이렇게 묻곤 하던 게 기억난다. ‘윤경아, 아버지 집에서도 많이 무서우시니?’ 어린 마음에도 ‘아닌데. 우리 아빠가 그렇게 무섭기만 한 사람이 아닌데 왜 이런 걸 나한테 물어볼까’ 생각하곤 했다.”
최 씨가 이번 책을 통해 최인훈의 인간적 면모를 세상에 공개한 건 이런 오래전 기억 때문인지도 모른다.
최인훈 작가와 딸
어린 시절 최인훈 작가 품에 안겨 있는 최윤경 씨.
그는 “내가 어릴 때는 시절이 수상했다. ‘우리 집 전화는 도청될 수 있으니 통화할 때 늘 조심해야 한다’는 말을 듣고 자랐다”라고 했다. 집에서 가족끼리 한 얘기를 무심코 전달했다가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세상이었다. 그래서 최 씨는 가까운 사람에게도 속 얘기를 잘하지 않는 성격이 됐다고 한다. 이번에 아버지에 대한 책을 쓰며, 그는 오랫동안 자신을 짓누르던 이 금기를 비로소 깼다.
“처음엔 많이 조심스러웠다. 온전한 내 얘기가 아니고 픽션도 아닌 글이라 걱정이 많았다. ‘아버지가 좋아하실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다 어느 시점부터 ‘일단 쓰자. 용감하게 쓰자’고 마음먹었다. 내가 아는 우리 아버지라면 분명히 쓰라고 하셨을 거라는 믿음이 생겼기 때문이다.”
최 씨가 아주 어린 시절부터, 최인훈은 딸이 글 쓰는 사람이 되길 바랐다고 한다. “어렵고 복잡한 얘기는 아빠가 많이 했으니, 윤경이는 나중에 즐겁고 재미있는 글 쓰는 사람이 돼도 좋겠다”는 이야기를 한 적도 있다. 딸이 ‘야망’을 갖고 적극적으로 자기 삶을 개척하는 사람이 되길 바랐던 아버지는, 그가 일찌감치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 전업주부의 길을 걷게 됐을 때 실망한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최 씨가 낳은 두 손녀를 끔찍이 사랑하면서도, 아이들이 웬만큼 자라고 나면 ‘내 딸’이 자기 일을 시작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는 마음만은 품고 살았다. 최 씨는 “돌아가시기 얼마 전 아버지가 우리 집 서가를 둘러보고 ‘좋은 책이 많구나. 윤경이는 머릿속이 잘 정리돼 있어서 나중에라도 좋은 글을 쓸 수 있을 거야’라고 하시던 게 기억난다”라고 했다.
최 씨가 펴낸 ‘회색인의 자장가’를 읽으면 최인훈이 왜 딸에 대해 오래도록 기대를 품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묶어낸 이 책은 잔잔하면서도 흡인력이 있다. 최인훈의 작품을 사랑한 독자라면 대가의 새로운 면모를 확인하는 기쁨이 클 것이다.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자기 부모와의 기억을 떠올리며 공감할 만한 대목이 많다.
최 씨는 이 글을 쓰며 앞으로 더 많은 책을 펴내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고 했다. 언젠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작가로 활동하는 딸의 모습을 보게 될지 모른다. 최 씨는 “‘회색인의 자장가’가 출간되기 전날 꿈에 아버지가 나왔다. 나를 보고 계속 인자하게 웃으셨다. 그 모습에 힘을 얻었다. 아버지를 만난다면 ‘아빠, 저 책 썼어요. 이제 시작이에요. 열심히 할게요’라고 말하고 싶다”라고 했다.
@신간 소개@
김별 작가님께서 <몽골몽골한 몽골여행> 책을 출간했습니다. 브런치에서도 소중한 여행 에세이를 많이 남겨주시는데요. 저도 몽골에 다녔왔던 터라 감회가 새롭네요. 저도 본 신간책 주문했습니다. 한국에서 몽골을 누비고 싶은 분들은 읽어 보시면 좋을 것 같아요 :)
@공감 밑줄@
송주 (프리랜서) 두 아들 엄마이자 프리랜서 영어강사입니다. 책읽기를 좋아하며 읽고 쓰며 즐거움을 찾고자 합니다. 평범한 사람의 평범한 글이 독자 들에게도 작은 즐거움 이었으면 합니다. 아침에 눈 뜨면 얘 있다 매거진 , 끼적여 봅니다 매거진 , [브런치북] 차라리 집구석에서 나오자
최담 (에세이스트) 글쓰는 농부입니다. 인생에서 두 번째로 잘한 선택이 귀농입니다. 농촌에 살면서 지극히 주관적인 이야기를 들려드립니다. 거기서 보이는 생각들 매거진 (brunch.co.kr)
희야 (상담사) 잘 살아준 나에게 글쓰기로 선물을 주고 있습니다. 어느 누구의 삶도 쉬운 길은 없습니다. 때로는 지치고 힘든 분들께 위로가 되고 용기가 되는 글이 되고 싶습니다. 너와 내가 있고 우리가 있는 곳 매거진 , 내 마음의 단상 매거진 , 대단한 글쓰기 2 매거진
이 세상 모든 이들이 아무리 힘들어도 자살을 택하진 않기를 소망합니다.
과거에 저희 어머니가 불치병에 힘들어 약을 욺켜 쥐었다가 죽을 용기가 있다면 그 힘으로 살자며 버텨 내셨듯이 말입니다.
저 또한 2번의 사기로 전재산 탕진하고 텅빈 통장을 바라보며 어쩌면 '인생의 폭염'을 겪고 있지만 '중꺾마'를 다짐하고 투잡하며 책도 냈고 브런치 작가하며 유튜브도 찍고 음원 발매까지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것들에 에너지를 쏟아 붓고 있습니다.
100세 시대이니 마흔 여덟이면 아직 청춘, '효염있는 민간 요법'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삶의 활력을 찾는 보물지도'는 스스로가 찾아내야만 하는 것이겠지요.
다시금 많은 생각을 해보게 하는 글, 잘 봤습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오늘도 죽지 않고 버텨낸 모든 이들이 장마 뒤 개인 하늘처럼 밝은 태양을 보게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https://ditto.fm/1-musojubu
https://youtu.be/3oAYbxBMTyY?si=1VwXZi5YElgTqcCp
들깨송편 소소한 삶에서 느끼는 것을 공유하고 싶습니다.
Jul 11. 2024
글을 읽고 마음이 먹먹해지네요.
저도 긴 침묵을 깨고 간만에 글을 올린
(중략)
올해는 시기, 질투, 공격이 많이 들어오는
해 인 것 같습니다.
저 토끼처럼 헤헤 즐거운 표정과 마음으로
지내야 할 거 같아요.^^
Jul 12. 2024
에궁.. 너무 속상한 일이 있으셨군요. 원래 필명을 궁금해 하실 분들이 계실테지만.. 지켜드리는게 마땅할 것 같아요. 구구절절히 드리고 싶은 말이 한 페이지는 넘으나 최근에 비슷한 사유로 쓴 아래 글로 오늘은 갈음할께요.
브런치 댓글에 답하다
https://brunch.co.kr/@kimmiracle/362
브런치 댓글, 글이 되다
https://brunch.co.kr/@kimmiracle/366
시기, 질투
고생이 많으셨군요. 토닥토닥. 힘 내세요. 이 문제는 인간은 모두 겪게 되는 난제 같아요. 저도 브런치 입문해서 얼마 있다 해당 주제로 글까지 썼다니깐요. 읽어 보시면 절절하실 것 같아요. 타인은 고칠 수 없으니 반면교사로 나를 성장시키는 계기로 삼는게 생산적인 것 같더라고요.
질투의 화신
https://brunch.co.kr/@kimmiracle/57
한 주간 시름 덜어내시고 더없이 즐거운 주말 되시고요!
Jul 12. 2024
@청년 클레어 행복을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항상 건강하실 바랍니다.
Jul 13. 2024
@들깨송편 작가님 글 <영화 잠> 을 제 본글에 삽입하면서, 작가님 댓글은 프라이버시가 있을 듯해서요 일부만 발췌하고, 아래 제 댓글과 함께 삽입해서 공유드릴께요. 조금이나마 작가님의 상한 마음이 해소되길 바래요 :)
자기 잘못을 인지하지 못 하고 타인들의 작은 언행이나 실수, 실책을 침소봉대하며 비방하는 분들은 스스로도 불행한 분들이랍니다. 조언해도 권면해도 눈치를 주어도 안 되면, 그냥 멀리 거리를 두게 맞습니다. 그런 분들은 작가님과만 힘든게 아닐거에요. 자기를 둘러싼 가족과 오프라인의 여러 사람들과도 분쟁이이 많으실거에요. 즉 작가님때문만이 아니니 마음을 가볍게 하시길 바래요.
저는 그런 분들 보면 긍휼한 마음이 들어요. 자기보다 훌륭한 타인을 왜곡하고 질투하고 상처주는데 혈안이 된 사람들은 실은 상처가 많은 사람이거든요. 근본적으로는 그때문에 외부에 분풀이 하는걸텐데요, 얼마나 그 내면이 불행하겠어요. 작가님 마음 가벼이 하시고 힘 내세요!
@잠깐! 보석 같은 작가님들 소개합니다@
브런치에 새로 오셨거나 좀 더 많은 작가님들과 소통을 원하시는 작가님들은, 본글 댓글에 직간접적으로 메모를 남겨주시면, 다음 연재글에 본 코너에서 소개해 드릴게요. 여러 번, 반복 소개도 가능합니다. 쑥스러워하지 마시고요. <브런치 보석 작가님들 소개>는 매주 1회씩 발행됩니다. (작가님들 소개 정보는 3주마다 업데이트 예정)
송주 (프리랜서) 두 아들 엄마이자 프리랜서 영어강사입니다. 책읽기를 좋아하며 읽고 쓰며 즐거움을 찾고자 합니다. 평범한 사람의 평범한 글이 독자 들에게도 작은 즐거움 이었으면 합니다. 아침에 눈 뜨면 얘 있다 매거진 , 끼적여 봅니다 매거진 , [브런치북] 차라리 집구석에서 나오자
희야 (상담사) 잘 살아준 나에게 글쓰기로 선물을 주고 있습니다. 어느 누구의 삶도 쉬운 길은 없습니다. 때로는 지치고 힘든 분들께 위로가 되고 용기가 되는 글이 되고 싶습니다. 너와 내가 있고 우리가 있는 곳 매거진 , 내 마음의 단상 매거진 , 대단한 글쓰기 2 매거진
조선여인 (에세이스트) 은퇴 2년 차로 주변에서 흔히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에피소드를 글로 표현하고자 함. 인간미 담긴 글을 좋아해서 매일 두리번거리지만 제 나이는 잘 모르는 조선여인임. 조선여인의 브런치스토리
호랑 (시인) 시를 쓰며 에세이와 그림일기를 통해 나를 만나고 있습니다. . . 그림에세이 '지금이야, 무엇이든 괜찮아' , '누구나의 계절' 출간. 신간 <모든 다정한 저녁> 출간 호랑의 그림일기 매거진 , 호랑의 북 포레스트 매거진 , [브런치북] 들녘에 사는 이별
꿈그리다 (에세이스트) 자연속에서 계절을 담아내는 초록예찬가, 사계절을 관찰하는 것을 좋아해요. 아름다운 사계절의 소중한 순간을 글로 씁니다. 전지적 계절 관찰자시점 -자연관찰자 [브런치북] 꿈꾸는 봄과 여름
최담 (에세이스트) 글쓰는 농부입니다. 인생에서 두 번째로 잘한 선택이 귀농입니다. 농촌에 살면서 지극히 주관적인 이야기를 들려드립니다. 거기서 보이는 생각들 매거진 (brunch.co.kr)
아래는 최근 6개 글에서 말씀 나눠주신 작가님들이세요.
판도 (자영업자) 갈짓자 걸음 타박타박. 흔들리며 걷지만 뒷걸음질을 치지는 않지. 나는야 영원한 자유주의자 식당의 탄생 (brunch.co.kr) , 식당의 탄생
꿈그리다 (에세이스트) 자연속에서 계절을 담아내는 초록예찬가, 사계절을 관찰하는 것을 좋아해요. 아름다운 사계절의 소중한 순간을 글로 씁니다. 전지적 계절 관찰자시점 -자연관찰자 [브런치북] 꿈꾸는 봄과 여름
은섬 생활 작가 : = ) 2022.08 독립출판사 <오전 열시> 설립. 2022.10 16회 동서문학상 소설부분 맥심상 수상. 2022. 11 단편소설집 <너의 다정이 나를 살리고> 출간 및 <인디펍> 입고. 2022. 05 <너의 다정이 나를 살리고> e북 출간 및 <밀리의 서재> 외 입고. [연재 브런치북] 오늘만 먹었을 뿐입니다 (brunch.co.kr) , 아줌마 버추얼 아이돌 입문기 매거진 , [브런치북] 내 활자들의 모험
○시즌1_교과서에 실린 작가 110명○
*아래는 '가나다순'이고 선호도가 높은 작가님들을 우선순위로 소개해 드릴께요
강은교
고정희
공선옥
곽재구
기형도
길재
김광규
김광섭
김기택
김만중
김소월
김소진
김수영
김승옥
김시습
김영랑
김용택
7. 김유정
김종삼
김춘수
나태주
나희덕
류시화
문정희
문태준
3. 박경리
박두진
박목월
2. 박완서
박인로
박재삼
박지원
박태원
백무산
백석
생텍쥐페리
서유미
서정주
성삼문
성석제
송순
신경림
신동엽
신석정
신영복
심훈
안도현
9. 양귀자
염상섭
오정희
유치진
유치환
1. 윤동주
윤선도
윤오영
윤흥길
이강백
이규보
이근삼
이문구
이상
이상화
이성부
이순원
이양하
이용악
이육사
이청준
이태준
이호철
이황
이효석
임철우
장석남
장영희
전광용
정몽주
5. 정약용
정지상
정지용
정철
정현종
정호승
4. 조세희
조지훈
주요섭
차범석
채만식
충담사
천양희
10. 최인훈
최일남
최치원
프란츠 카프카
피천득
하근찬
한강
한용운
함민복
허균
헤르만 헤세
현덕
6. 현진건
홍석중
황동규
8. 황석영
황순원
황인숙
황진이
황현
○시즌2_추천 작가&외국 작가○
*하단은 브런치 작가들님께서 신청해 주신 작가님들입니다
조정래
공지영
이해인
김훈
남상순
*사진, 그림 출처 : 핀터레스트(pinterest)